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4장-6) 음녀가 타고 앉은 물위에 흐르는 설교

이요나 2007. 2. 21. 14:32

(창세기4장-6) 음녀가 타고 앉은 물위에 흐르는 설교

 

(창세기4:23-25)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요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도다

 

*라멕의 설교는 지금도

몇 년 전 어느 기도원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서 간 일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공기 맑고 산수 좋은 기도원에서 지내는 밤 정취는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더욱이 친절한 원목(院牧)이 특별히 마련해준 산사(山舍)에서의 하룻밤은 깊은 기도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절묘한 시간이었다. 주께서 한남동 사거리 한복판 먼지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이요나를 불쌍히 여기셨던 모양이다.

 

그곳은 일년 내내 부흥강사들의 집회가 열리는 곳으로 원목이 나를 초청하여 자기의 시간을 내게 준 것이다. 내로라 하는 부흥사들의 허리를 짜르고 성경교사가 기도원 집회에서 성경강해를 한 것은 아마 내가 처음일 것이다. 내 강의는 오후 집회 한번뿐이라서 기도원 뒷길을 따라 거닐며 어린시절 여름이면 장릉산 유원지 봇짐 장수를 하시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르던 생각에 잠기곤 했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고 숙소로 향하려던 나에게 오늘은 특별강사가 오시니까 저녁 예배를 참석하여 달라는 원목의 부탁이 있었다. 내 성격을 잘 아는 원목이 부탁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모처럼 만에 부흥사들의 설교를 들어 볼 요량으로 집회장으로 갔다.

 

집회장은 70-80여명의 남녀 성도들이 배추포기처럼 앉아 열광적인 손뼉을 치며 준비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할렐루야 빨간 띠를 두른 집사들이 헌금봉투를 돌리기에 분주하였다.

 

*누가 왕인지

심금을 울리는 1960년대의 찬송이 한시간 가량 진행된 후에야 묵직한 저음의 사회자의 예배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무성(無聲)시대의 활동사진 연사와 같은 음성을 연출하는 사회자는 노련한 언변과 제스츄어로 장내를 엄숙한 분위기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런 때는 방귀는 둘째치고 튀어나오는 기침도 막아야 한다. 사회자의 열정을 받쳐주려는 듯 대형 스피커를 타고 무겁게 깔려 내려오는 올겐 반주는 너무 크다 못해 오장육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심장이 약한 나는 이 집회를 끝까지 참을 것인지 도중에 나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잠시 후 제왕처럼 등단한 강사의 노련하고 유연한 제스츄어는 여유가 있다못해 일류 탤런트의 연기를 뺨치고 있었다. 마이크를 다루는 기술은 그의 쉬어터진 목소리를 강약으로 적당히 커버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의 기도원을 돌며 자아내던 눈물과 웃음 보따리를 다시 펴내려는 순간이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들고 연실 흘러내리는 땀을 씻어 내리며 우리 한민족이면 누구나 겪었을 사연을 끄집어내어 가슴에 응어리진 눈물을 쏟게 하고 억지 웃음거리로 60년대 코미디를 재연하고 있었다.

 

*아멘입니까?

그는 말끝마다 "아멘입니까?"를 연발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듯 아멘을 연발하는 성도들... 행여나 화답의 목소리가 적으면 "요것들 봐라 완전히 군기가 빠져 버렸네. 어디 이래가지고 복 받을 수 있갔어? 믿으시면 아멘하십시오! 아멘입니까?"를 연실 외치며 눈을 부릅뜨는 그의 협박 소리가 어찌나 큰지 한쪽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있던 이요나의 목구멍에서도 "아멘"하고 터져 나왔다 어쩌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성도들은 영낙없이 지적되어 군중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것은 예배를 들이러 온 것이 아니라 공산군에게 잡혀 온 포로들이 수용소 집회소에 끌려나가 보안교육을 받는 꼴이다. 나의 이성은 더 이상 그의 설교(?)를 인내하지 못하고 현관을 튀어나오면서 주님을 불러댔다 "주님 전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주께서 판단하소서 이 불쌍한 당신의 백성들을 기억하소서 이들을 구하소서"

 

그날저녁 나는 슬퍼서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 내 자신이 슬펐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그 강사가 슬펐고 그 설교를 들어야 하는 주님의 백성이 더욱 슬펐다. 365일 하루도 빼지 않고 그것을 보아야 하는 우리 주님은 얼마나 슬펐을까? 나는 그 날로 기도원 강의 1개월만에 도중하차를 당하고 말았다.

 

*정복자의 망상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기고만장한 "라멕"(정복자)의 설교를 듣는다.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이 땅에서의 살아 갈 생명을 보장받은 가인은 자신의 힘으로 이 땅에서 지상낙원을 세울 토대를 구축한다.

 

그로부터 또한 점점 커져가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욕망은 5대손 라멕의 시대에 이르러 지상낙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New Project를 가동시키기 위하여 1단계로 하나님이 세우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세상의 기본 조직 일부일처제의 원칙을 깨고 두 아내를 맞는다.

라멕은 각양각색의 재주와 능력으로 이 땅을 지배해 나갈 아들들의 어미들에게 자신의 주체사상을 주입시킨다.

 

라멕의 설교는 "내 소리를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로 시작된다. 이와 같은 설교는 오늘날도 수많은 교회에서 쏟아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자기의 소리와 자기의 말들로 주의 이름을 도용하고 주의 성도들의 귀와 마음을 더럽히고 있는가? 그것을 미리 아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비밀을 가르치시면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조심하라"(막4:24) 하신 것이다. 라멕의 설교는 자신의 논리가 주격(主格)으로 되어 있다.

 

*아전인수격 성경해석

그는 "나의 창상으로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창상은 채찍 자국을 의미한다. 라멕은 자신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의 양심을 괴롭히는 소년을 죽였다 여기서 가리키는 "사람"이란 칭호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은 사람의 호칭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는 끊어져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 올 수 있도록 길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칭호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자의 호칭인 것이다.

 

또한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라고 하는 그의 논지는 인류를 비참하게 한 가인을 죽이는 자가 받는 벌이 칠배라면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New Project를 개발한 자신은 아무도 죽일 수 없다는 논리다. 이처럼 하나님 앞을 떠난 죄의 속성은 브레이크 끊어진 전동차와도 같다.

 

인류를 위한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기본 단위 조직을 깨뜨린 라멕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신 뜻을 따라 가인의 생명을 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합리화 하므로서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자리에 스스로 처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