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16장-3) 하갈의 몰래 카메라

이요나 2007. 2. 17. 11:01

(창세기16장-3) 하갈의 몰래 카메라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가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 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16:7-12)

 

아브람의 첩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다. 우리가 창세기 12장에서 배웠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바 되었으나 아직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그 말씀의 깊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여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더니 애굽왕 바로가 두려워 마누라를 팔아서 목숨을 부지하려다가 간신히 하나님의 은혜로 벗어났었다. 그러나 그가 애굽에서 이끌고 온 문제는 아브람의 생전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커다란 골치 거리가 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조카 롯에게 물질적 탐욕을 불러 일으켜 애굽 땅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다룰 두 번째 사건인 하갈의 몰래 카메라이다. 이 사건은 인간역사에 지대한 문제를 야기한 커다란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땅의 질서를 세우실 때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그 둘이 오직 하나에서 시작하여 둘이 다시 하나가 되는 과정을 설정하시어서 이 지구상에 일부일처제를 세우셨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이 둘 사이는 성결과 신뢰가 바탕이다. 그런데 메시아의 족보를 이어받은 막중한 임무를 가진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이 질서를 깨뜨려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우주 만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질서에 따라 수천 년 동안 그대로 운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죄가 이 땅에 들어와 이 땅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위하여 세워놓은 질서는 급속도로 무너져 내려 가인의 후예 라멕에 의하여 두 아내를 취하는 패역에 이르렀다.

 

그 후 홍수의 심판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노아와 그의 세 아들에게 이어져 메시야의 족보는 셈의 후손인 아브람에게 이어져 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에 의하여 이 질서가 다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도 그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성폭행의 자료가 애굽의 생활에서 묻어 들어온 것이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갔을 때 그와 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질서는 그 정하신 원칙을 유지할 때에만 기능하게 된다. 또한 질서란 창조주가 설정한 범위 안에서 누리는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

무질서는 무질서를 낳는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린 아브람과 사래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만다. 자기들 프로그램에 넣어두지 않았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아브람의 아이를 임신한 하갈이 갑자기 기고만장해진 것이다. 하긴 왕들을 섬멸한 히브리 족장의 아이를 임신한 하갈을 생각해 보라.

 

이제 사래같은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 시세말로 사래는 실력으로도 밀리게 생긴 것이다. 다행히 아브람이 양심을 잃지 않아서 사래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사래의 분노는 하나님 뜻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갈을 내어쫓고 만다.

 

하긴 여자들은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시앗 꼴은 못 본다고 한다. 이제 조금 더 나가면 야곱의 두 처와 처첩들로 일어나는 시앗 싸움과 질투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겠지만 이러한 무질서의 삶 속에서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어 나간다.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이 말씀 속에서 아주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성경 상에서 처음으로 "여호와의 사자"(Angel of the Lord)가 나타난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샘물 곁에서 하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갈은 이를 악물고 자기 고국인 애굽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하갈은 낙타도 없이 혈혈단신 그 길고 먼 네겝 광야를 지나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주의 천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는 분은 하나님의 제2위격인 예수 그리스도의 현신이시다. 믿지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평하는 이유 중 하나가 공평치 못함을 거론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 기록의 어느 단면만을 주장하여 하나님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시고 겁주시고 으름장 놓으시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내세워 자기 맘에 드는 사람만을 복 주시는 아주 이기적인 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이러한 과오를 범하게 되는데 영원하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로움을 한계 속의 인간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똥 묻은 막대기 치우시는 주님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의 똥 묻은 막대기를 처리하러 광야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늘 제2 위이신 예수께서 현신하게 되는데 이후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장면을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한다는 미명 아래 부부 합심하여 성폭행을 저지르고 막상 문제가 터지니까 둘이 한 통속이 되어서 하나님 뜻이고 뭐고 나 살겠다 꾀꼬리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살았으면 여성들에게 몰매를 맞을 일이다. 아마 아브람이 평생 모은 재산을 다 주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부가 합작하여 성폭행한 것도 모자라 임신한 여인에게 위자료를 한 푼도 안주고 내쫓았으니 말이다.

 

이건 완전 특종감이다. 앞에서 우리는 초록은 동색이 되어 사래의 손을 들어 준 아브람을 칭찬하였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짓들을 한 것이다 하갈이 사래의 종으로서 생 비디오 찍어 달라고 조른 것도 아니고 탤런트 모집에 응시한 것도 아니다.

 

일방적으로 자기들이 멍석을 깔아놓고 미스 애굽을 선발하여 "이스마엘"이란 폭군 영화를 찍어 놓고 가화만사성이 깨지게 되니까 위자료 한푼 안주고 대책도 없이 내 쫓은 것이다. 우리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니까 그렇지 애굽사람들 쪽에서 볼 때는 이것은 정말 돌 상놈들이나 할 짓이다. 만약 하갈이 당신 딸이라고 해보자.

 

이건 나라도 용서 못할 철천지원수 감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택하시고 가르치신 하나님이 책임질 수밖에…. 이건 완전 똥 묻은 막대기 치우러 오신 것이다. 이것이 죄인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고 택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네가 어디로 가느냐?

성경에 처음 나타나신 제2위 하나님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자. 그는 먼저 오셔서 하갈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시는 예수님과 흡사하다.

 

요한복음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이스라엘의 예배와 사마리아인의 예배에 대하여 어느 것이 옳으냐고 따졌을 때 주께서는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고 너희는 모르는 것을 예배한다"(요 4:22)라고 하시며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예배하지 말라고 가르치심으로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를 지적하셨다.

 

하갈 앞에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는 여종 하갈에게 "네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으신 데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 크리스천의 길은 미래지향이다. 과거의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주님의 날까지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다"(히 10:38)라고 기록하였다. 그가 비록 세상에서 종살이를 하였다해도 자유자의 품으로 돌아간 이후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이다.

 

비록 하갈이 교만하여서 주인에게 쫓겨났어도 그녀의 뱃속에는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의 생명이 자라고 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의 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빛과 어둠을 나누심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인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고 어둠을 없애지 않으셨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또한 노아 홍수 때에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들의 생명을 함께 구원하셨다.

 

성경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한다고 전한다. 하나님 안에는 오직 선만 존재할 뿐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이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이스마엘"이라고 지어주셨다. 이스마엘이란 "하나님이 들으심"이란 뜻이다.

 

또한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고 하신 예언의 말씀은 자금에까지 살아서 우리 눈에 역사하고 있다

 

이스마엘은 지금의 아랍민족의 조상이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분쟁의 원인은 아랍국가들과 관련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에도 아랍 계통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아랍사람들을 보면 실로 두려운 성품이 얼굴에 나타나서 쉽게 사귈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아랍사람들은 유럽인이든 동양인이든 아랍사람이든 모두 같은 혈통처럼 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오늘 하갈의 사건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믿는 자들의 경솔한 행위가 얼마나 우리 삶 가운데서 고통거리로 존재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증명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창세기 16장과 17장 사이는 13년이라는 공백이 흐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13년 동안 그 배반의 숫자만큼의 세월 동안 아브람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