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17장-1)99세에 다시 하는 성경공부

이요나 2007. 2. 17. 10:53

(창세기17장-1)99세에 다시 하는 성경공부

 

(창17:1-2) 아브람이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참참참! 그렇게 재미있더냐?

! 기가 막힐 일이다! 속된 말로 십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제 나와 함께 새로운 일 좀 해보자고 갖은 비전을 심어주고 달래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내어 복을 눌러서 채워 주고 팔아먹은 마누라도 찾아 주고 하는 일마다 힘을 실어 주어서 가나안 일대에 터주대감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하였더니 성경책은 내팽개치고 기껏 한다는 것이 참참참! 심야 프로에 빠져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하나님으로서는 또 맥이 풀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는 13년 동안 침묵을 지키셨겠는가? 속이 상해서 화를 삭이느라 그러셨는지 새로운 계획을 궁리하시느라고 그러셨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브라함으로는 죽을 지경이었다.

 

잘못이라는 것은 꼭 지나고 봐야 나타나는 것이다. 그 일에 빠져 있을 때에는 콩꺼풀이 눈에 덮여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아브라함이 말은 안 했지만 하나님과 대화가 끊긴 13년의 세월 동안‘13’이란 숫자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심을 많이 했을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란 별 수 없다 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아담의 범죄로부터 시작된 세상의 새로운 판도는 가인의 살인 사건으로 완전히 둘로 나누어서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의 사람들로 구분 지어 온 이래 인간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사단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함께 놀아나는 바람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지구의 멸망이라는 엄청난 궤도의 수정을 하셔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땅과 함께 시작되는 은혜로 구원받은 의로운 사람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실천하려 하였더니 육체의 교만과 질투를 감당하지 못한 함의 후손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몽땅 비빔밥이 되어 바벨탑을 쌓기에 이르렀다.

 

이때에도 긍휼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지개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것도 감안하시고 그들의 언어를 흩어놓아 각 민족들이 함께 멸망의 길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중에서 하나님을 찬송케 할 축복을 받은 셈의 혈통 속에서 아브라함을 따로 불러내어 이 땅의 모든 혈육을 믿음의 세계로 이끌어 메시아를 맞게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신 것이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메시야의 탄생을 약속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때를 참지 못하고 하갈의 비디오를 촬영하고 만 것이다. 돌려보낼 수도 없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참 하나님께서는 속이 무척 상하셨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아브라함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히 11:11)라고 기록하였다.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는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육체가 있음과 그 속에서 역사하는 죄의 영들을 보신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육체가 죽을 때까지 침묵하셨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에서 낳는 약속의 아들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육체의 소욕이 죽기를 기다린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이 한다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적들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킨 이적들에 대하여 의심을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인간적인 측면에서 말씀해주고 인도하실 때 그분도 사람과 같은 관점에서 생각하고 뭔가가 잘 안되면 억지로라도 두들겨 맞춰보려고 애를 쓴다.

 

나 역시도 늘 조급한 마음이 되어서 내게 주신 비전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쓰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일들이 왜 그렇게 잘 진행되는 것인지 꼭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결국 세월만 축낸 결과가 되어 잘못된 흔적만 쌓여 있을 뿐이다. 바울은 그러한 일로 애쓰고 뽐내는 사람들을 향하여“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책망하였다.

 

요것부터 다시 배우자!

이제 생식불능이 돼버려 죽을 날을 기다려야 하는 99세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13년 만에 나타나셔서 성경책을 펴 드신 것이다. 이 모든 원인이 하나님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므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부터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셨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제일 크신 성품을 일컫는 총체적 의미로서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성호이다. 그런데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완전한 하나님”즉“엘샤다이”(Al Shaddai)로 나타나셨다.“샤드”(Shad)는 젖무덤이란 뜻으로 어린아이들에게 생명과 영양을 공급하는 절대적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젖에 의존된 어린 아이임을 밝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요구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몇 개의 단어를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창세기 앞 부분에서 에녹이 하나님과“동행”하였다는 말씀을 배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골로새서에서 바울은“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태도, 즉“하나님 앞에서"(before God)“하나님과 함께”(with God)“하나님을 따라”(after God) 그리고“하나님 안에서”(in God)행하라고 가르치신다. 여기서“하나님 앞에서”(before)는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또한“하나님을 따라”(after)는 순종하는 종의 자세를 의미한다. 또한“하나님과 동행”(with)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의미하며“하나님 안에서”(in) 행한다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주께서 산상수훈을 마치는 자리에서“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줄 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적당한 선에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점안에서의 온전한 삶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네가 기준점이냐?

그러면 인간은 과연 하나님의 기준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여기에서 종교가 탄생되는 것이다. 종교란 먼저도 말했듯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접촉과정이다. 종교라는 접촉과정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종교에는 그것을 주관하는 대행자 즉 제사장 또는 사제의 직분들이 있는 것이다.

 

카톨릭에서는 신부를 통하여 고해 성사를 하면 죄가 면제된다고 믿으며 사제들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는 좀더 깊게 고찰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어떠한 행위든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의롭게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딱 두 가지 방법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는 길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수천 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구원의 이름을 주지 않으셨음을 증명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세대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가 와서 인간의 죄를 십자가 위에서 청산하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에 들어서는 안 된다. 많은 종교가들이나 철학자 그리고 비교 연구가들에 의하여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 분석하려는 어리석은 일들을 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서 신학자 가운데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을 연구하고 성경을 살피는 사람들이 있음은 참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생명이요 우리의 삶이지 연구하는 대상이 되실 수 없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를 연구하고 비교 검토 고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브라함에게“엘 샤다이”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한 삶을 요구하심에 있어 그 목적을 먼저 말씀하셨다. 그 목적의 종점은 모든 나라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