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12장-2)믿음은 하나님의 실체가 나타나는 것

이요나 2007. 2. 21. 10:54

(창세기 12장-2)믿음은 하나님의 실체가 나타나는 것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12:8)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아브람은 시작을 아주 멋지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을 향한 그의 첫발은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였다. 이제 자기 민족뿐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하여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부르심의 순종과 믿음의 결단이 이처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을 때 그를 부르셨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 좀더 구체화된 것이다. 그 때까지 아브람은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가나안 땅을 자손들에게 주신다는 것은 자식을 낳을 뿐 아니라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 땅이라는 말이다.

 

이에 아브람은 그 나타나신 곳에서 제단을 쌓고 좋은 터를 찾아서 장막을 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브람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감격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의 행로 속에 포함하지 않았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믿음의 세계와 현실 세계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12:10)

 

아직 생활이 자리잡히기도 전 그 땅에 들이닥친 기근은 완전한 생활의 터전을 잡지 못한 아브람에게는 커다란 문제였다. 이것은 요즘의 우리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믿고 나면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함에 젖어 한 마디로 말해서 신선 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그래서 새벽 예배, 금요철야, 구역예배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드려지는 주일 예배 등등 믿음의 초기의 기쁨은 자신의 믿음 생활 속에 평생 잊혀지지 않는 감격들로 가득 차게 된다.

온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쁨이 솟구치게 된다. 한마디로 왕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셨으니 나는 곧 왕자인 것이다.

 

그래서 초신자들은 모두 왕자병과 공주병이 들게 된다. 그런데 베짱이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노래만 부르고 있는 사이에 겨울이 오듯이 갑자기 생활 가운데 문제와 시련이 닥쳐오게 되면 믿음은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 이성 중심으로 전환되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위적 종교 활동으로 치닫게 되던가 아니면 하나님을 인간의 도덕성 회복을 위한 종교 활동의 설화적 존재로 놓게 되고 더 나아가 믿음 생활의 감동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떠나게 되든가 아니면 종교 활동가로 변질된다.

 

이러한 믿음 생활의 변질에 대하여 바울은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너희가 성령 안에서 시작은 잘 하였더니, 이제 너희가 육체로 망치려 하느냐"(갈 3:1)라고 꾸짖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이 자신의 마음과 행함 속에서 완성하려는 종교 활동으로 바뀌게 되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 믿음으로 변질되고 만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믿음 생활은 아주 멋지게 시작되었다. 환상 속에서 만나본 하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바라보는 이상의 세계, 그러나 문제는 생활 속에 다가온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는데 있었다. 즉 믿음과 현실이 따로 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믿는 자들이 안식에 이르지 못함은 말씀을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히 4:2)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땅의 환경 속에 설정된 한계 속의 인간이고 우리의 믿음의 실체는 하늘에 계신 신(神)이시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현실 생활 속에서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초등학교 아이에게 대학교 과제를 요구하는 것과도 같다. 왜냐하면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이상이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확증이 생기기까지는 오랜 신앙의 경륜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처음 가질 때는 지구를 변화시킬 만한 거대한 꿈과 포부를 갖게 된다. 그런데 그의 부르심에 소명만을 갖고 사역 현장에 나서면 믿음이란 것이 바닷가의 모래알보다도 작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말씀 음미의 중요성

믿음이 환상과 체험 중심이 되면 이상주의자로 빠지게 되고, 의로워지기 위한 도덕적 위치에 놓게 될 때 현실 생활과 타협하는 형식주의자로 빠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친히 계시하신 말씀의 음미를 통하여 그의 뜻을 깨닫는데 맞추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주께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좀 고민을 할 필요성이 있다.

 

한 말씀 한 말씀을 음미하면서 말씀 속에 내재한 하나님의 뜻을 음미할 때 그 말씀 속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으로 우리의 나아갈 바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라는 말씀을 음미할 때 아브람이 도착한 곳은 하나님이 원하던 지점에 왔다는 의미이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은 이곳에서 그가 뼈를 묻고 살 곳이라는 뜻이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지금까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 즉 성경을 음미하면서 그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연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나를 이 땅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믿음과 그에 대한 신뢰이다.

 

이것은 이 땅의 주권과 내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완전히 알 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되는 믿음의 실체인데, 이 믿음으로 자신의 길과 생명과 뜻을 다 맡기고 그에게 인도하심을 요구하게 되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도 나의 그러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찾는 인간의 속성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 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12:8-10)

 

현실 속에 나타난 엄청난 일들을 믿음이라는 신적 요소를 가지고 해결해 나가기에는 이제 막 출발한 아브람에게는 힘겨운 시험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이상 속에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생활 현장에 나타난 기근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당면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실적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떠한 문제가 발생되면 인간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현실 환경에서 타협점을 찾게 된다. 믿음의 사람들의 문제는 삶 속에 나타난 어떤 현상들을 그 사건의 배후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 자연적 원리로 인하여 나타난 현실로만 생각하는데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천지 만물이 그 누구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일상에서 내 힘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들, 즉 하수도의 고장이나 불량 전기 소켓의 제거 또는 간단한 상처에 대한 처치 등, 이러한 것은 충분히 우리의 지식과 지혜로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것까지 일일이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신 능력의 포기요, 기만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초자연적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바로 지혜자께로 나아가야 한다.

 

본문에서 아브람은 객지 타향에서 불어닥친 기근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라는 기록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현실 속에 나타난 문제에 대해서는 창조자에게 의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상적 존재로만 생각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분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능력의 존재로 계셨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영이시고 우리는 육체라고 생각할 때 그는 정신적인 지주로만 놓고 나의 생활 전체를 주관할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실체와 생활은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종교 활동으로 빠지게 된다. 이것은 매일 생활 속에서 주여, 주여, 외치면서도 현실 생활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태도의 현대인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영이심과 그의 전능하심을 알 때, 우리의 믿음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현실 생활을 주관토록 하여야 한다.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요삼 1:2)는 말씀은 우리 생활이 영과 혼과 육의 일치 속에서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전제하며 그 통치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상 속에서만 나타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주관자이심도 잊어서는 안 된다. 본문에서의 아브람은 하나님이 내 삶의 전체를 주관하는 분이심을 망각하고 이상 중에 계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입으로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현실에 닥친 문제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기에 처해진 자기의 사람을 세상 속에서 비참해 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때, 즉 오직 구원의 창을 하늘로만 놓았을 때 하나님의 손길은 역사한다. 자기가 택하신 사람이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부르신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오늘 아브람이 경험한 메시지를 통하여 내 믿음 생활은 내 삶 전체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주권을 요구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내 기분을 맞추시지 않으심

내가 믿음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나의 계획에 맞추어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인간은 하나님을 도와 드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은 그분을 우리와 같은 인간의 선상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위엄을 낮추시고 평범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부르신 것은 예수께서 이루지 못하고 떠나신 일을 돕기 위하여 택함을 받았고 나는 예수님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버린다. 나는 과거 일본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에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나를 필요로 하고 있고 그 일을 나에게 맡긴 것이라는 자가 당착에 빠져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설정하고 홍보를 하고 사람을 모으고 기도회를 개설하고 일본 선교 여행을 떠나고 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일은 의미가 없어지고 애를 쓰면 쓸수록 회의를 느끼게 되고 사역에 대한 확신도 열의도 없어지고 문제에 봉착되고 말았다.

 

급기야 이 일들이 지금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중단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도우려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잘 모르는 데서 발생되는 모순이다.

 

그리고 내가 또 한가지 터득한 것은 우리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결과는 설혹 그 고통에서 빠져 나왔다 하더라고 그 아픔은 평생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그러한 쓰디쓴 경험은 믿음의 토대가 되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경륜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