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3장-8)유혹의 목소리

이요나 2007. 2. 21. 14:53

(창세기3장-8)유혹의 목소리

(창세기3:11-13)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죄라는 것

죄라는 것, 두려움이라는 것은 심리적으로 인간에게 많은 압박감을 주고 있다. 이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창조하신 섭리 때문이다. 오직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려고 했던 유대인을 향하여 바울은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양심이 그들의 법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죄에 눌려서 양심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의 죽음이나 질병에 고통 하는 병자들을 바라보시며 애통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는 양심을 따라 살아 갈 수 없는 인간의 비통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죄의 눌림에서 벗어나기까지 양심의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다. 선한 사람이라도 선과 악 속에서 발생하는 양심의 다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다만 자기의 의지로 양심의 도리를 따르느냐 아니면 악의 길을 가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떨어져 나간 아담에게 나타난 현상은 옷을 벗었다는 것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생활 속에서 때때로 부끄러움을 겪게 되는데 그 부끄러움은 우리 내면적 인격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이 부끄러움의 현상은 나의 부족함 또는 잘못이 외부에 공개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 부끄러움은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도 우리 생각 속에 남아 있어서 우리의 얼굴을 붉히게 한다. 나는 과거 나의 짐승과 같았던 생활을 생각할 때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갖게 되는데 지금도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그 당시에 그러한 부끄러운 짓들을 양심에 아무 거리낌없이 행하였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이 진리를 벗어나 불의한 일들을 행하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여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더러움에 내어버리신다고 말하고 있다.


*죄를 알게 한 것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향하여 "누가 너의 벗었음을 고하였느냐?"고 물으셨다. 사실 아담의 벗었음을 지적한 사람도 또한 부끄러워할 대상도 없었다. 아직 에덴에는 아담과 하와 두 사람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부끄러움은 자신 안에서 나타나는 내면적 수치심이다. 그들은 선악과를 먹는 순간 스스로 자신들이 벌거벗은 수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죄라는 것은 죄라고 정한 법이 있을 때 성립된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율법은 범죄한 자들을 위하여 천사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우리 에게 교통법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신호등도 없을 것이고 좌회전 우회전 금지도 없을 것이다. 차량이든 길을 건너던 사람이든 자신들의 마음을 따라 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한 자유는 사람들의 지식이 충만하고 그 선한 품성을 따라 행하여질 때 이루어 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그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묻고 계시다. 결국 이 문제는 누구에 의하여 발단된 것이라 본인이 선택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여자가 내게 주어서 먹었다" 고 답변하고 있다. 이 말은 "나를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가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는 말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 말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17절의 "네가 네 아내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이라고 판결하신 내용을 보아 아담의 잘못은 "돕는 배필 아내가 준 것을 먹은 것"이 아니라 "아내의 말을 하나님의 말보다 중히 여겼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또 물으신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이 말씀의 뜻을 분석하면 하와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하와의 잘못은 알고 행하였다는 데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나쁜 짓인지 알면서 고의로 할 때 더욱 분노하게 된다. 다윗은 "나로 하여 고의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였다. 하와의 잘못은 모르고 한 죄가 아니라 알고도 행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다"고 답하였다.

이에 대하여도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그러한 형편을 나무라시지 않으셨다. 다만 그를 유혹한 뱀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셨을 뿐이다. 이것은 하와로서는 불가항력적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생물들에 미치는 사단의 영적 권세는 막강했었던 것이다.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길
그렇다면 정녕 아담은 그 사단의 세력에서 이길 수는 없었단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가르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옆에 지식의 나무도 함께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임의로 먹게 하신 모든 나무의 실과들 속에는 그러한 사단의 권세를 물릴 칠 수 있는 지식의 DNA 인자가 충만하게 함유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혼적인 사고를 지닌 짐승들 즉, 인간을 돕는 측면에서 창조된 "네페쉬"(혼적인 부분이 있어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생물)를 좀더 깊은 이해와 교제로서 다스림의 관계를 유지함으로 사단이 그들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것은 이성적인 측면과 사랑이 온전한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력의 부족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란 맹목적이 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에 대한 뜻을 깨달을 때 발생하는 신뢰의 관계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