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11장)믿음의 성취와 권세

이요나 2007. 2. 23. 17:08

(마가11장)믿음의 성취와 권세

 

(막11:2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을 믿으라(have faith in God)

 

우리는 앞에서 인간의 욕망에 관한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림이 많은 지식과 경륜을 쌓으면 쌓을수록 더욱 완전한 인격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또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성취욕이 강해져 완악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속성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까지 그 영향을 미쳐 성경에 기록된 말씀까지도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 해석 적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는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이런 죄성을 없애기 위해 주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누구든지 높아진 마음을 주 앞에 내려놓고 주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 본연의 죄성을 떠난 어린아이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천국에 들어갈 권세를 받은 자들입니다. 

 

오늘은 성경의 예언의 성취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도와 그 권세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마가는 이 부분을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의 성취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성도들에게 주신 권세 중 가장 큰 것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어로 have faith in God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I. 성경과 예언의 성취(1-11)

 A. 말씀의 즉각적인 성취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2-3)

 

주님의 십자가를 향한 여정은 가장 낮은 여리고에서 가장 낮은 인생을 살고 있던 소경 바디메오가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길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성취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동편 3키로 떨어진 감람산이 있는 벳바게로 들어 섰습니다. 그 맞은 편은 주께서 사랑하시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베다니 마을입니다.

 

감람산 벳바게에 들어선 주님은 제자 둘을 보내어 맞은편 마을로 가서 사람이 아직 타보지 않은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 하시며 누가 너희에게 왜 이러느냐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하면 즉시로 보내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베다니로 들어 갔더니 주의 말씀처럼 새끼 나귀가 문 앞에 매여 있어 풀려고 하니 주인이 나와 무엇 하려느냐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주께서 이르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하였더니 허락하였습니다. 아마 이 나귀의 주인도 그들이 누구의 제자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 즉시 그대로 성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볼 때 베다니 마을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던 곳으로 이미 마을 사람들은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께서 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미리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과 주인이 왜 나귀를 푸느냐고 묻는 것은 확률상 쉽지 않습니다.

 

B. 예언의 이중적 성취

그러나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은 이미 수백년 전 스가랴 선지자로부터 예언되어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중에 태어난 제사장 가문의 선지자로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를 따라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 재건을 위해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시온의 딸이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스가랴의 예언을 친히 현실 속에서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수 백 년 전의 예언 곧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제자들의 현실 속에서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일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끌고 와 옷을 벗어 나귀 등에 걸치니 예수께서 타셨습니다. 이에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자기 겉 옷과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호산나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기원으로 구원의 기쁨을 호소하는 감탄사로서 시편118편 25절과 26절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전에서 수백년 전 스가랴로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나귀를 나고 입성하신 날에 대하여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성경을 살펴 보다가 예레미야가 예언한 이스라엘이 고난이 바벨론의 칠십년에 마치리라 하신 예언을 깨달았습니다(단9:2).

 

그후 다니엘은 천사의 가르침을 받아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 받는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9:25,26) 예언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으며 그의 나타나심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날로부터 일곱 이레와 육십 이레 후가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69이레는 바벨론역(1년360일)에 의해 173.880일이 되는데 고레스 왕의 성전재건 명령으로부터 계산하면 A.D. 32년 4월 6일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하시는 바로 그날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로 하여 계시록의 저자는 이것은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 기록하였고 다시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계19:9,10)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에게 잠에서 깨어나라 권면한 것은 성경의 말씀을 깨우치라는 말씀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II. 하나님의 성전과 이스라엘(12-19)

 A. 무화과나무 열매의 의미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14)

 

이 일은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여 둘러 보신 후 그 다음날 있었던 일입니다. 마가는 11절에서 주께서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 보셨다 기록하였습니다. 예루살렘과 베다니는 십 리 길 안 밖으로 주님은 아마 이때도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서 묶으셨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주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일을 죽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께 나드 향을 부은 후의 일로 기록하였습니다(요12:1-19)

 

이튿날 주께서 제자들과 베다니에서 나와 예루살렘을 오르실 때 시장기를 느끼셨던 모양입니다. 멀리서 보기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무엇을 얻으실까 하여 가셨더니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자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저주하셨습니다.

 

여기서 흥미롭게도 마가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내용이 다른 것을 상징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께서 그때가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닌 것은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무화과나무는 3,4월에 새가지를 낸 후 8월 추수기가 되면 질 좋은 열매를 맺는다. 3,4월에도 지난 해의 가지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열매들은 선 과일이 되어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무엇인가 먹을 것이 있는가 하여 간 것은 새가지가 아니라 작년도 가지에서 열린 열매를 의미한 것으로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로 상징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화과나무 그늘에 산다는 것은 이상적인 환경을 의미하였고(왕상4:25, 슥3:10), 마른 무화과나무는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이른 국가적인 재난에 비유되었습니다(렘5:17, 호2:12, 욜1:7).

 

주님은 후일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며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2-34) 하셨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함께 멸망한 이스라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 속에서 예언하신 성경의 기록과 같이 이스라엘은 1948년 5월에 새롭게 독립하였습니다. 여기서 한 세대란 100년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가늠할 수 있지 않은지요?

 

B. 하나님의 뜻(15-18)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노라 하시매(17)

 

먹을만한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 가셨다. 주님은 성전에 들어서자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보시고 내어 쫓으시며 환전상들과 제물을 파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갖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주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집에 누가 들어와 마당을 장터로 삼고 안방이든 건너 방이든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고 있다면 얼마나 화가 날 일입니까?

 

여기서 성전은 지성소(나오스)가 아니라 부속 성전(히에론)입니다. 이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의 뜰은 성전 뒤뜰 언덕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회교성전인 호마 성전의 터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이방인들이 머무는 곳은 성전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저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하나님께서 얻지 못한 첫 열매를 저주하시고 다음 추수를 고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아직도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 있는 곳은 없는지요? 이것은 새벽기도나 철야기도와 같은 의무적인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는 진솔한 성도의 마음의 기도를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III. 기도와 믿음의 정의(20-2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3-24)

 

마가는 이 말씀은 소개함에 있어 두 번째 문단에서 언급된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을 다시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 일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신 다음날 아침의 일입니다.

 

종전과 같이 아침에 성전을 향해 나아갈 때 어제 주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본 제자들 중 베드로가 나서 선생님께서 어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하였습니다.

 

이때 주께서 하나님을 믿으라 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3-24)하셨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설교에서 기도를 강조할 때 이 말씀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그 인용에 있어 성경적 해석의 범위를 벗어나면 커다란 오류가 발생합니다. 다시 말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으니 이 말씀을 믿고 기도하면 이루어 진다는 식은 사람들을 종교적 노예로 만드는 기술에 속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하나님을 믿으라 입니다. 이 부분을 영어성경은 have faith in God이라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뜻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들으심이라 말하였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좋은 나무의 아름다운 열매와 못된 나무의 나쁜 열매를 비유를 말하시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 교회 안에 많은 은사를 행하는 사람들 중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라 하셨습니다.

 

또한 본문의 말씀은 위에서 언급된 성전에서 사용되는 돈을 바꾼다던가 하나님께 드릴 제물관 관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 당시는 로마시대로 실제 생활에서는 로마 화폐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드리는 헌금은 유태인의 화폐가 아니면 안된다는 원칙을 세워 수수료를 챙기고 환전을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율법에 정한 제물을 드리기 위해 집에서 비들기를 가지고 오면 정결치 못한 것으로 트집을 잡아 자기들이 파는 제물을 드리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율법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악한 마음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하고 말한 그 모든 것이 이루어 지리라는 약속입니다.

 

요한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하였고 다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전혀 불가능한 일의 성취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의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을 불러내는 매개체입니다. 기도로 이룬 것이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고 구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한가지 단서를 첨부하여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전재하신 것으로 죄의 사함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것을 용서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형제 사랑을 바탕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기도에 앞서  형제 사랑을 실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IV. 그리스도의 권세(27-33)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30)

 

예수께서 제자들과 다시 성전에 들어가시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을 할 이 권세를 주었느냐 힐문하였습니다. 참으로 무뢰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전은 하늘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인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권세를 운운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성전의 중추세력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집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 앞에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께 나아와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의 일들을 하느냐 힐문한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하시며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반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그들을 매우 난처하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약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서라 하면 왜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고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들이 그를 하나님의 참 선지자임을 믿음으로 백성들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무 답도 하지 못하자 주님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타 교단의 많은 목회자들이 젊은 갈보리채플의 목사들을 향하여 너희가 신학도 졸업하지 않고 또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느냐 묻기도 합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권세가 신학교를 졸업해야만 한다는 잘못된 교회법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하시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18)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르침을 받는 교훈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은 목사들이 무엇을 가지고 설교를 하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음으로 증거하느니라(요15:26,27)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권세 곧 그리스도의 권세와 성도의 권세는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조직과 사람의 지혜와 학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