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12장)믿음을 실천하는 지혜

이요나 2007. 2. 23. 17:07

(마가12장)믿음을 실천하는 지혜

 

(마가12: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

 

주님은 종말의 시대에 임할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막8:38)와 믿음 없는 세대(막9:19)를 예고하셨습니다. 전자는 세상의 풍조를 말씀하신 것이며 후자는 교회의 풍조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믿음의 능력으로 세상의 죄를 담당해야 할 교회의 역할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최근 거물 브로커 윤상림씨 사건으로 경찰과 검찰 수뇌부와 또 청와대까지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도덕성의 상실과 권력형 부정부패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날이 갈수록 사람들 속에서 도덕적 양심이 사라지고 불의가 팽대하여 더러움과 음행이 들끓고 사회는 점점 치안 불가의 범죄들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국가는 끊임없이 국민들의 민생을 위해 새로운 정책들을 수립하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이 움직이는 곳에서는 정경유착의 비리들이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 세상이 멸망을 받기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너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린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날이 갈수록 권력과 물질중심의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셨습니다(막10:42,43).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말씀하신 것으로 세상 사람들처럼 권력과 유착하여 물질중심의 삶이 되지 말 것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악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을까요? 눈을 떠도 코 베어가는 사악한 세태 속에서 진리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를 위해 주님은 세상을 이기는 힘 곧 믿음이란 도그마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막9:23) 하시며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기이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주를 믿는 것 하나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또한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친히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물으셨습니다.

이것은 각 사람들마다 소망이 있음을 뜻하며 주께서 그 원하는 것을 능히 들어 주실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의 소망을 들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신자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안에 있다면 불가능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에 한가지 조건을 다셨습니다. 그것은 기도 하기 전에 협의가 있는 자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신다 하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나의 허물을 용 받기 위해 어떤 큰 일도 필요 없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문제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로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기도하지 않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의인의 기도는 반듯이 이루어 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바라 볼 때 과연 이러한 우리가 각 교회에서 새벽마다 올려지는 기도, 밤낮 울고 부르짖는 기도들이 하나님의 믿음 안에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12장에서 그 무엇이라도 이룰 수 있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 안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I. 건축자들 버린 모퉁이 돌(1-12)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더라(10-11)

 

주님은 여기서 비유를 말하여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 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가 때가 되어 주인이 소출의 얼마를 받으러 한 종을 보냈더니 심히 때리고 빈손으로 보내었고 다른 종을 보내니 저를 죽이고 다시 많은 종들을 보내지 때리고 죽였다.

 

할 수 없이 주인은 최후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며 내 아들이니 공경할 것이라 여겼더니 농부들이 그는 상속자이니 죽여 그 유업을 우리가 갖자고 하고 죽여 포도원 밖에 던져 버렸으니 그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물으셨습니다. 그 대답은 단 하나입니다.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말의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보다 더 심한 이야기입니다. 그 포도원은 처음부터 주인의 것으로 그 시작에서부터 포도즙의 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계획과 준비가 주인으로부터 된 것입니다. 소출의 얼마를 받기 위해 종을 보냈다는 것으로 보아 주인의 의도는 소출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알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부들은 열심히 포도원을 가꾸어 풍족한 열매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주인과의 약속을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처음 생각과 달리 욕심이 생겨 주인과의 약속을 깨고 그도 부족하여 그 포도원을 아주 먹어버리려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사람은 재물을 보면 욕심이 나서 신의를 저버리고 그 처음 약속 같은 것은 지키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바로 세상의 주인 마귀의 속성입니다.

 

이 비유와 함께 주님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11)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절의 말씀으로 다윗이 성령으로 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여기서 머릿돌이란 건물의 중심 기초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건축가들이 건물의 중심이 되는 기초석을 버렸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성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유전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은 짓기 위해 많은 돌이 필요한데 그 돌들은 채석장에서 떠서 석공들에 의해 설계도의 치수를 따라 다듬어져 성전터로 옮기게 됩니다. 성전 건축가들이 성전을 짓기 위해 터를 다진 후 채석장에서 보내진 돌을 도면에 맞추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도면에 없는 커다란 돌 하나가 와 있는 것입니다. 건축가들은 이 돌의 용도를 알 수 없어 계속 성전을 지어가면서 밖으로 내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다 지어질 지음 건물의 중심이 되는 곳에 세울 주춧돌 곧 기초석을 찾으니 없어서 채석장으로 사람을 보내어 왜 건물의 머릿돌을 보내지 않았느냐 물었더니 그것은 맨 처음에 이미 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돌은 처음부터 와 있었던 것인데 그 용도를 알지 못하여 터 밖으로 내던저 버렸던 것입니다. 건축자들은 왜 머리돌을 버려야 했을까요? 그것은 전체를 전부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한계 속의 인간은 이 세상의 일 모든 것을 전부 알 수 없습니다. 앞에 것을 미리 볼 수도 알 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전체의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현재의 일에 만족을 얻으러 합니다. 만약 농부들이 자신들의 한 일에 대한 나중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결코 그리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경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7)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천지만물과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한 것입니다.

 

II. 바리새인들의 지혜(13-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17)

 

마가복음 12장의 두번째 문단에는 바리새인들의 시험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뜻은 분리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의 핵심을 이루던 그룹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자찬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을 따라 천사의 존재와 부활의 교리를 믿었으며 또한 정결의식과 같은 엄격한 유대교 규례를 중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선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공격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권을 지키기 위해 새롭게 떠오르는 별 예수를 죽이기 위해 율법적 근거를 찾기에 혈안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묘수를 내어 예수께 나아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 불가한 한 일인가 질문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정부의 과도한 세금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므로 만약 안내도 된다고 하면 로마정부에 대항하는 집단이 되고 또 내어야 한다면 민중으로부터 정죄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은 그 당시 상용되는 동전을 내보이라 하시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절묘한 답변입니까?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각각 다른 주권 속에 있음을 언급하신 것으로 각 나라의 주권자와 그의 법이 있듯이 하나님 나라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들이 지켜져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예배에 관한 많은 예법과 많은 신학적인 논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 나라에 주권에 대하여는 형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하나님 앞의   거룩한 예배를 위해 많은 봉사와 또 전도를 위한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일은 등한시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무리 정부시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해도 법은 지켜야만 합니다. 그것은 국민 된 의무이고 권리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잘 아는 성도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을 준수하므로 한국 사람으로서 인격이 보장되듯이 하나님의 법을 준수할 때 그 인격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분리된 사람들이라 생각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나라에서 행하여야 하는 일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그룹들을 정죄하고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박해를 가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아직 우리 교회 안에서 횡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아직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사두개인의 지혜(18-27)

A. 부활의 문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24)

 

예수님을 향한 두번째 도전장을 낸 사람들은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다가 낭패를 보았다는 소문을 듣고 의기양양하여 부활에 관한 신학적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많은 제사장을 낸 유대교 그룹으로 유대교 중심세력인 산헤드린 공회를 이끄는 정치적 집단입니다. 이들은 부활이나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택하심 가운데 현실적 율법을 지키므로 조상들이 있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보수적인 신학을 고수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믿고 있는 부활에 관한 교리를 들고 나와 모세는 형이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으면 그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후사를 이으라 했는데 만약 일곱 형제가 있어 맏이가 후사를 얻지 못하고 죽고 그 동생들이 차례로 형의 아내를 취하였으나 모두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면 저가 부활의 날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함이 아니냐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있어 치명적인 모욕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명실공히 유대교에서 최고의 권위를 누리는 종파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성경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부활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실 이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라 한다면 성경의 약속 영원한 생명도 천년왕국도 부질없는 것이고 이승의 자랑이 최고의 미덕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상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또 하나의 고민은 아직도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신비주의로 치부하고 외면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기록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피조물 인간의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영광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다 증거하였습니다.

 

B. 산 자의 하나님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26)

 

주님은 사두개인들의 무지를 책망하시며 모세가 쓴 출애굽기 3장의 말씀을 상기시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출3:6)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주께서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을 인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부활이 없다고 믿었다면 너희에게 성경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너희가 중히 존경하는 모세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3장 6절 말씀으로 미디안 광야의 목동이 된 모세 앞에 나타난 신비하고 기이한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과 전혀 맞지 않는 신비한 일입니다.

 

모세가 신비에 쌓인 그 불꽃을 보려 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야 이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그 때는 아브라함으로부터 4대가 지난 때로서 하나님은 지금 모세에게 아브라함에게 네 백성이 4대만에 다시 돌아 오리라 언약하신 말씀을 상기 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과 택하심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의 땅에서 영광의 땅으로 불러내셨으며 이삭은 그의 언약을 따라 나은 아들이며 야곱은 처음부터 그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부르심과 약속하심과 택하심의 원칙 속에서 우리를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이 신비의 약속을 받은 자들마다 모두 성경에 기록하신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 속한 자들이며 또 부활의 약속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말씀은 그의 부르심을 따라 눈으로 볼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언약인 것입니다. 바울은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다(고전2:9) 하였습니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 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15:12,13)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성도의 부활에 대하여 각각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하였습니다. 이들 속에 주를 믿는 우리가 모두 속한 것입니다.

 

IV. 서기관의 지혜(28-34)

A. 신학적 지혜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34)

 

여기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를 장악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다 보기 좋게 나가 떨어지자 이번에는 그들을 가르치는 지도자 격인 서기관이 나왔습니다. 서기관이란 율법사라고도 하고 교법사(율법교사)라고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여 이들은 구약에 기록된 율법을 해석하여 적용시키는 요즘 말로 하면 신학자 또는 성경학자에 해당됩니다.

 

이 제도는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성경을 가르친 성경 학자 에스라로부터 시작되어 그 후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 서기관 제도는 날로 확장되어 당시 유대주의의 초석을 이루며 가장 존경을 받던 랍비들을 탄생 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가멜리아 학파의 서기관 출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분에서 주 앞에 나타난 서기관은 상당히 박식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의 변론에서 그들이 더 이상 할말이 없도록 지혜 있게 답변하는 것을 보고 거침없이 나아와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 하시자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대교의 최고의 율법교사가 아닐듯합니다.

 

주님은 그의 질문에 먼저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6장4절의 말씀으로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함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이라는 히브리어 엘로힘은 복합단수 명사로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부르신 자들에게 자신의 위격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5절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믿음의 자세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식이 잉태하면 태아에서부터 이 교육을 할 정도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18절 말씀으로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십계명을 역설하면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린입니다.

 

이에 서기관은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하였습니다.

 

여기서 서기관은 주께서 인용하신 말씀 중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란 말씀을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 답하여 목숨과 뜻이라는 말씀을 지혜로 해석하였습니다. 과히 성경학자와 같은 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의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가 율법을 해석하는 지혜가 있지만 그의 지혜는 아직 천국에 도달할 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후 더 이상 주 앞에 나아와 주의 지혜를 시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천국에 도달하지 못한 지혜로 어떻게 천국의 지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며 오늘날 신학적 교리를 가지고 천국의 지혜를 다루려는 사람들의 지식을보며 참으로 통분하게 됩니다. 어디서 그런 발상이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자신의 지식에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V. 다윗의 지혜(35-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37)

 

주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질문하시며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0편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와 같은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닭이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창1:25)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 시작과 끝이 분명합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 중에 태어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지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자손은 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것과 다윗의 자손이신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사람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으로 알 수 있는 지혜로서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할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음으로 증거하느니라(요15:26,27)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자신이 이스라엘 중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는 서기관들이 아무리 율법을 잘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 하드라도 그들의 지혜로는 그들의 연구 속에서 나온 것으로 천국의 지혜는 아닙니다. 천국의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만이 아실 수 있는 것이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하였습니다.

 

 

VI.  믿음의 중심(38-44)

A. 서기관의 모순(38-40)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39-40)

 

이제 우리는 마가복음 12장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을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또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라새인들이 모세에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2)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성경학자들의 표리부동한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욱이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는 말씀은 심히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헌금을 걷기 위해 얼마나 위선적인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지요? 오늘날 우리 교사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리켜 주시는 심히 두려운 말씀입니다.

 

B. 제자들의 시선(41-4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

 

흥미롭게도 주님은 성전 연보함에 마주 앉으셨습니다. 아마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고자 하셨나 봅니다.

무리들이 줄을 지어 헌금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쓱대며 많은 돈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두렙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두렙이란 헬라의 화폐로서 로마정부의 가장 작은 화폐인 고드란트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돈으로 그 당시 노동자가 받는 품삯이 1 데나리온 이었는데 1 고드란트는 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는 1고드란트 오늘날 오백원짜리 동전 두개를 넣은 셈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개종한 헬라 여인일지도 모릅니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모으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았도다 하시며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과부가 드린 헌금의 양을 본 것이 아니라 그 과부의 헌금의 질을 보신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목숨과도 같은 생활비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자기가 드린 물질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생활비로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나누고 싶은 진정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7년째 결혼적령기들을 위한 모임을 이끌어 왔습니다. 우리는 매주 목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그 목요 모임을 통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나는 7년동안 2500만원이라는 빚을 지고 말았습니다. 임대료 65만원을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끔 목요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의 헌금에 대한 출납을 살펴 볼 때가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37명의 형제자매들이 헌금봉투를 사용하였는데 그 금액이 300만원이 이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이 과부와 같았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배 후에 먹는 간식비는 그들이 그날 드린 헌금보다 더 많습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과연 이들의 믿음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주를 사랑하는 것인지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잿밥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이 일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나를 주의 작은 종이라 생각한다면 냉수 한 그릇을 드림에 소홀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은 그에 합당한 복을 주로부터 받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