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3장-11) 세상 속으로

이요나 2007. 2. 21. 14:44

(창세기3장-11) 세상 속으로

(창세기3:20-24)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가부장제도의 시작

이제 성경에서 가부장제(家父長制)가 실시되고 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여권운동으로 여성들의 입지가 많이 좋아 졌지만 문명의 발전도에 따라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여성들의 인권은 유린되고 있다. 과거 중국을 위시한 동양권에서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여성들의 입지는 한남편의 부속물처럼 여겨 왔었다.

또한 중세 유럽에서도 남성 권위주의 속에서 여자들의 위치는 한 낱 남성들의 노리개로 전락되어 왔었다. 모든 국가제도나 사회제도가 남성 권위 위주로 되어버려 모든 삶의 생활양식 속에서 여성들의 인권은 유린당하였다.

한 예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서갑숙씨의 소설의 음란성 시비도 그가 남자 작가로서 그러한 글을 썼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그는 남성 주도의 성적 질서에 도전하여 여성의 성적입지를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 끌어 올려놓으려는 발상이 문제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삼척시의 남근(男根) 깍기 대회도 가부장제도권 속의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남자 선호 사상이 있어 사내아이들은 고추를 내어놓고 자랑하는 위치 있었다. 이로 하여 태아 성별 감식이 성행되어 남녀의 균형이 무너져 버린 지 오래다.

나는 특별히 여성 옹호주의자는 아니지만 여자는 여왕으로 모시고 싶다. 그래야만 가정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하나님의 판결이 여자는 잉태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 그리고 남편을 사모하게 되어 있다면 내가 아내를 여왕으로 받들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제일 먼저 내가 왕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아담의 지배권 속에 넣으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가기 위한 질서이지 여자의 인권을 유린하고 여자의 입지를 격하신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제부터 아담의 범죄 이후 이 땅의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자

*새로운 환경의 시작
영원한 삶에서 죽음으로 떨어져 결국 흙의 존재로 돌아가야 하는 판결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또 다른 환경과 삶에 맞는 생활구조를 부여받게 된다. 에덴 동산에서는 남녀의 위치가 동등한 상태에서 견지된 개체의 생명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있어서의 과제는 둘이 어떻게 연합하여 하나가 되느냐이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되어 한정된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땅은 이제 하나님의 저주로 그들에게 엉컹퀴와 가시덤불을 내게 되어 이제 아담은 땀을 흘리며 밭을 갈지 않으면 생존할 길이 없다. 인간에게 먹고살아야 하는 생존의 체계가 돌입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들을 위하여 가정의 제도를 설정하셨다. 다른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아담이 여자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서 여자는 "하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세상을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예수께서도 시몬을 베드로로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더하셨다.

사도 바울의 이름은 사울이었다. 이것은 이들의 사명과 관련된 것으로 이제 하나님의 사람 아담은 흙의 사람 아담으로 전락되고 그의 배필 여자는 아담에 의하여 하와로 불리어져 아담 안에 한 여인으로 여자의 입지가 바뀐다.

이것은 이제 이 땅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삶을 걸머지고 생존해야 하는 인간에게 당연한 조치라고 본다. 이로서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아담의 여자 하와를 통하여 출생한 생명으로 출발되었다.

*의복의 시작
두 번째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옷이었다, 이미 이들은 부끄러움의 자아로 하여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아마 이들은 이 옷을 짓기 위하여 그들 속에 있었던 양을 잡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여기서 입히다 라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아론에게 제사장의 옷을 지어 입히는 것과 같은 의식적인 용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함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인간들로 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 가를 스스로 터득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신에 합당한 옷을 입게 마련이다. 학자는 학자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학문을 연구하여 부끄러움을 면하여야 한다. 최근 많은 분야에서 표절의 시비로 부끄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와 같이 인간의 지식은 한정의 단계 속에 머무르게 되어 피나는 연구와 땀흘린 노력의 대가를 누리게 되었다.

*인간의무기
우리는 또 본문에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므로 얻은 유일한 무기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선과 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아는 일에는 하나님 중 한 분(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과 같은 위치라는 것은 어쨌든지 대단한 획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바울은 사람들 속에 있는 양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을 모른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아담과 같이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관한 것이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비통한 마지막 판결이 내리는 순간이다, 그것은 생명의 제한이었다. 인간은 에덴에 있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영생할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제한하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터전인 토지로 내어 보내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이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신 장면을 보게 되는데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보좌권 천사)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심을 볼 수 있다. 아마 아담이 살아 있던 그 시기에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았을 것이다. 추측컨대 노아의 홍수 이전 사람들은 에덴동산이 어디인지는 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과연 인간은 에덴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