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18장-1) 당신은 천사를 알아 볼 수 있는가?

이요나 2007. 2. 17. 10:40

(창세기 18장-1) 당신은 천사를 알아 볼 수 있는가?

 

(창18:1-4)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창조의 개념

우리는 앞에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과정을 배웠다. 이것은 좀 커다란 신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개념에 대하여 배운바 있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다시 한번 거론할까 한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창조”(바라)로서 무에서 유의 과정이다. 그 다음“아사”라는 히브리어가 있는데 이것은“만들다”의 과정이다.

 

창세기 1장에서 나무를 나게 하시고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신 과정이 이에 속한다. 이 과정은“창조”즉“바라”의 과정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서“야차르”과정이 있는데 이것은 토기장이가 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불에 구워서 완전한 그릇을 만드는 과정과도 같다.

 

창세기 1장을 살펴보면 1절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그 범주 속의 모든 환경성 물질들은“아사”(만들다)의 과정으로 창조되었다. 이러한 창조의 과정을 인간의 한계로 설명하자면 도식화될 수밖에 없지만 창조 첫날의 과정 속에는 시간과 공간의 시작과 함께 창조된 물질들을 활성화시켜 그것들을 지배할 인간들이 거주할 완벽한 물질적 우주를 창조한 것이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그 활성화된 지구 위에 거할 생물(네페쉬=living creature)들을 창조하셨다.(창 1:21) 이것을 우리는 창조의 제 2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네페쉬”즉“산 영”(living soul)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군의 절대 필수적 의식적 생명의 실체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동물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공중의 새와 물고기들은 창조(바라)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에 비해 땅의 짐승들은“만들다”즉“아사”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지상의 동물들이 한층 더 발전된 과정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 과정은 이러한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다.

 

창조의 3단계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말씀하셨고 다시“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과정은 창조의 제2 단계 즉, “네페쉬”(생물)의 창조에서 업그레이드시킨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창조단계 즉 창조의 3단계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물론 인간의 육체가 창조 1단계의 과정에서 창조한 흙과 제2 창조 단계의“네페쉬”(숨과 의식)의 범주에 포괄하고 있지마는 인간은 동물의 범주가 아닌 창조 사역의 최고의 단계인 제3의 창조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하신 것이다. 인간의 창조가 최상의 창조단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창조 사역을 끝으로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에 들어가신 것으로 증명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창조 사역은 없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한 그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 속에 거하게 하기 위하여 그가 안식하신 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신 자들을 바라보며“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을 만들고 지으시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셈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택하심 속에 창조한 아브라함을 그의 사역자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를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이 창설하신 또 다른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그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탄식할 때 그에게 은혜를 더하여 그 육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새로운 영의 사람으로 지으신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이 바라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아브라함이라고 명명된 그는 이제 더 이상 옛날의 육신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실수 투성이인 베드로를 본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모두 육신의 한계를 넘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를 받은 이후 그들은 복음의 증인(말투스=순교자)가 되어 주의 기쁘신 뜻을 따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인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성령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택한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 따라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는 모든 사람의 예표로서 후일 믿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할 일들을 미리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에“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그의 마음과 의식을 바꾸어서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시키신 것이다.

 

세 사람은 누구인가?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세 사람들에 대하여 그 해석이 분분하다. 세 사람의 등장을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성경을 고찰해 볼 때 이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신약에서 성경은“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기록하였다. 또 하나님을 뵙기를 원하는 모세에게도“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라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세 사람을 삼위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의 한계에 놓고 생각하고 판단할 때 생기게 된다. 나 또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주장을 따랐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앞에 등장한 세 사람중 한 분은 삼위의 한 분이신 여호와이시고 두 사람은 천사로 보아야 한다. 만약 이 세분을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으로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의 삼위를 인간의 시각으로 나열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을 영과 혼과 육으로 나눈 실제로 나열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본문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하였다. 아브라함은 뜨거운 햇볕을 피하여 상수리나무 그늘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고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들 앞에 나아가 엎드려 경배하며 이들 중 한 사람에게“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가지 말라”고 간청하였다.(“몸을 땅에 굽혔다”는 히브리어로“경배”를 의미한다)

 

여기서 주는“아도나이”로서 종과의 관계성을 의미하며, 1절 서두의“여호와"13절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여호와”는 자음 4자로 표기한“YHWH”로서 창조자 하나님의 제2 위이신“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다. 구약에서 사람 앞에 나타나시는 여호와는“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던 제자에게“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은혜의 나타나심

주를 만난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먼저 은혜를 거론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주께서 사람 앞에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따라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신적 사역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의 가장 큰 선물로서 인간의 선행을 따르지 않는다. 그의 사랑과 선하신 뜻을 따라 베푸신 것이다.

 

바울도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에서“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을 영접한 아브라함은 솔선하여 부인 사라와 하인들과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그들의 식탁의 사환으로 봉사하였다.

 

만약 당신 집에 대통령이 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대통령과 같은 식탁에서 음식을 즐길 것인가 식탁의 사환으로 봉사할 것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손님 접대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이로서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히 13:2)라고 경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이웃에게 베푸는 우리의 수평적 사역과 중요한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히 13:15,16)

 

손님 대접과 천사

천사들과 함께 음식을 대접받은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앞서 언약한 아들을 사라가 나을 것에 대하여“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하셨다. 그러나 창세기 18장 이후 사라가 아들을 낳았을 때까지 주께서 나타나신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행하셨다”(창 21:1)라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돌아오셨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해 봄이 좋을 것 같다. 아들을 잉태할 것을 문밖에서 엿들은 사라는 박장대소하는데 그 이유는 이미 자기의 생리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의료계에 있는 성도께서 내게 알려 왔는데 남자의 정자는 나이와 관계없이 생성되나 여자의 난자는 생리가 끝나면 생성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사라가 웃은 것은 자기의 남편 아브라함은 늙어서 발기부전의 상태이고 자신은 생리가 끊어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께서는“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라를 나무라셨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최종적 마무리 단계에 이를 때에 여자의 무지에서 오는 불순종이 있을 수 있음을 가시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