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9장) 믿음 없는 세대를 향한 메시지

이요나 2007. 2. 23. 17:11

(마가9장) 믿음 없는 세대를 향한 메시지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9:49-50)

 

주님은 8장과 9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향한 믿음의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 필연적으로 다가 올 두 세대를 지적하셨습니다. 그 한 세대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8:38)이며 또 한 세대는 ‘믿음이 없는 세대’(9:19)입니다. 여기서 세대(Generation)란 문자적으로 한 사람의 출생으로부터 그 아들의 출생까지의 생의 주기(circle)를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복음이 도래한 이래 그리스도의 날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 것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도 포함된 것입니다.

 

주님은 8장 마지막 절에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현존시대와 장차 이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시대를 잇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교회들이 날이 갈수록 세상의 음란과 죄에 빠져 거룩한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을 상실할 것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9장19절에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장차 이 땅에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세움을 받은 복음의 제자들의 변질되고 상실된 믿음의 상태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큰 문제 중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필연적으로 펼쳐질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 부정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성경적 사고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 즉 현존 세계와는 별개인 육체의 죽음 이후에 올 영의 세계일 것이라는 비현실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믿음의 결국인 천국이 죽음 이후에 오는 사후세계라 한다면 기독교 또한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고, 또한 열방을 기업으로 주시리라는 약속이나, 천년왕국의 의미도 절간 벽에 그려 놓은 극락지도와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국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펼쳐질 실존세계이며, 또한 각 사람이 행한 삶의 행실들이 천국입성의 여부를 결정한다면, 오늘 우리 앞에 당면한 두 세대를 지적하신 주의 메시지를 듣는 우리는 신속한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시대가 우리 눈 앞에 바짝 다가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마가복음 9장에는 예수께서 8장에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음란과 죄의 세상을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 참담한 교회의 현주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향하여 주님은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셨습니다. 오늘 비통한 우리의 목회 현실을 바라보며 이 천 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한 말씀을 들어야 하는 그 원인들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I. 미리천국(1-13)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7-8)

 

9장 첫 문단에는 지상에 사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실제로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답습한 내용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창세이래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문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할 것이며 에녹의 예언과 같이 우리는 이 땅에서 주와 함께 임하는 수만의 거룩한 자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유1:14).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랐습니다. 이 일은 주께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본 자들도 있느니라’ 말씀하신 엿새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말씀입니까? 만약 당신의 귀에 이 말씀이 새롭게 다가온다면 당신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실 것을 기대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말씀은 그 문맥상 8장 마지막 문단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하심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그리고 ‘믿음이 없는 세대’와 지대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산에 올라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변형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마가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변형은 인간세계의 그 어떤 힘이나 권세로 할 수 없는 초월자의 능력의 나타남인 것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권능에 대하여 ‘보라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15:51)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제자들은 예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눅9:31).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언어에 대한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께 고하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인간의 의식이 그대로 살아 있어 천국에까지 전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가서도 아름다웠던 지상에서의 추억들을 친구들과 나누게 될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자들이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게 될 것입니다.

 

마가는 8절에서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 뿐이었더라’ 기록하였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주 밖 불가항력적인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천국은 어느 과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의 분자와 또 다른 구조를 갖고 공존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천국 입성은 물리적이 아닌 하나님의 신적 권능으로 현실 삶 속에서 순간적 찰나에 일어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때의 일을 말하여 나팔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들어 올라가리라 하였습니다.

 

II. 미리 보는 교회의 현실(14-32)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28-29)

 

흥미롭게도 두 번째 단락에는 산 아래 남아 있던 제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던 일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 중 셋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여행을 다녀 오고 나머지 아홉 사람은 이 땅에 남아 있었다는 내용은 아이러니 하기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주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 할 때 어떤 사람은 주와 함께 천국여행을 다녀오고 당신은 천국여행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 속에 남아 있어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을 겪고 있었다 하면, 오늘 이 말씀은 무심코 넘겨버릴 내용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씀이 제자들 중 하늘에 오를 자와 오르지 못할 자를 구분 짓는 것은 아니지만 세 제자들이 체험한 변화산상의 현실이 장차 이 땅에 임할 천국이라 할 때 동일한 문맥 안에 기록된 산아래 남아 있던 제자들의 현실적 상황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의미 있다 하겠습니다.

 

주님은 산에서 내려 오시면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계 하셨으며 다시 ‘인자가 사람들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 두 번째 문단에 기록된 산 아래 있던 제자들과 연루된 문제는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기 전에 나타날 이 땅의 펼쳐질 교회의 현실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논쟁 속의 교회

14절에는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들렸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변론이란 어떤 주제에 대한 논쟁을 말합니다. 따라서 서기관과 논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제자들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종교적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저희에게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때 논쟁의 대상이었던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가 주께 나아와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과 변론을 한 내용은 귀신에 대한 논쟁이 틀림없습니다.

 

2. 믿음의 목적을 상실한 교회

이에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 애를 내게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일은 제자들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었음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믿음이 없는 세대’란 믿음의 주체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한 것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아비가 아이를 주께 데려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여 아이는 땅에 엎드려 굴며 거품을 흘렸습니다. 이것으로 귀신은 그가 사로잡은 사람 속에서 주권적인 행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그 아비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극한 영적 상황에서도 이성적인 대처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영적 상황에서도 담대함으로 이성적 분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비는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간청하였습니다. 이 때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담대케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언급하신 것으로 어떤 영적 상황 속에서 복음 사역자들이 먼저 대처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언급한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상대가 주를 믿던 믿지 않던 능히 귀신을 쫓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 문제를 능히 해결하지 못한 제자들을 대응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귀신들린 자의 아비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의 영혼을 구원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다만 귀신을 쫓을 방도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주께서 귀신을 쫓았던 그 때의 모습을 답습하며 머리에 손을 얹고 귀신아 나가라 소리도 질러 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입과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바르며 소리를 질렀을 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영혼 향한 믿음의 권고를 받은 아이 아비는 ‘내가 믿겠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을 향한 영혼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영적 현실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고 울부짖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느 목사들처럼 손 얹고 귀신아 나가거라 하면 될 것인가요? 아니요, 오늘 이곳에 있던 주의 제자들도 그리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를 멸하러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들의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하심이라 기록하였습니다(요일3:8). 이처럼 귀신에 시달리고 있는 영혼들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 속에서 귀신들이 주권적으로 행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후 제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었던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마태는 이 부분을 ‘금식과 기도 외에는 나갈 수 없다’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없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귀신들이 사로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의 영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영혼을 회복시킬 권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귀신들을 쫓아내기 위해 갖가지 방편들을 사용하고 있는지요. 따라서 오늘 이 내용은 믿음이 없는 세대 가운데 나타날 영적 은사의 남용을 경계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III. 사역의 우선순위(30-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1. 도토리 키 재기

가버나움으로 돌아 오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쟁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한 목소리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변화산상에 올라가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고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은 두 형제를 더 기용하신 것이라 생각하여 더욱 열을 내었을지 모릅니다.

 

흥미롭게도 이 일은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메시지를 받은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애 대한 말씀을 거듭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의식하지 못한 체 서로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서로 어깨를 겨누고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기 위해 토론을 하고 있는지요? 이들은 마치 신학적인 논쟁을 위해 목사가 된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늘 다른 사람들의 설교나 듣고 신학적인 조명을 하여 끌어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목사는 타 교단으로부터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인 이단정죄를 받았음에도 연일 수 천명의 목사들을 자기 기도원에 모아 놓고 말 같지 않은 말들을 쏟아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은 그의 말 같지 않은 말들을 들으며 희희낙락 아멘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2, 영혼의 평등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며 어린아이를 하나 데려가 그 가운데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사람의 영혼의 평등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어린아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는 신학적 토론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그대로 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나타내려는 미사려구가 복음은 아닌 것입니다.  

 

IV. 회복의 메시지(38-50)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게 하라 하시니라”(49-50)

 

  1. 질(質)의 회복(38-40)

 38절에는 요한이 주께 나아와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에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하셨습니다.

 

이 또한 교회 시대에 커다란 병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시국 토론을 보고 있노라면 어디가 우리의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 구분하기가 힘이 듭니다. 육이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맥아더 장군이 졸지에 한국을 망친 자가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러다가는 애국가를 부르는 사람들까지 괴수로 몰려 곤혹을 치를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이라고 해도 오늘날 교회의 적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각 교파들이 서로 심한 교리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회단체라는 명목으로 불교와 유교와 무속인들까지 연합하여 승려들의 선창을 따라 삼보일배까지 하면서도 옆 집 교회의 하는 일을 보고는 손가락질을 하기 일수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던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증거가 사람들 속에 나타나야 함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사들의 권위를 사역적 질(質)에 두지 않고 양적(量的) 무게에 치중하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권면하실 때에 그들의 행위에 무게를 두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였느냐에 초점을 두셨지 결코 그들이 얼마나 큰 교회를 세웠느냐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2. 균형의 회복(40-42)

주님은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 사역자에게 있어 정말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7장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 이 소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부름을 받은 종들이 주의 자녀들에게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소자’란 아직 온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한 연약한 성도들을 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잘못된 길로 떠 밀려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자녀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이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사도와 선지자와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를 세우신 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 사역자를 세우신 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3. 조화의 회복(43-50)

주님은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로 영생에 들어 가는 것이 두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 가는 것 보다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역자들의 행한 일들을 언급하신 것으로 그들이 무엇을 중히 여겼든지 그에 대한 주의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또 주님은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였으면 찍어 버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역자들의 균형 잃은 목회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교회성장과 부흥을 외치며 주께서 뜻하지 않는 일들에 치중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향해 주님은 결코 내가 너희를 모른다 하셨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우리에게 영혼을 위한 복음을 맡기셨을 뿐입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삶의 목표와 도덕적 양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하셨습니다. 

 

얼마 전 예수 전도단(YWAM) 창시자인 로렌 커닝햄 목사가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집회를 마치고 호주에 가진 기도모임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주님은 돈과 음행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를 책망하시며 속히 회개하지 않으면 곧 심판을 하시겠다 하셨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한국교회를 돌아 볼 때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영국의 어느 종교학자가 그의 저서에서 한국교회는 적그리스도의 모형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많은 교회들이 거룩함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악을 극복할 담대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하시며 다시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목회의 균형을 가질 것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아직 주께서 부르신 자들 가운데 좋은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데교회 사자에게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계3:2) 하시며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돌이켜 회개할 때입니다. 그리고 서로 화합하여 서로가 갖고 있는 좋은 것들을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우리 가운데 불로 다가 오실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주님 도와 주십시오.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습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여 아이를 낳으려 해도 해산할 힘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능과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일곱 등불을 켜신 주의 영을 고대합니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