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17장-3) 하나님이 지어 주신 닉네임

이요나 2007. 2. 17. 10:44

(창세기17장-3) 하나님이 지어 주신 닉네임

 

(창17:15-17)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이름을 바꾸자!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한 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를 영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아담의 경우는 코에 생기(루아흐)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의 사람으로 만드셨다. 그런데 아브람의 경우는 그 이름에“생기”즉 바람에 해당하는 “H”를 추가함으로서 간단하게 새 사람이 되게 하셨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하나님께서 이끌어 온 짐승들에게 각기 그 이름을 주었었다. 그 중에 뱀이라는 영물이 아담과의 수직관계를 벗어나 사단의 추종을 받아서 결국은 하와를 넘어 뜨렸는데 그 때 다른 짐승들도 함께 저주를 받은 것으로 보아 짐승들이 사단의 유혹에 쉽게 응했었는가 보다.

 

이것은 주인에 대한 배반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이름을 바꾸어 주심으로 그들의 의식을 바꾸게 하셨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 있다는 말과도 같다.

 

아브람은 원래“높으신 아버지”라는 뜻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의미의“아브라함”으로 바꾸셨다. 또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바꾸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처“사래”(논쟁을 좋아함)의 이름을“사라”로 바꾸어서“왕비”라는 의미의 아브라함에 걸맞은 이름을 주셨다. 부부는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같이“H”음을 넣음으로 영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은 권세자가 이름을 바꿈으로 하여 그들의 의식 전환 즉 새 방향으로 패러다임시키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은 선지자 요나(JONAH) 이름 속에“H”가 포함되어 있음을 아십니까?

 

히브리어 이름 뒤에“H”가 붙으면 이러한 의미가 부여됩니다. 또 제 이름 요나가 본명이 아님은 다 아시지요? 사실 내 본명은 이 요나 라는 이름보다 훨씬 더 이쁘다. 내 얼굴만큼이나 말이다.(?!?!) 좀 여성스러운 편이다. 그래서 어려서는 희진 이라는 이름 때문에 꽤 놀림을 받았다. 지금도 어떤 분은 제 은행구좌 번호에 적힌 이름을 보고 부인이냐고 묻는다.(총각이 부인은 웬 부인???)

 

이 요나 라는 이름은 나의 사역과 동경 호라이즌채플의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께서 지어준 이름이다. 사실은 나의 부르심의 과정이 도망가다가 사로잡힌 요나 선지자와 비슷한 사연 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자로 요(耀=빛날) 나(奈=어찌나)이다.

 

한국교회에서 갈보리채플 교회로 옮기면서 말씀 속에 푹 빠져버린 나는 그 당시 금식을 자주 하였었는데 21일 금식 이후는 하루에 1식을 하면서 1년 이상을 지내는 바람에 내 몸무게는 52kg의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였었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에서 빛을 발한다고 해서 요나 선지자의 이름에다 위와 같은 한자의 의미를 더한 것이다. 사실 요나 라는 이름의 뜻은 하얀 빛 속을 나르는 비둘기를 의미한다. 그 당시 특별히 내게 나타난 예언의 은사로 인하여 요나 라는 이름의 의미를 더해 주기도 했다.

 

“날날이”& “똥”이라 불러 줄까?

최근 이성교제 카페의 회원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많은 회원들의 닉네임을 접하게 되는데 그 닉네임을 대하면서 사실 이래도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상망측한 이름들을 본다. 이 기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름의 중요성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름은 어차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자기를 나타내는 간판이다. 또한 크리스천의 경우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설정되는데 성경 상에서의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최종 관계는 신랑과 신부이다.

 

그는 먼저 우리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시작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그리고 친구의 관계를 거처서 형제의 단계가 되었고 지금의 우리는 약혼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 중 가장 우리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가진 분은 예수인데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의 인격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의 신부를 삼기 위하여 몸을 깨뜨려 피 흘려 산 우리의 이름이‘날날이’라던가‘원자폭탄’‘깽깽이’‘바보’심지어 어떤 사람은‘똥’이라는 이름까지 쓰고 있다. 옛말에 그 이름처럼 된다는 말이 있다. 또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의 이름을 바꾸셔서 시몬을“베드로”요한은“보아너게”사울을“바울”이란 이름을 더하셨다.

 

백살둥이를 주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자 아브라함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아마‘킥킥’댔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해서 비웃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 명년 이맘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 하였을 때 사라는 장막 뒤에서 엿듣고 웃었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왜 웃느냐고 꾸짖으셨는데 사라는 두려워서 웃지 않았다고 오리발을 내 밀었다.(이 때부터 여자들은 자기가 불리하면 오리발을 내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번 옷 로비 사건으로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던 여자들의 오리발이 그 증거다. 여자들이 오리발을 내밀기 시작하면 어느 것이 오리발이고 어느 것이 닭발인지 당췌 헷갈린다.

 

아브라함이 웃은 것은 100세에 자식을 갖는 자기 모양이 우스워서 웃었을 것이다.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은 것만도 부끄러운 일인데 100세에 자식을 낳다니 이건 자다가도 웃을 일이다.

 

요즘에는 사십둥이를 낳으면 복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120세라고 할 때 100세면 오늘날 평균수명을 80세로 놓을 때 70세에 아들을 낳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할 때 틀림없는 일이지만 당신이 70세에 아들을 낳는다면 웃음이 터지지 않겠는가?

 

만약 50세에 내게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게 하시겠다면 나야말로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이처럼 사람은 사람의 한계에서 생각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겸손을 떤 것이다.

 

아마 아브라함은 노년에 얻은 아들 이스마엘에게서 많은 위로와 애착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조강지처 사라와 하갈의 갈등 속에서 이스마엘이 믿음생활 속에서 성장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의 탄생을 허락하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어주신 하나님께 그의 삶을 부탁드리는 것이다. 얼마나 순수한 인간미가 흐르는 장면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순수한 마음의 청을 받아들여서 그의 후손도 열두 두령을 낳아 크게 번성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실컷 웃어보아라

이스라엘이 12지파인 것처럼 이스마엘도 12지파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은 지금 이스라엘과 같이 또 하나의 영적 의미를 갖고 번성하였다. 이스마엘을 걱정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언약의 아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처 사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낳은 아들“이삭”과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셨다.“이삭”이란“기쁨”또는“웃음”이란 뜻이다. 그리고“이스마엘”이란“들으심”이란 의미이다. 이것은“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간청을 들으셨다는 의미이고“이삭”은 그의 기쁜 뜻을 따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혹시 여러분이 미국을 방문하면 그들의 생활 속에서 무한한 기쁨과 웃음을 만나게 된다.

 

특히 미국인들 중의 유대계열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기쁨과 생기가 넘쳐흐른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예배는 기쁨의 찬양으로 충만하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든다면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성도들만큼 기도에 열정을 갖고 있는 민족도 없다. 그런데 한국 크리스천들의 기도도 이스마엘의 후손인 회교들에게는 명함도 못 내민다.

 

그들은 전 세계 어디에 있든지. 어떤 직책이든지 간에 하루에 몇 번씩 자기들의 성전 메카를 향하여 절을 하여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불문율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자 99살의 나이에도 솔선하여 자기와 그리고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 그리고 집안의 모든 가솔들과 함께 할례, 즉 표피를 베어버렸다. 이로써 그는 이스라엘의 백성의 조상이요 또 그의 믿음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