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9장-4)세 아들 사이에서 노아의 고민?

이요나 2007. 2. 21. 11:47

(창세기9장-4)세 아들 사이에서 노아의 고민?

 

(창세기9:24-29)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배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술이라는 것!"

인생의 삶에 희노애락을 안겨주는 술이 또한 인생을 영원히 망치게 하기도 한다. 술이란 것이 원래 나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마약이란 것부터 생각해 보자 전쟁터에서 총상으로 팔다리가 부상을 입었을 때 그 진통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몰핀이라는 진통제를 주사하게 되는데 그것은 마약이다. 중국을 망하게 한 아편은 양귀비에서 축출해 내는 엑기스이다.

 

우리 어려는 배앓이가 심했는데 의원이 없었던 시골에서는 동네 어느 집 뒤뜰에서 한 두 포기 관상용으로 재배했던 양귀비를 축출해서 만든 비상 환(丸)를 조금 얻어다가 물에 타서 먹이면 거짓말같이 그 통증이 멈추었다. 우리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 사용하는 것도 모두 마취제로서 마약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주정이 높은 술은 긴급시 수술용 소독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술이 인간의 쾌락의 도구로 등장하면서부터 인생을 망치는 최음제가 된 것이다.

 

이 술이 삶의 동반자인 정다운 연인과 친구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만드는 보다 나은 삶의 촉진제인 반면 인간을 아주 비참한 동물로 이끌어 가는 마약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과거 그러한 생활 속에 젖어있었던 이방교회 사람들에게 술에 취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러한 술의 힘이 없이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마음의 기쁨과 평온함이 주어져서 구태여 술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잠언서 31장과 이사야 5장에서 거론된 독주와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들에게 내린 은혜 즉 은사를 자기 중심적으로 마구 사용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것에서 유익하고 적당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일부 물의를 일으키는 교회의 문제도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술 취한 사람처럼 남용함으로 발생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성도들의 삶 가운데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은 잔치 집에서 물과 쥬스만 먹는 것 같아서 믿음생활에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은사를 금하지 말고 모든 일에 적당히 하여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은혜와 영광을 돌리라고 한 것이다.

 

"성경해석의 오류"

오늘 본문 속에서 발생된 노아의 술 취한 사건은 세 아들의 삶의 진로를 분명하게 결정짓는 계기를 만든다. 이 성경말씀이 부분적으로 잘못 해석되어 근대 교회에 와서 많은 혼란이 야기되어왔다. 수세기 동안 인종전쟁을 일으켰던 흑인들의 문제다.

 

인간 사냥꾼들이 아프리카 등지에서 흑인들을 포획하여 유럽과 미국일대의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왔었는데 그 당시 유럽에 속한 모든 나라는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가 국교화 되면서 고급관리와 귀족 상류층들이 모두 기독교 문화생활을 영유하였는데 이들은 노예제도를 합법화하는 구실로 함에 대한 노아의 예언을 적당하게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그들의 주장대로 받아들인다면 동양권에 있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인들이 모두 함의 자손이라고 근거를 만날 때(창세기 10장 참조) 우리의 처지가 참으로 비참해 진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그 문맥을 따라 당시의 상황을 살피고 시대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서 이러한 오해를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의 품성과 죄의 속성"

모든 인간은 똑 같지 않은 성품을 갖지 않음을 전재로 한다. 따라서 노아의 세 아들 즉, 셈과 야벳과 함도 각기 다른 성품의 소유자였다. 또한 이들은 1370억의 멸망 받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방주를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음을 상기하여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성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노아의 고민은 이들이 어떻게 좋은 조화를 이루어서 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을까 였을 것이다.

 

최소한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노아" 즉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인간들을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는 어마어마한 예언을 받고 태어났고 또 당대의 의로운 생활을 하던 자로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이 세 아들이 이 땅의 인종의 조상이 될 것을 생각할 때 노아로서는 많은 궁리와 번민이 있었을 것이다,

 

자식을 부모처럼 아는 부모는 없었을 것이다. 세 아들이 자식을 낳아가면서 생활하는 것을 보았을 때 각자의 좋은 특성이 있는 반면 인간의 죄성이 유난스럽게 표출되는 성격 소유자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노아의 고민"

홍수 이후 세 아들과 함께 삼백 오십 년을 살아가면서 노아는 각 아들들의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심하게 가르쳤을 것이다, 특히 홍수이전의 인간의 패역함을 기억시키면서 그들에게 가장 큰 중심 교육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삶이었을 것이다,

 

철저한 가부장적 생활 속에서 함은 유별나게 육적 호기심과 충동적 행동을 선호하였을 것이고 이에 대한 노아의 제제는 더욱 가중하였을 것이나 불순종의 죄성은 마음 속에서 그러한 노아의 도덕적 교육과 가부장적 권위에 도전적 반항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노아의 술 취한 모습을 보았을 때 함의 마음 속에서는 불순종의 아들들의 영이 역사하여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던 노아를 조소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함이 가장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임이 틀림없다. 셈은 늘 하나님 일에 사로잡혀 아버지 노아를 통하여 하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하였을 것이다. 야벳은 어쩌면 공상가일 수도 있다.

 

또한 야벳은 이론가요 모험을 위하여 연구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생각할 때 이 세 아들의 형상은 우리 교회 속에서도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보면 혈기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흥분에 이끌려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남들이 무엇을 하든지 조용히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말없이 말씀에 순종하며, 어떤 사람들은 이상적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지식의 탐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눌 수 있고, 국가 규모로 나가려는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필수 요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상황을 더욱 면밀히 검토해 봄으로서 성경이 무엇을 우리로 가르치고 하는가를 접근하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