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18장-3)잘하면 하나님 멱살도 잡겠네 그려!

이요나 2007. 2. 17. 10:34

(창세기18장-3)잘하면 하나님 멱살도 잡겠네 그려!

 

(창18:22-25)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시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 하시리이니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18: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만수산 드렁칡이 될 수야

최근 충신 성 삼문을 유혹하던 이 방원의 시조를 좋아하는 크리스천들이 많아서“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처럼 어우러져 살고 지고∼!”하며 동서남북 갈 자리 안 갈 자리 제 멋대로 다니는데, 내 생각에 이 시조는 주의 사랑이라는 말로 섞어찌개를 하면 안 될 것이다.

 

워낙 바쁜 세월을 쫓기며 살다 보니까 상 차려 놓고 먹을 여유조차 없어서 바가지에 이것저것 집어넣고 비빔밥으로 먹던 서러운 민족이 되어서 그런지 절간의 염불도 섞고, 공자 왈 맹자 왈에, 증산도 도첩에 토정비결을 얹어 증조부 감투머리까지 세워 놓더니만 이제는 ‘노자! 노자 21세기’까지 안방에 끌어들여 놀아나고 있으니 할말이 없다.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래알 같은 사람들 속에서 불러낸 단 한 사람일지라도 100살이 되어야 겨우 철이 들어 아들 이삭을 낳았는데 지금 김용옥 씨가 설법하는 노자의 도덕 편은 왕 필(王弼)이라는 사람이 주석한 것인데 그가 23살에 요절을 했다고 추정했을 때 그는 이것을 십 육칠 세에 해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동서고금의 천하없는 천재라 하더라도 그 글을 쓴 노자의 후예로서 노자와 왕 필이 모두 아담 이래의 이 땅의 사람일진대 죄의 속성을 가진 인간임은 분명하다. 이것을 뒤집으려면 하나님보다 더 높고 영원한 자라 불리는 그 존재의 이름을 역사의 증명을 받아서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함께 하나님을 알고자 뜻을 세워서 학문을 연구하고 도(道)와 덕(德)을 세워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종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니 죄인 된 인간이 자신의 공덕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은혜를 받아 구원 사역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겠으나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먼저 태어나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등불로 옳은 것을 가르쳤다면 비록 여호와의 이름을 얻지 못하였을지라도 백보좌 심판 날에 자기들의 공적대로 하나님의 판단이 있으리라 기록되었으니 이것은 후일 우리가 증인이라.

 

원래 전혀 모르면 질문도 없는 것이다.‘1’을 알아야‘2’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1’을 모르면 그는 항상‘0’인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늘‘0’으로 돌아가야 얻는다고 한다는 가르침은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우리가 말하는‘회개’라는 말은 엄격히 말하여“돌아간다”는 뜻이 아닌가? 그 돌아가기 위한 수단 즉 통로가“도”(道), 즉 우리말로“길” 영어로“way”인 것이다. 폐 일언하고 인간에게 스스로 무엇이 있어 가르칠 것인가? 인간은 결국 누구에게 배우고 터득한 것 이상 더 밖으로는 나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한계 밖의 것을 깨우치려면 육체를 벗고 몸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곳은 부르심이 아니면 스스로 갈 수 없는 곳으로 바울이 다녀온 삼층천이다. 이곳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보좌 권으로 인간이 가히 이르지 못할 곳이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그의 은혜의 열쇠, 천국“패스워드”를 주셨으니, 이것이 “JESUS”이다.

 

암호를 알아야 숙제를 풀지

그러니 아담이래 하나님이 그 이름을 알리지 않았으면 그가 석가든, 공자든, 노자든 일단은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알기 위하여 번뇌하였으나 여호와는 자기를 그들에게 나타내시지 않으셨으니 결국 그들은 자기 길로 돌아가고 후대 사람들은 그 시조가 풀지 못한 숙제를 붙잡고 그의 이름이 만천하에 나타난 지금까지도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지 않았다”라고 단언한다.(행 4:12) 아마 후대 사람들이 종교라는 틀을 만들지 않았으면 그들도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귀가 허락되었을 것이나 종교라는 틀은 그들에게 율법을 부여할 뿐이다. 우리가 지식의 한계를 논할 때 인간으로서는 구약의 욥과 솔로몬을 앞설 사람이 없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보통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아들을 친히 보았고 하늘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들었으며, 천사의 시중을 받으며 아직도 오지 않으신 주의 날을 미리 보고 기뻐하였으니 이것은 우리와 함께 약속을 받기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모든 선지자들에게 허락되었던 은사요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기도 하다.

 

이 은사는 사람으로 능히 얻지 못하고 오직 하늘로부터 정하신 은혜를 따라 온 것이니 누가 나보고 당신이 세상의 학문이 짧거늘 어찌 하나님을 논하리요 한다면 나는 티끌이라도 지극히 높으신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아들을 보이셨으니 지금 우리 믿는 자의 손에 있는 성경책이라 말할 것이다.

 

내가 오늘을 어제처럼 달려가는 것은 이 일이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요 오직 나를 모태로부터 낳으신 주께서 나를 택하시고 그의 말씀을 입에 주사 나로 그의 영원한 복음을 오늘에 말하라 하셨음으로 내가 땅의 티끌이라 할지라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의 종 되기를 기뻐하였으니 자금 이후로 내가 더욱 내 몸을 쳐 복종할 것은 나보다 먼저 부름받은 선진들의 상과 벌이 내 앞에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나와 함께 성도된 여러분과 내 안에 계신 이가 증인이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얼굴이 작으나 내 안에 계신 분이 내 입을 빙자하여 나타나실 때에는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의 능력으로 나타날 것인즉 이것은 나도 그 일을 두려워하는 중에 바라는 소망이다. 이제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랜 기도를 받으셨은 즉 이제 나를 도와서 함께 하나님의 집을 세울 사람들을 친히 보내실 줄을 내가 알고 또 믿는다.

 

아브라함의 배짱을 보라!

본문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삼으시고 그의 하실 일들을 의논한다. 참으로 사역자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대접을 하시는 것인지, 다윗은 이러한 감격을“인간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나이까”(시 8:4)라고 노래하였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오늘의 모든 사람이 누리는 기쁨이기도 하다. 이 감동이 없이는 우리는 그의 사역에 나아갈 수 없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성의 멸망을 의논할 필요가 없으셨다면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도 없어진다. 심판을 하늘에서 임의로 하실진대 구태여 이 땅까지 오실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품성은 사랑과 공평과 정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브라함은 터득하였다. 25년 동안 삶 속에서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를 깨달았다. 우리의 지식이 온전할 때에야 진실을 분별할 수 있다. 모르면 잘 잘못을 가릴 수 없으나 알 때에 그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며 공도를 행하여 주기를 요구한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라. 절대적이다.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사람의 편에 서 있다. 사람의 편이라도 의인의 편에 서 있다. 그는 만약에 소돔성에 50명의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것이냐고 종 지목을 댄다. 이것은 상대의 속을 정확히 알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말 좀 살펴보자.“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닙니까?” 지금 이 말은 하나님을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하나님이고 누가 사람인지 모를 정도다. 마치 그렇지 않겠다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갈과 외설 비디오를 찍다가 13년 간이나 영업 정지를 맞은 주제에 지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몰아 세우고 있다. 얼마나 통쾌한 순간이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사인 것이다.

 

이 순간은 하나님께서 친히 대화할 언로(言路)를 여시고 그와 함께 유쾌히 하나님의 일을 의논하신다. 하나님은 자기가 부르신 사역자들을 이처럼 대우하신다. 이것이 그의 은혜요 사역자의 은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석가나 공자나 노자라도 천지의 이치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도를 깨우쳤다 하더라도 성경에 이르기를“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심과 같이 주께서 자기 이름을 보이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를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결국은 세상을 헤매다 구천으로 가는 한낱 인생일 뿐이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자 또한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위치는 어느 인간이라도 자기 뜻대로 구할 수 없고 학문의 깨달음이나 선한 공덕의 행함으로도 불가능하다. 오직 그의 전지하신 예정과 긍휼하신 사랑을 따라 부르신 은혜와 직분이 있을 따름이다.(로마서 주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의 위치를 잊지 않고 있다. 자신을 가리켜 티끌과 재와 같다 하였다. 이것은 자기는 육체에 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육체에 거한 자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역자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케 하셨으면 부디 자신의 부탁을 들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위력이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변경시킬 수는 없다.

 

변경되었다면 그것까지 포함돼 있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방법 중 최상의 것을 받아낼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능력이고 우리의 중보의 목적이다. 이왕이면 최선의 방법을 받아내는 것이 중보자의 노력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역자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볼 수가 있다. 아브라함은 최소한 50인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10명의 숫자까지 내려가고 만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같이 나누었던 혈육일지라도 인간이 인간을 구원시킬 수 없는 진리를 아는 아브라함으로서는 조카 롯의 가족만이라도 구원하고 싶은 육정을 가진 인간의 절대 소망인 것이다.

 

우리는 왜 5명까지라고 말못했을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다섯 명이라 했을지라도 롯은 겨우 그의 딸들만 데리고 나왔을 뿐이다. 그것도 롯의 능력이 아니라 천사들이 이끌어 낸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