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3장-7) 그의 음성을 듣기까지

이요나 2007. 2. 21. 14:55

(창세기3장-7) 그의 음성을 듣기까지

(창세기3:8-10)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나이다

*직통계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가? 최근 많은 사람들로부터 직통계시에 대한 말을 많이 듣는다. 어느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느니, 어느 목사, 어느 권사에게서 예언 기도를 받았다느니...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우리는 누구에게 검증을 받을 수 있는가? 그들이 말한 모든 것이 정말 하늘로부터 온 것인지 도저히 분별해 낼 길이 없다. 과거 나는 예수를 믿기 전에 동양철학에 심취되어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연구한 일이 있었다.

인간의 출생 년월일시를 중심으로 사주(四柱)를 뽑아 오행육갑에 맞추어 인생사를 점치는 일이다. 고대 중국의 점술학자들이 천지간의 음양의 조화를 통계하고 산출하여 인생사의 통계를 말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주권자의 계획과 예정에 의하여 변화무쌍한 세상살이가 인간의 시각으로 편집 통계한 틀로 적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 님의 예정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발생 속에서 부적이니 푸닥거리니 굿이니 하는 무속(巫俗)이 태동한 것이다.

인간의 운명 과연 누구의 손에 있는 것일까? 누가 능력이 있어 전능자의 정하신 운명을 거역할 것인가? 누가 거룩한 하늘에 올라 전능자의 손에서 그 운명을 탈취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다만 묵묵히 창조자의 은혜와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따를 뿐이다

*빗나간 화살
당겨진 화살을 거둘 자가 있는가? 죄라는 히브리어의 원어는 "과녁을 빗나간 화살" 이라는 의미이다.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은 어디엔가 꽂히게 된다. 성경에는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의 향후 운명에 대하여 화살을 비유한 장면이 나오는데 요나단은 쫓기는 다윗에게 "내가 화살을 아이 머리 위로 쏘며 그 화살을 쫓아가는 아이에게 화살이 네 앞에 있느냐 하면 너는 너의 생명을 위하여 달려 갈 것이요,

또 내가 화살을 옆으로 쏘며 아이에게 화살이 너 옆에 있으니 주어오라 하면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하였다. 이 이야기는 인생이 마음이 화살 같아서 시위를 떠나기 전에 결정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결정하는 자결권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대한 일을 놓고 우리는 몇 날을 새우며 계획과 작전을 세워서 일의 성취를 도모한다. 한국인의 민족성 중 하나가 일을 행함에 있어 속결속단이다.

이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좁은 땅덩어리 속에서 많이 겪고 살아온 민족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민족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목적중시 자들이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IMF이후 지금까지 정치, 경제, 사회 속에서 많은 문제들이 속출되고 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등은 앞으로 또 어떠한 사고들이 발생할 것인지 예측을 불허케 한다.

*미리아심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미리아심"을 시험하다가 죄에 빠진 아담과 하와의 초췌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만물을 다스리는 최고의 통수권자가 이제 무화과나무 잎으로 하체를 가리고 동산 나무숲에서 두려움에 떨고 숨어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때까지는 악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생활 반경 속에 나타나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는 두려움이라든가 숨는다든가 하는 일들이 없었다. 두려움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가? 또한 두려움 다음의 일에 대하여 성경은 "두려움은 형벌을 낳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악과의 위력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던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생을 위하여 제한하여 두신 부분을 열어 젖혀 버렸던 것이다. 이제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입되어 이제 그 말씀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심판만을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기도 하고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도 한다.(롬3:20, 딤후3:16) 우리는 본문 속에서 죄책감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아담의 모습을 만난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가 이처럼 커다란 장벽을 사이에 두고 얼마나 지속되었었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죄의 불안에 떨고 있을 때는 하루가 여삼추인 것을 알뿐이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께서 금하신 일을 저지르고 아버지로부터 합당한 경책을 받을 때까지 가족들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불안에 떨던 일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 때의 기분은 차라리 지구가 내려앉아 종말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공포는 아버지로부터 합당한 판결이 나면 그 일은 없었던 것처럼 하늘을 나는 심정이 된다. 이러한 공포의 과정은 모든 사람이 겪는 인생사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죄에 떨고 있는 아담을 향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죄의 무거움으로 하여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떨고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말에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다.

법은 법을 만든 자에 의하여 해결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인간 아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 이 말씀은 그의 거한 위치를 물으신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의 행위에 합당한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에덴 동산 중앙에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의 동산을 가꾸고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까지 불안과 공포에 떨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처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그리고 물으신다."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진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삶의 고통에 대하여 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에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8-10) 아직 죄에 눌려 있는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두르고 죄의 두려움을 만끽하며 오직 구원자 해결사이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기다릴 뿐이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우리를 영화로운 세상으로 인도하실 오직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랄 뿐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