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17장-2)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이요나 2007. 2. 17. 10:47

(창세기17장-2)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창17:3-6)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쉬운 것부터 다시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심에 있어서 한가지 방법만 쓰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방법은 늘 창조적이고 합리적이시다. 또한 우주 창조와 함께 시작된 하나님의 성경공부는 아주 점진적이다. 그의 성경공부는 전무(全無)의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의 시작은 빛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그는 어둠을 없애지 아니하시고 빛과 어둠을 구분하셨다.

 

그의 창조의 틀이 흑암의 어둠에서 시작되었듯이 또한 이 땅의 피조물의 창조 과정에 있어서도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이고 단계적이었다. 즉 그의 창조(bara) 과정은 우주의 창조(창 1:1), 생물(네페쉬)의 창조(창 1:21),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창조(창 1:27)의 3단계로 발전하셨다. 하나님은 질서의 근본이시다. 그는 전능하심과 전지하심과 영원하신 그의 지혜를 따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그의 기쁨을 따라 운행하신다.

 

그는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잃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이끌어 가실 때에 그들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으셨고 무한하신 그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의 은혜를 따라 다시 하나님 앞에 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친히 자기를 나타내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셨고 그를 아는 지식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이끄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간파하심으로 친히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그의 천사들로 이 땅에 있는 그의 상속자들을 섬기게 하셨다.(히 1:14)

 

그는 그의 사역자들을 부르실 때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셨고 그의 전지하심을 따라 미리 아신 자들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이끌어 가심에 하나님의 인내로 참으시며 인간의 부족을 그의 충만하심으로 채우시기를 기뻐하셨다.

 

인간은 육체일 뿐이야?

오늘 이스마엘을 낳은 지 13년 만에 아브람 앞에 서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의 몸 속에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죄의 성품이 있어서 사람이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10여 년 동안 이방인 가운데 살면서 영육 간의 투쟁을 체험케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셨다.

또한 아브라함은 10여년 간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 속에서 실행되는 하나님의 뜻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선을 향한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후회와 고통의 세월 13년 동안 하나님과 단절된 속에서 이스마엘의 성장을 지켜보던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회의와 번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육체의 아들 이스마엘은 사래와 하갈의 갈등 속에서 아브라함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 되지 못하고 애굽여인 하갈의 질투와 분노의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브람의 육체의 소욕이 다 끊어지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식의 능력이 끊어졌을 때 나타나셔서‘온전한 행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뜻에 늘 걸림돌이 되는 육체의 소욕에 대하여“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내가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것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24)라고 탄식하였다.

 

언약의 목적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생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와 언약을 맺기를 요구하셨다. 언약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약속이다. 또한 약속은 강한 자가 그 약속을 이행할 때만 보장된다. 하나님은 사람과 약속을 하실 때 그보다 더 큰 자가 없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가리켜 맹세를 하신다.

 

그 약속이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전능하심과 전지하신 그의 성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말씀 앞에 엎드린 이유는 하나님이신 창조자께서 죄인인 인간과 언약을 하셨기 때문이다.

 

최근 사회의 틀이 깨어지는 원인 중 하나는 지도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해마다 선거철만 되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남발해 놓고 당선만 되면 입을 씻어 버리곤 하였지만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이러한 만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식하나 빼놓고는 부러울 것이 없는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그를 번성시켜 가나안 온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면 이처럼 전능자의 이름으로 언약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너를 여러 민족의 조상으로 삼겠다고 만 했으면 아마 타당성이 없는 언약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15장에서 배웠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하늘의 별을 보이며 네 후손이 이와 같이 될 것이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았지만 아브라함은 이 땅의 상급도 물려줄 아들을 요구한 것이다.

 

만약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터넷 사이버 목사만 되어 사이버 교회의 교두보가 되라는 조건으로 어떠한 언약을 청하신다면 나는 그 약속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인간은 생명의 호홉이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하는 것 외에 만지며 함께 하는 교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요일 1:1)

 

그래서 이 요나도 이 한국 땅을 모두 기업으로 받고 싶다. 이와 같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이 땅에서의 상급이 없이 하늘 나라에서 받을 상급만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믿음 생활도 허망해져서 어떤 사람들처럼 적당히 믿으면서 세상 재미를 볼 수도 있다. 바울도 이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 날에 받을 소망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당신에게 자식이 없다면 오늘의 애쓰는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흔 아홉 살의 깨달음

아브라함이 온전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나라의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그와 그의 후손을 온 인류의 빛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온전해질 수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아브람’을‘아브라함’으로 바꾸심으로 그를 새로운 인격으로 바꾸시고 그 주권을 주장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실 때 그의 코에“생기”를 불어넣으신 것과 같은 의미로서 아브람이란 이름에‘H’음을 넣으셔서 하나님의 생령, 즉“루아흐”(생기, 바람)의 사람 아브라함이 되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말씀하시고는 입김을 코에 불어 넣으셨다. 이러므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되기까지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총체적 의미가 요약되어 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육신의 사람 아브람의 노력은 이스마엘까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영의 사람 아브라함은 위대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하늘과 이 땅에서 명실공히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이어갈 언약의 아들 이삭을 낳는다.

 

하나님의 부르신 사람 아브라함은 이것을 99세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새로 배운 것이다. 아브라함도 99세에 성경공부를 다시 했는데 신학교 면허증 가졌다고 건방 떠는 사람들은 이스마엘을 몇이나 낳아야 성경공부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