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4장-3) 가인의 표는 모든 예배자의 고뇌이다

이요나 2007. 2. 21. 14:38

(창세기4장-3) 가인의 표는 모든 예배자의 고뇌이다

 

(창세기4:13-15)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의 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죄 짐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인을 만난다. 또한 우리는 복음서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을 만난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 동시에 만나는 짐 사이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가질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판결 앞에 선 가인이 걸머진 죄 짐은 과연 무엇일까? 또한 주님이 부르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이 걸머진 짐은 과연 무엇일까? 또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 앞의 우리는 과연 짊어지고 있는 짐은 없는 것인가? 그리고 가인은 왜 예배를 드리고자 하였는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을 살펴보자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최초의 범죄자 아담의 생활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그들은 이 땅에서 아무런 소망을 갖지 못한 채 살기 위하여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자식을 낳고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아벨이 죽었을 때에도 가인이 범죄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다시 셋을 낳았을 때에도 성경 속의 그들은 침묵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이들의 시대는 마감된 것을 의미하며 다만 약속의 아들 메시야가 오기까지 여자의 후손들과 사단의 후손들의 영적 전쟁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음을 뜻한다.

 

하와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첫 번째 사역을 맡았던 가인은 하나님 앞의 예배의 선택에서 실패자가 되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 결국 형제를 죽이고 만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인간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옛 뱀 곧 하나님 앞에 쫓겨난 천사 사단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의 권세가 사단에게 넘겨지던 날 사단은 하나님의 판결 속에서 장차 여자의 후손 메시야의 예언을 함께 들었던 것이다. 어째든 아담의 범죄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영적 전쟁의 시초가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육체가 필요한 사단

사단은 영적 피조물로서 세상을 지배하기 위하여는 살아 있는 영혼(네페쉬=Living Life) 즉 생물의 몸 속에서 역사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사단이 이용할 이 땅의 모든 짐승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사단의 추종자가 될 수 없게 되어 버렸고 지혜가 부족하고 늘 호기심과 감성에 이끌렸던 여자는 사단의 영원한 원수가 되었다.

 

이제 사단은 오실 자 메시야를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제단에 참예한 자를 충동하여 그를 통하여 메시야를 대적할 수밖에 없다. 영적 피조물인 사단도 창조로부터 인간의 속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는 영적 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결국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 공허를 채우기 위해 열망하는 영적 갈급함 속에 역사하여 마음 속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켜 그 죄 성을 다스리지 못한 채 이성을 잃고 하나님의 기름부은자를 대적하도록 한다

 

*인간의 구조학

여기서 우리는 인간은 왜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는 또 다른 의문을 갖는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가인의 분노가 하나님의 예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차라리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우문(愚問)을 할 것이지만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창조된 생물(Living Life=네페쉬)로서 각 부분이 연합되어 하나를 이룬 열등한 삼위일체로서 각 부분별 필요를 요구한다.

 

(靈)은 신(神)의 임재 하심을 혼(魂)은 지식과 미덕과 정서를, 육(肉)은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음식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육(肉)의 필요를 지식으로 대신 할 수 없다. 또한 마음의 필요를 식물로서 채울 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 즉 영(靈)적 공간은 그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우리는 육적 만족을 위하여 먹고 마신다.

 

또한 우리의 정서와 마음을 넓히기 위하여 많은 학문을 연구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새로움을 창의(創意)해 나간다. 그러나 영(靈)적 공간만큼은 그 무엇으로 채울 수가 없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이 영적 부분을 채우기 위한 영적 갈급 속에서 자신의 신(神)을 만들어내고 섬기므로 종교활동을 하게 된다.

 

*인간의 고뇌

나는 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창세기를 연구해 오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살인자 가인을 살려 주셨으며 그를 만나는 자들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는가에 대하여 그리고 또한 그를 죽이는 자에게는 벌을 칠배나 더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미에 대하여 매우 궁금해 왔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오늘에 와서 조금씩 풀리고 있다.

 

과연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종교적 활동으로 스스로 그 굴레를 벗어 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그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라면 구태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내 형제가 범죄하면 몇 번을 용서하오리까?"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과 일곱 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새로운 각도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형제라는 진정한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아담과 하와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음 안다.

 

이것은 범죄한 사람들에게는 그 문제를 터득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히10:26,27)고 정의하였다.

 

*해결책

오직 이 진리의 터득은 주의 택하심과 그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자 이제 죽기살기로 땀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가인을 생각해 보자. 그 얼마나 측은한 인생인가? 하나님을 바라는 영혼의 갈급함 속에서 아니 나아갈 수도 없고 부르심이 없이는 나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고지에 선 선택적 고뇌를 볼 수 있다.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잘 못 나아가는 무리들을 본다.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도 그리고 문선명 집단과 그리고 각종 은사파들 과연 이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있는가 생각하는 가운데 나 자신의 믿음 생활도 한 낱 믿는 자의 종교활동에 빠져 땀 흘리며 죄짐을 지고 가는 가인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