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4장-2) 이 질투와 분노는 어찌된 것입니까?

이요나 2007. 2. 21. 14:40

(창세기4장-2) 이 질투와 분노는 어찌된 것입니까?

 

(창세기4:8-12)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였느니라 땅이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과 아벨의 시작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보았다. 하나님의 판결을 따라 땀흘리고 가꾼 농작물을 제물로 삼은 가인과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가지고 나가는 아벨! 이것은 어쩌면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두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태초에 빛과 어둠을 나누셨듯이 이 땅에는 낮과 밤, 진리와 불의 그리고 영적 예배와 육적 예배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강과도 같다.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신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교제를 아주 단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예배를 통하여 나아갈 길을 예비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와가 아들을 낳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확신과 함께 "가인"이라 이름하던 의미 속에서 그가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할 자일 것을 믿고 철저한 메시야 교육을 시켰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메시야를 낳기를 소망하는 유대인의 여인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여 완전한 인간을 완성시킬 수 있다면 이 땅에는 완성된 인간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겠는가? 성경은 "사람의 사정도 자기 안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그의 영 외에 누가 아느냐"고 기록하였다. 예수께서도 예배의 장소를 중요시하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을 다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므로 이 계획은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단의 머리를 멸할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택함 가운데 속한 하늘의 별과도 같은 비밀이다.

 

*두 종류의 예배

우리는 또한 본문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두 사람의 신앙적 갈등이 질투와 시기를 유발시켜 친형제를 살해하는 인간의 분노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은 자신의 부족함이 노출될 때 느끼는 부끄러움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 부끄러움은 나보다 연약한 자가 인정을 받을 때 질투하게 되고 시기하여 분노를 일으킨다.

 

아담과 하와의 뜨거운 열망 속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통하여 메시야의 예언이 성취되기를 꿈꾸던 가인은 자기보다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인정을 받은 아벨을 질투하고 시기한 나머지 결국 동생을 죽이기에 이른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밤이 되도록 분노하지 말고 분노하여도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 말은 인간이 분노를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또한 밤을 맞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이것은 분노가 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속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분노는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우리 마음 속에서 숙성되어 누룩처럼 온 신경을 통하여 혈관을 따라 각 기관들에 파고들어 질병을 유발하고 외적으로 표출되어 다른 사람을 욕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예배와 인간

그러면 왜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 속에는 하나님과 교류하는 영적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단절돼버린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로 허망해지고 갈급한 인간은 그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신을 향한 종교활동의 시작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모든 전쟁은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볼 때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영적 투쟁이며 종교 속에서 태동된 이념과 체제 싸움이다. 또한 이러한 영적 전쟁은 인간의 혈통보다 앞선다는 것을 오늘의 본문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영적 예배의 승리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영적 전쟁의 승리를 피의 제사로 두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생존권 쟁탈전에 있어서 피 흘림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세상의 법칙이 하나님의 세계에도 적용된다면 이 땅에서의 영원한 승리자는 최고의 무력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의 영적 전쟁에서 패배한 인간을 사단이 다스리는 세상으로 내어 보낼 때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합당치 못한 아담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친히 "피의 제물"을 준비하여 인간의 연약함을 담당하셨고 사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길을 예비해 두셨다. 이로부터 이 땅에서의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는 피의 제사로 시작되었다.

 

*판결받는 예배자

이제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범죄한 가인은 다시 하나님의 판결을 받는다. 에덴에서의 영적 전쟁에 실패한 첫 사람 아담에게 내린 판결은 사람을 향한 저주가 아니라 사람의 삶의 터전 즉 생활권에 대한 저주였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땀흘려 밭을 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세상 속에서의 인간의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택함과 인간의 의지 속에서 거룩한 성령의 영적인 기름부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터득하는 데 있다. 가인은 메시야를 향한 인간 즉 아담과 하와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벨은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이었다.

 

아담이 선택한 가인의 메시야 꿈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하나님의 택함과 기름부음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첫 새끼 양을 제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형제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들 사이에는 또 다른 영적 전쟁이 태동되었다.

 

이로서 하나님의 고귀한 생명인 피를 땅에 쏟게 한 가인은 밭을 갈아도 효력을 내지 않게 되어 결국 이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 종말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는 어떠한가? 나의 합당치 못한 예배로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한 자신의 수치를 감당 못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합당한 방법으로 나아가는 형제를 미워하는 범죄를 짓고 있지는 아니한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제 하나님 앞에 선 우리에게는 아벨의 피보다 더 고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 우리를 능히 죄에서 구속하시고 의로움에 들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서 오직 "예"와 "아니오" 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내가 드리는 예배 과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