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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3장-2)현실 속을 달려가는 하나님의 말씀

이요나 2007. 2. 21. 10:47

(창세기13장-2)현실 속을 달려가는 하나님의 말씀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13:11-13)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 앞에 다시 선 아브람의 믿음을 본다. 이로써 우리의 믿음은 부르심만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항상 한계 속에 살고있는 인간임을 기억해야 한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생각할 수도 많은 양의 지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먹을 수도 없다.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면서 그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설정된 공간 속에서의 삶을 누려야 한다.

 

새 천년이 밝아오는 자정을 기하여 전 세계는 온통 축제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또한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곧 다가 올 현실 속에서의 어떠한 재난을 예감하며 조심스럽게 2000년의 시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직까지 우리 눈에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발생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전 세계 사람들이 미리 염려한 것처럼 어떠한 문제들이 속출할 것만은 틀림없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아직 트랜잭션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모를 뿐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현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인간의 목적 추구의 지혜와 지식으로 만든 문명은 항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영원이라는 신적 세계를 꿈꾸며 그 영원의 세계를 이 지구상에 달성시키려 애써 왔다. 그러나 인간의 수천 년의 노력은 무너지고 다시 쌓는 탑과 같이 그 한계의 굴레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사의 흐름 속에 나타나 있는 불가사의한 인간의 행적은 역사적 유물을 통하여 무한한 영원의 세계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지구상에 남아있는 불가사의들은 모두 신과의 관계성 속에서 창조된 인간의 최고의 걸작들이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최고의 문학과 철학과 예술과 건축 작품들은 모두 개인이 추구하고 체험한 신적 교류 속에서 표출된 것들이다.

 

*메커니즘 시대의 영적 배경

현대 물질 문명이 고도로 발달되면서 신적 사고들이 쇠퇴하고 신적 존재는 한낱 이론적인 철학적 사상이나 종교적 활동의 대상으로 변질되어 인간의 생각은 신의 창조의 영역을 넘어서려는 메커니즘 시대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을 통한 모든 시스템은 또 새로운 지구랏트가 되어서 인류의 영원한 세계 즉 지상 낙원을 세우고자 하므로 신적인 세계를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단은 인간이 만들어 낸 메커니즘을 통하여 인간들의 생각을 신의 존재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여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공상 만화 속의 미신적 존재와 세습적 종교 활동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곧 다가올 적 그리스도의 시대를 통하여 모든 인간을 하나로 통제하기 위한 사단의 계획인 것이다.

 

따라서 새 천년의 시대는 유럽을 기점으로 하여 인류 평화라는 대 명제 아래 전 세계가 하나의 국가라는 개념으로 발전돼 나갈 것이며 이로서 정치 외교 관계, 경제 유통관계, 사회보장 제도의 일원화와 공통 화폐 정책 그리고 언어의 통일을 위한 거대한 틀로 전진되어 갈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지식은 나타나는 현상을 추구하는 실존적 개념으로 바뀔 것이며 사람들의 지각은 현실주의로 변질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속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이 만연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심과 십자가의 부활을 부정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재림 사상이 둔탁해 지고 모든 종교는 인류의 평화를 위한 통합적 축제로 변천될 것이다.

 

*믿는 자들의 삶의 시행착오

이러한 현상은 모두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을 때 인간을 움직이는 생각은 눈에 나타나는 현상을 중요시하게 된다. 아브람의 부르심은 환상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것이었다.(창 12:1) 그러나 아브람이 이 말씀을 충분히 음미하지 않음으로 말씀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믿는 자의 현실은 많은 시행착오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믿는 자의 삶의 토대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창조되어 이 3부분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영 안에서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생각에 치우쳐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삶의 지혜를 얻으려 할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벗어나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모든 환경의 고통을 통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애굽에서 세상의 위험과 악을 경험한 아브람은 다시 벧엘로 올라와 자기에게 현신 하신 하나님을 찾음으로 믿음을 회복하였고 그 믿음의 회복은 현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미리 하신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말씀의 깨달음을 바로 실천하기 위하여 혈육같이 사랑하던 조카 롯을 떠나 보낸다.

 

또한 부르신 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삶의 현장 속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터득한 믿음의 행로 속에서 그에게 하나님의 미리 하신 말씀이 온전히 지켜질 때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된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사랑하는 자라야 나도 그를 사랑하리라 말씀하셨다.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

롯이 아브람을 따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13:14-18)

 

이제 우리는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 보자. 먼저 하나님께서는 현실 생활 속에 급급하는 아브람을 일깨워 눈을 들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너무 현실 속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현실 속에 나타나는 일에 대한 나의 집착 때문에 생길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은 아브람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부르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아브람을 통하여 모든 족속으로 복을 얻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명령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부르신 소명에 대한 확신을 고취시키시는 것이다. 또한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라는 말씀은 부름 받은 자가 서 있어야 할 위치와 사역의 범위를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는 명령에서 주의 부르심이 개인적이며 하나님과 수직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 각기 자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역을 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모든 교회는 오직 하나의 모습으로 통일되어 가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래서 같은 신학적 노선을 만들어 예배의 형태와 사역을 통일시키려 한다. 이것이 진리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롯과 아브람을 구태여 나누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이방 교회의 교두보인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투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하나님의 뜻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도 바울은 이방 선교를 위하여 행동 통일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화합하지 못하고 두 팀으로 나누어졌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방 선교는 바나바와 바울로 나누어져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부르심의 수직관계

많은 사람들이 갈보리채플의 예배 형태와 교회의 복음활동에 대하여 묻는다. 나는 이럴 때마다 답변의 곤란성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 갈보리채플은 사역의 공통성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각기 독립된 주권적 사역을 하고 있으며 예배의 방법, 선교의 방향에도 각기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즉 우리의 사역은 부르심을 받은 그 사람의 소명에 의하여 나타나게 되는데 그를 주관하는 주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은 성경 속에서 깨달은 진리의 말씀을 함께 분변하며 공유하는 것이며 서로를 위하여 중보하고 서로의 좋은 점을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콘트롤하지 않으며 설혹 그가 범죄 하였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는 정죄하지 않고 경책하며 위로하고 다시 세우심을 받도록 권면한다. 이것은 우리를 부르심이 개인적이며 그리스도의 집을 위하여 주께서 친히 세우신 등경 위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이제 택함을 받은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자신에 의하여 잘못된 일들을 신속히 정리하고 주께서 다시 일러주실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