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14장-1)너는 무엇을 기념하는가?

이요나 2007. 2. 23. 17:05

(마가14장-1)너는 무엇을 기념하는가?

 

(막14: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하시니라

 

13장에서 우리는 주께서 예언하신 장차 이 땅에서 일어 날 일들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말씀하시며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그 말씀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 디토장군에 의해 멸망 당한 일과 그 후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받은 고난 등을 들어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속한 것으로 이미 지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그 환난 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이 흔들리리라 하신 말씀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일들은 교회의 휴거 이후 적 그리스도의 시대에 있을 일로서 이스라엘의 70이레 중 마지막 이레에 일어날 일들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하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세 번에 걸쳐 깨어 있으라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 후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무엇을 하였는가 살펴 보자. 또한 주의 재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I. 향유를 준비한 여인(1-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7-9)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행보는 빨라졌다. 이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예수의 처형 계획을 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음사역을 시작한 지 3년이 되는 해로 3번째로 맞는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과 무교절을 앞두고 있었다.

 

주님은 낮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말씀을 가르치시고 저녁이면 베다니 마을에서 묶으셨다. 아마 복음서의 기록을 보아 나사로의 누이 곧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 계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3절에는 주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고 기록되었다.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유대인의 최고 존경의 랍비의 자리에 있는 지도자들이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율법으로 금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 한 여인이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붓었다. 나드 향유 옥합이란 애굽의 최상의 향수로서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이라 할 때 3백 데나리온이란 노동자가 1년치 급료를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향유는 시집을 갈 처녀들이 자신의 몸을 신랑에게 드리는 날 쓰기 위해 준비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여자들은 최고의 향유를 준비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았다. 이 여인이 이러한 고급 향유를 어떻게 준비하였는지 모르지만 예수께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자신을 주께 바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일을 못마땅히 생각하던 제자들 중 하나가 나서서 이 여인을 책망하며 이처럼 값비싼 향유를 팔아서 구제 사업에 사용할 것이지 왜 허비하는가 책망하였다. 요한은 이 말을 예수를 판 제자 가롯 유다가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회계를 맡은 자로 사실 그 돈이 탐이 나서였던 것이다(요12:6).

 

이 때 예수께서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주께서 곧 십자가의 처형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막8:31, 9:31, 10:33).  또한 제자들은 이미 예수께서 그가 곧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으며 주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들으며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의 지혜인 것을 알았다(막12:33).

 

그러나 그들은 복음사역이라는 대명분만을 생각했지 복음의 본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육신으로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체, 제자 중에 누가 큰가 하고 논쟁을 하며 또 영광의 날에 자신들을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세워질 것을 꿈꾸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올인 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명분에 올인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이 여인의 한 일에 대하여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 하였느니라 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하셨다. 여기서 기념하라(아남네시스)는 말은 회상하라 기억하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여 이 여인의 일을 기억하라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좀더 깊은 사고가 필요하다. 잘못하면 여인이 예수님께 힘을 다해 섬겼듯이 너희도 교회와 사역자들을 힘을 다해 섬기라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 된 그리스도의 증거를 깊게 음미하여 그리스도의 날을 예비하는 합당한 믿음생활을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어떠한가? 성탄절을 기념하고 고난일과 부활절을 기념하고 있다. 또한 교회들이 서로 다투어 많은 돈을 모아 구제에 힘을 쓰고 있으며 교회 건축에 힘을 쓰고 있다. 한국 교계를 떠들석하게 한 밥퍼 단체도 이제는 엄청난 후원을 얻어 대형 본부를 건축하고 전 세계적으로 구제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제는 구제가 아니라 네가 무엇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느냐를 묻고 계신 것이다.

 

II. 유월절 식탁을 준비한 사람(12-21)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시니라(16)

 

제자들은 주님께 유월절 식탁을 어디에 준비할 것이냐 물었다. 이번 유월절은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중 세번째 맞이하는 축제로서 생애 마지막의 유월절인 것이다. 유월절이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신 어린양 희생 축제이다. 

 

이미 주님은 세번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곧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팔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그날은 눈 앞에 서서히 다가 오고 있었다. 더욱이 제자들은 바로 앞에서 삼백 데니라온의 나드향 옵합을 깨뜨려 그리스도의 장사를 준비한 고귀한 여인의 믿음을 보았다. 이러한 시점에도 장차 교회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맡을 제자들은 이번 유월절 축제가 주님의 생전의 마지막 유월절이 될 것이라는 예측조차 하지 못한 채, 주께 어디서 유월절을 드실 것이냐고 묻고 있다.

 

이것은 마치 음의 날을 받아 놓은 부모에게 생일 상을 어디서 차려야 하냐고 묻는 철없는 자식들과도 같다. 주님은 성내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 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물으면 그가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셨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제자들이 스스로 준비하여야 할 유월절 만찬인데 죽을 날을 받아 논 주인께 유월절 식탁을 준비해 달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주의 말씀을 듣고 성내로 들어 가니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큰 다락방을 예비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주님이야 앞으로 일을 모두 보실 수 있으니 그렇다하더라도 흥미로운 것은 제자들도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던 유월절 식탁을 주와 그의 제자들을 위해 준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과연 주께서 자기 집으로 들어 오실 것을 알고 예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주께서 이 유월절에도 예루살렘에 올라 오실 것을 알고 주께서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내어 드릴 준비를 스스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 제자들은 삼년 동안 주를 따라 다니며 함께 생활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왕국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날에 얻을 영광만을 바라보며 서로 누가 크냐 다투며 장차 그 영광의 날에 누가 오른쪽과 왼쪽에 세워 주기를 원하면서 십자가 앞에 선 스승을 위하여 자신들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 교회를 보자. 서로 누가 큰가를 다투며 그리스도의 날에 받을 상급을 놓고 전도와 선교와 또 구제사역에 힘을 쓰고 있다. 자신들이 장자교회라 생각하며 교세확장에 힘을 쓰며 그 위세를 나타내기 위해 대형교회를 세우기에 열을 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주님의 뜻이며 주를 위한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준비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음미하며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준비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는 대환난에 앞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들림을 받을 준비를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III. 예수의 마지막 만찬 메시지(22-25)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24-15)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비된 다락에 올라 유월절을 함께 드셨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주님과의 마지막 만찬은 죽음의 이별을 앞둔 식탁 같은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주께서는 누가 주를 배반 할 것이냐는 요한의 질문에 자기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자 중의 하나라 하시며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하셨다. 

 

참으로 얼마나 비통한 말씀이며 얼마나 애통하여야 할 순간인가? 과연 이러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어떻게 태평스럽게 만찬을 나눌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주를 팔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러나 요한은 주께서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니 사단이 그의 속에 들어 갔다 기록하였다. 주께서는 그의 가실 길을 위해 사단이 역사할 기회까지 스스로 열어 주신 것이다. 

 

  A. 기록된 말씀대로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주님은 자신에 관한 모든 일 곧 모든 사역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신다는 말씀이시며 또 이후에 기록될 모든 말씀도 그대로 될 것임을 의미한다.

 

 

주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하셨고 다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7:17.18) 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주의 뜻대로 또 주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한다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가르치는 모든 말씀은 성경의 가르침이라야 할 것이며 성경에 기록된 것을 행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누가 사람들이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인가 알려면 그가 행하는 일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는 것이며 성경의 교훈인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B. 기념(회상)하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드셨다.

 

누가는 이 말씀을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기록하였다. 여기서 기념하라는 말씀도 회상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성찬을 떼는 것은 무엇인가를 회상하기 위한 것이라 할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회상하여야 할 것인가? 주께서 나를 위해 피흘리신 은혜를 기억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 그 은혜는 잊혀서는 안될 귀중한 은혜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비중을 두고 싶다. 그날은 아직 우리 앞에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나눌 것을 소망하며 그것을 위해 내 모든 힘을 쏟고 싶다. 내 모든 인생을 그를 위해 올인하여도 좋을 것이다. 

 

C. 갈릴리의 재회 약속(27-31)

만찬을 물리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감란산으로 나가셨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찬미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 난 후에 너희보다 갈릴리로 가리라(27,28) 하셨다. 이때 항상 성급히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다 하였다. 다른 복음서에는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랬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다. 참으로 기가 막힌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세번이나 부인하다는 말씀을 면전에서 들은 베드로의 마음은 얼마나 황당하였을까 싶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 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눅22:31,32)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러므로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은 최후의 순간에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날 기회의 메시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닭 울음소리에 통곡하고 회개한 베드로의 또 다른 실수를 발견하게 된다. 주님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시며 그러나 내가 살아 난 후에 너희보다 갈릴리로 가리라하셨다. 그러나 후일 베드로는 이 말씀을 기념하지 못하고 동료들을 이끌고 고기잡이를 나선다(요21:2).  결국 그는 허탕을  치고 돌아 온 갈릴리 바닷가에서 떡을 구워 놓고 기다리는 주님을 뵙는다. 참으로 얼마나 민망스러운 일이며 참으로 얼마나 깊은 은혜인가? 

 

오늘 우리는 때때로 사역 가운데서 황당한 일들을 겪게 된다. 어떤 때는 가장 믿고 사랑하던 성도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주께서 오늘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주께서 오는 제자들에게 기념하라 하신 말씀은 정녕 그날을 기념하란 말씀인 것인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깊게 음미하여 앞날을 예비치 못한 제자들의 고통을 다시는 겪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