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12장-1)축복은 첫 발을 뗄 때 시작된다

이요나 2007. 2. 21. 10:59

(창세기 12장-1)축복은 첫 발을 뗄 때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하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다"(행 14:16-17)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교회 사람들에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고 말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방인들에게는 자연 계시를 통하여 사람들의 양심 속에 전달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지금까지 인간을 다루어 오셨던 방법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은혜로 구원하신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진술한다.(창 7:9) 이것은 그의 의로움이 보였기 때문에 은혜를 더하셨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그러나 본문 속에서 오늘 우리가 만나는 아브람에 대하여는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였었는지 언급이 없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는지, 부름 받기 전에 갈대아 우르에서 무엇을 했었는지, 또한 그의 종교적 상태는 어떠했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다만 여호수아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다른 신을 섬겼다고 했을 뿐이다. 이러한 증언은 바벨탑 이후 셈을 포함한 노아의 후손들의 영적 타락상을 단면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어 나갈 데라가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겨야 영적 축복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바벨론의 종교적인 활동에 빠져 버렸음을 말해주고 있다.

 

*부르심에 대한 순종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 세였더라(창 12:4)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의 기준을 사람에게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주권 속에 두셨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에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적 의지에 있다.

 

나는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만날 때마다 매우 감격스러워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완벽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면 할 말도 없고 용기도 가질 수 없을 지도 모르나 그는 구약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신약 성경에서의 아브라함은 늘 믿음의 사람으로 등장한다. 성경은 그의 믿음의 실패에 대하여 거론하지 않고 다만 그를 믿음의 대표자로 내 세우고 있다. 여기서 믿음은 순종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의 믿음도 순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순종과 함께 역사한다. 이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나, 그의 부르심에 인간이 응답하지 않으면 그의 은혜를 입을 수 없게 된다.(엡 1:3-6)

 

*은혜로 완성되는 믿음

스테반의 증언에 따르면 아브람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비전을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국 자기를 나타내신 하나님의 비전 속에서 출발된 것이다. 이처럼 하늘 나라는 마음속에 심겨진 겨자씨 만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사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부르신 사람을 위해 준비하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믿음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고백은 결국 믿음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였을 때 이미 완성된 것이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 생활의 경륜이 남아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의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인데, 온전한 믿음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의 삶 속에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경륜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도 온전한 믿음이 완성되기까지 오랜 세월 실패 속에서 연단을 경험한다. 그러나 부르심에 순종한 단순한 그의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와 인내와 긍휼로 부르신 사람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비전을 향한 응답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2:1)

 

본문 속에서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의 어떠한 조건을 요구하시지 않았다. 그의 인품이나 지식이나 덕망이나 그 어느 것도 말이다. 다만 그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람의 순종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경우다.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어떠한 조건과 배경을 요구하시지 않고 오직 그의 은혜로 우리를 초청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먼저 그에게 비전을 주셨고(행 7장) 그 부르심에 순종한 아브람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그 우상을 섬기는 환경으로부터 떠나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내가 동경 한인교회에 있을 때 내게도 주신 말씀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실 때에 내게도 하나님의 비전을 보이셨던 것이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향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외면한 채, 종교 활동에 묶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안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깨이지 못한 심령들이 짊어지고 가는 멍에가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메시야 축복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2)

 

하나님의 부르심은 부르심의 확신과 소망을 향한 축복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확정적 명령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방법으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는 단순 원리이다.

 

이처럼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창조자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후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한 나라들이 얼마나 복을 받았으며, 그들을 저주한 나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역사가 증명을 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은 미국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라는 메시지이다. 아브람의 택함은 단지 이스라엘의 축복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의 축복의 근원이 된 것이며, 이 축복은 후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이른 것이다. 오! 할렐루야 나를 부르신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축복의 첫 발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12:4)

 

갈대아 우르의 일개 범부가 모든 민족에게 복을 미칠 복의 근원이 되었으니 이것은 호박이 넝쿨 채 굴러 온 것이 아니고 호박밭 채 굴러들어 온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이러한 복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그것은 그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의 첫발을 내디딜 때 일어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람의 믿음의 시작에 대하여 "믿음으로 아브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히 11:8)라고 기록하였다.

 

우리가 앞날에 있을 일들을 미리 보고 시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보지 않고 출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당시 교통 수단으로 보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까지는 꽤 먼 거리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약 800km정도이고, 하란 남부 지역에서 가나안까지가 약 400마일 정도이다. 아브람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본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행 7장) 그 지역이 대충 어디였을 것은 알고 출발했을 것이나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고 떠난 것이었다.

 

그 당시 이미 하란에서 다메섹과 가나안으로 이어지는 무역로가 형성되어 있어 그는 가나안 지역에 들어서자 일단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세겜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은 것이다. 성경은 고향을 떠날 때의 아브람의 심경을 서술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자기가 자라난 고향과 친척과 부모 형제까지 버리고 미래의 세계로의 부르심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나의 메소포타미아 내가 갈보리채플로 부르심을 받기 전, 하나님께서는 종교 활동에 몰두해 있던 나를 일본으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동경 생활 속에서 갈 바를 몰라 동서남북으로 헤매던 나에게 은혜를 더하시어 동경 호라이즌채플로 헌신하게 하셨다.

 

그 당시 상황에서 10여 년의 서울의 사업을 청산하고 일본으로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업들은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 시작된 사업으로 그 사업이 하나님의 축복이었든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업이었든지 간에 날로 번창하였고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종교 활동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열성적 종교 활동이나 번창하는 사업의 열정도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부르신 소명으로부터 나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의 소망과는 달리 내가 경영하고 있는 3개의 유흥업소는 날로 덩치가 커져서 내 자신도 방향을 잡지 못할 정도로 나의 목을 조여 왔다.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지 않으면 뛰어 내릴 수 없는 지옥행 급행열차가 된 것이다. 내가 일본으로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던 날 밤, 나의 손에는 창세기 19장이 펼쳐 있었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을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는 확신 하나로 그의 부르심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 때 가방 하나만을 들고 서울을 떠날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아마 소돔성을 뛰쳐나오던 롯도 나와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떠난 지 3개월 후 3개의 사업장이 있었던 이태원은 정부시책에 의하여 사업장 폐쇄와 업주들이 모두 구속되었고 나에게도 수배령이 떨어졌다.

 

*나의 하란 동경

오도가도 못하는 표류의 생활 속에서 동경 순복음교회는 나의 하란에서의 생활이었다. 믿음 생활이라는 것이 입맛에 잘 맞는 음식과 같고 또 옷과 같아서 그 굴레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서울의 사업장의 폐쇄로 서울로부터의 돈줄도 끊기고 영락없이 국제 거지가 되어버린 나는 동경 복판에서 오직 하늘로만 창을 내신 노아의 방주를 경험했다.

 

그 후 하나님을 향한 나의 비전은 다시 신학의 문을 두드리며 이방에서의 생활을 잡아갔다. 사역자의 날을 꿈꾸며 믿음을 쌓아 가던 어느 날, 믿음의 첫 날부터 섬기던 동경 순복음교회는 사역자의 내분으로 분열되었고 그러한 교회의 분열 과정에서 상한 심령이 된 나의 귀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다가왔다.

 

미국에서의 목회를 정리하고 돌아 온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동경 호라이즌채플)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잠든 나의 영혼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도 순복음교회를 떠나는데는 1년이라는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다.

 

*교회를 바꾸는 아픔

10여 년을 섬기던 교회를 옮긴다는 것은 서울을 떠나 일본에 오는 것보다도 더 힘들었다. 그만큼 나의 믿음은 순복음교회에 맞도록 길들어 있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부각되어 오는 잘못된 가르침과 목회자의 불건전한 생활 태도들은 견딜 수 없도록 나의 심령을 채찍질해 왔다.

 

결국 나는 동경 순복음교회의 일련의 사태와 맞물려 그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일년 동안을 지옥을 통과하듯 하며 금식과 눈물의 기도로 보내야 했다. 부르실 때 진작 떠났으면 그러한 고통이 없었을 것을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사람을 얽어둔 종교의 조직과 체제가 얼마나 무서운 끈인 것인지….

 

그러나 주께서는 그러한 연단 속에서도 나를 섭렵하셔서 용기 있는 결단으로 이끌어 가셨다.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던지고 달려간 그곳에는 내 인생의 마흔 세 살의 고통을 끊어내는 삶의 안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날마다 거듭되는 평안함과 자유함, 그리고 소망의 나날들 속에서 나는 동경 순복음교회를 떠난 지 6개월만에 목회자로 기름부음을 받고 한국에서의 갈보리채플 개척 사역의 사명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6년째의 사역 속에서 그 날로부터 이어진 변함없는 평안함과 자유함의 안식 속에서 날로 더욱 깊어지는 하나님의 말씀과의 교제를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하나님 계획을 다 모른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의 생활 가운데서 내가 잘하든 못하든 내 환경을 통하여 나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시지 않는다.

 

*다 보이시지 않으심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실 때는 이미 그 모든 것을 다 완성해 놓으신 것이다. 그의 전지 하심과 전능의 권세로 이미 다 이루어 놓은 하나님의 계획은 나를 위하여 준비하시고 또한 친히 완성하신 그 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감히 나 같은 존재가 어찌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에 참예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엎드려서 절 받으시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만큼 우리가 잘난 것인지 내가 없으면 하나님 일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택한 자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을 몽땅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는 않는다. 우리는 무지하고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인고로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는 범위만큼만 보여 주신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빌립 집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스테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자 사람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빌립 집사가 내려간 지역은 사마리아이다. 그곳에서 빌립 집사가 복음을 전하자 귀신이 쫓겨나가고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나자 그 일대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께서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내려가라고 명령하셨다.

 

한참 사마리아 일대가 부흥되어 마술사까지도 항복을 하는 판인데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니 참으로 사람의 머리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키시는 대로 내려가자 그 곳에서 에디오피아의 내시 간다게를 만나고 그에게 세례를 줌으로서 지금까지 에디오피아와 아프리카 일대에 복음을 전하는 근원이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로 생각할 수 없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세계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오늘의 당신은 어떠십니까? 이러한 부르심이 없으셨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중단하셨습니까? 그러면 그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겠군요! 그 일은 당신이 하지 않아도 할 사람은 늘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일을 포기한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장자의 축복을 빼앗기고 울며 매달리는 에서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동생을 섬겨야 하는 일만 남지 않았습니까?

 

자신에게 일이 주어졌을 때 자신은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에스더에게 성경은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이루려니와 너 홀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살아 남으리라 생각지 말라 하셨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당신을 부르실 때 당신은 곧 출발해야 합니다. 그는 전지하시고 우리는 하루 일도 생각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까? 믿음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주께서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당신을 채찍질하시는 것은 아닌지를….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물으십시오. 그는 인격이심으로 당신이 물으실 때, 그는 다가오십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십시오. 출발은 축복의 시작입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