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14장-2)전쟁의 배후와 승리의 비결

이요나 2007. 2. 21. 10:42

(창세기14장-2)전쟁의 배후와 승리의 비결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14:13)

 

본문에서 처음으로 '히브리'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말은 에벨의 후손을 지칭하는 의미일 수도 있고, '강 건너 온 사람'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 말은 아브람이 이방 가운데 살면서도 장차 자기의 후손들이 이룰 한 종족을 구분하는 의미가 내포되고 있다. 아브람은 롯과 헤어졌기 때문에 아직까지 혈육이 없이 함께 한 하인들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아브람은 메시아가 오기까지 혈통을 지켜야 하는 막대한 임무와 함께 자기들의 신분이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잊지 않았다.

 

우리가 외국에 가보면 어느 나라를 가더라고 한국 촌과 중국 촌과 일본인 마을이 있다. 각 민족들이 섞이지 않고 어디에 살든지 간에 자기의 고유의 민족의 말과 풍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각기 종족과 그 방언 대로였다"라는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브람은 그 지역 주민들과 동맹을 맺고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 종족을 지키면서 그리고 이웃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 타 종교를 믿는 이웃과 단절된 생활을 하려는 의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와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오셨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시기를 원하시고 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영접하고 안하고는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이다.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리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그들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진리와 또 다른 진리

우리 칼럼 가에 최근 '반야와 지혜를 찾아서'라는 불교계열의 칼럼이 베스트로 올라왔다. 몇몇 크리스천들이 그곳에 들어가서 함께 교제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 때로는 신앙노선에 관한 시시비비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며 그들의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만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각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불순종의 영들이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말씀 안에 거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할 때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이 그에게 역사하여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군사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가르침에 이끌려가서 현혹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모든 종교 속에도 진리, 빛, 믿음, 영생, 소망, 자비, 인내에 관한 가르침이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포용하고 있는 진리와 빛과 영생과 자비와 소망과 인내들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아가페)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을 묻는 유대교인들에게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요 17:3)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진리와 자비와 인내와 소망과 영생은 우리가 아는 진리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범주에 속한 것임을 자각하여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에도 여러 가지가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 인위적으로 어둠을 밝히는 전등이나 등불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주에 창설하신 태양과 달과 별들이 있다. 또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지식의 빛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하신 말씀이 빛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라고 증거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라고 하셨고, "빛이 있을 동안 나를 믿으라"(요 12:36)고 하셨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등경 위에 세워둔 빛이지 원초적인 빛이 될 수는 없다. 주께서 요한복음 5장 35절에서 "요한은 켜서 둔 등불"이라고 증거하셨다. 따라서 인생의 삶의 도를 인도한 이 땅의 모든 성현들은 켜서 둔 "등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로부터 시작된 빛이 아니라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지식인 것이다.

 

또한 카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나 베드로나 그 외의 성인들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진리의 빛을 받은 증인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며 또한 주께서 친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기도를 받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받은 사람들로서 담대함을 가지고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따름이다. 이 빛은 진리이며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요 17:16-20)

 

*하나님으로부터의 지혜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처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14:14-16)

 

아브람에게는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명이 있었다. 이것은 이방 속에서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집에서 길렀다는 말은 돈으로 산 종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낳고 가르친 종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그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식솔들로 이끌었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혜를 주는 말씀이다. 우리는 늘 세상 가운데서 무엇을 얻을까 생각하는데 믿는 우리는 먼저 나로부터 내 가까운 이웃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우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것, 즉 신령한 것들을 전달하여 주어야 한다. 그 하나님의 신령한 것은 삶 속에서 그들과의 온전한 교제를 나눌 때 그의 빛이 삶 가운데 발하게 되는 것이다.

 

즉 빛이며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 속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하여 나타날 때 그 능력이 그들에게 전달되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아브람은 헤브론에서 단까지 약 200km정도를 쫓아가서 가신(家臣)들을 나누어 밤을 타서 기습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연합군은 그 인근지역을 모두 정복하고 소돔 왕을 비롯한 다섯 왕을 파한 전략가였다.

 

또한 아브람이 아무리 사랑으로 하인들을 기르고 연습시켰다 하더라도 왕국을 이루고 조직적인 군세를 가진 그들과 비교될 수는 없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신뢰 속에서 그들을 파할 지혜를 얻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간파한 것은 그들은 인근 지역과의 전쟁과 또 다섯 왕들과의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많이 되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전쟁에서의 승리에 취하여 전쟁 노획물과 승리감에 넘쳐 술과 여흥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들을 대적할 나라가 없다고 자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지역은 역청 구덩이가 많기 때문에 그 지역을 잘 파악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도 없고 또한 횃불을 밝히고 기동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으로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성경은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 지로다"라고 말하고 있다.(창 14:20) 이러한 전술적 지혜, 그리고 담대함과 용맹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던 것이다. 또한 아브람이 이처럼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갔던 것은 만군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시고 계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13만 5천명의 미디안의 연합군을 섬멸시킨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를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