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10장)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가?

이요나 2007. 2. 23. 17:10

(마가10장)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가?

 

(막10:51)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오늘날 주께서 당신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면 당신은 무어라 답하겠습니까? 몸이 아픈 사람은 몸이 낫기를 원할 것이며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돈을 벌게 해달라고 할 것입니다. 또 나와 같이 목회에 성공하지 못한 개척교회 목사들은 나도 좀 사람들이 보란 듯이 한번 큰 교회 담임을 하게 해달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흥미롭게도 마가복음 10장에는 이와 같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주께 나아와 자신들의 필요한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한 세상 살아 가면서 자기 인생의 목표에 따라서 그 필요한 것을 찾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욕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다를 게 없습니다. 목마른 놈이 물을 찾게 마련이니까요?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하시며 다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코 인생의 물질적인 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주께서 당신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면 당신이나 나는 오늘날 당신이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I. 인간의 본성

A. 진리의 상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10:5-9)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10장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삶의 모습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예수님의 당시에 있었던 일이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각 시대를 따라 그 말씀을 읽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말씀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가는 1절에서 예수께서 모여드는 무리에게 전례대로 가르치셨다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음사역의 중심은 가르치심이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내 교훈은 아버지로부터 보고 들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창조자시요 말씀의 본체이심에도 자기의 것을 가르치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주께서 무리를 가르치실 때에 비리새인들이 주께 시험하여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 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과 다른 변론을 낼 경우 율법의 범법자로 지목하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그들의 의중을 알고 있는 예수께서는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물으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속에서도 율법적으로 합법적인 이혼이 성행하였습니다.

 

그들의 이혼의 구실이란 참으로 허망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반숙을 좋아하는데 우리 여편네는 밤낮 완숙을 만든다던가 나는 진밥을 좋아하는 데 된밥을 지어 낸다던가 하는 것처럼 말도 되지 않는 일상의 실수들을 끌어내어 장로회의를 통해서 이혼을 합법화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 시에 그의 부모에게 신부를 데려 올 때 채납금을 지불하고 옵니다. 결국 이것은 이혼을 위해 지불한 위자료와 같아서 행세께나 하는 유대인들이 아내를 내어 쫓고 새 장가를 들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모세가 너희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르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악이란 완고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 몸이라는 성경적 의미입니다. 여기서 한 몸이란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남으로부터 외우는 신명기 6장 4절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말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엘로힘은 단수이신 하나님 에 복수어미 이 붙은 복합명사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직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란 단어는 단수이신 하나님과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칭하는 삼위일체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는 야훼로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삼위이신 하나님은 오직 하나라 한 것은 삼위일치를 말씀하신 것인데 이 단어를 주께서 부부의 한 몸에서 사용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남자와 여자가 만났지만 이제는 결코 둘이 아니고 하나 곧 일체가 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영과 혼과 육으로 지으신 것과도 같아서 이를 서로 떼어 낼 수 없듯이 한번 결혼한 부부는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이혼할 수 없는 원리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여러 가지 구실을 내어 이혼을 밥 먹 듯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까지도 이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결혼을 성례전을 치루고 있으며 교황청의 교리로서 이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교회에서는 결혼 주례를 선 목사가 다시 재혼 주례를 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혼의 문제를 간음으로 정의하여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라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여기서 간음이란 십계명에서 다룬 명령이기도 합니다. 아내든지 남편이든지 절대로 이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치심이며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B. 순수성의 상실(13-1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15)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 두 번째 잘못된 의식은 어른이 되어야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다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른이 될수록 인간은 더욱 완고하고 악해져서 순수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오니 예수들이 꾸짖었습니다. 이것을 보신 주님은 분히 여기시며 어린아이들을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께서 분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인격적인 완성을 이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죄성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할 때 우리가 세상을 알고 많은 지식을 얻고 자각을 하면 할수록 그 죄성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어린아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은 정말 천사처럼 순수하고 어집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세상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도둑질도 하며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이를 들면 들수록 사람은 더욱 완악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인간의 순수성 회복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잘못된 가르침 가운데 살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완고하고 악해진다는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모두 죄성을 갖고 태어 났습니다. 그러므로 나이를 더할수록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지는 만큼 사람의 마음이 더욱 완악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완전해 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주께서 오신 것이며 믿는 우리에게 거룩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II. 부자청년의 선택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하오리까?(17)

 

오늘 첫 번째 등장한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부자 청년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그 일대에서 상당히 저명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마태가 그를 가리켜 청년이라 하였으므로 어쩌면 그는 세습적인 부자일 것입니다(마19:22). 누가복음 10장25절에 기록과 동일한 내용이라 볼 때 그는 어쩌면 신학자일지도 모릅니다.

 

 A. 인간과 영생한 생명

흥미롭게도 그의 관심은 영원한 생명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종교적인 인생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이 부자 청년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종교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인간의 소망은 기독교적이지마는 않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영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죽음이 앞에 다가오면 다음세상을 생각하게 되고 그로 하여 이 땅에 종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감각을 무시하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현실 또한 영원한 생명의 한 연장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만족에 빠져 영원한 생명을 향한 비전을 상실한다면 인생의 곧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에 대하여는 최고의 부와 인격과 명예의 삶을 살던 솔로몬의 전도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B. 믿음의 우선순위

청년은 주 앞에 꿇어 앉아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위대한 발견입니다. 그러나 그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그분이 창조의 본체이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다 하셨습니다. 이에 청년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답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주님을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를 사랑스럽게 보신 것은 그가 비록 영생에 관한 지식이 없고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얻지 못하였어도 그가 인간으로서 능히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청년의 무지에 대하여 논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는 과연 이 청년만큼이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졌습니다.  첫 계명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부터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리고 네 번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까지는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언급하신 6계명은 모두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흥미롭게도 주님은 제5계명인 부모를 공경하라를 맨 나중에 한 것으로 보아 이 청년은 다른 계명보다 5계명을 소홀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10계명 중 인간관계에 속한 계명을 모두 어려서부터 지켰다는 것은 정말 칭찬 받을 만합니다.

 

몇 년 전 안양교도소에 정화위원으로 교육을 들어 갔을 때입니다. 그곳에서 어떤 재소자 한 분이 면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는 내게 여러 가지 성경의 신학적인 것을 물어 왔습니다. 그의 물음이 하도 기이하여 그의 신상카드를 살펴 보았더니 그는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죄명은 존속상해였습니다.

 

교도관의 말을 들으니 그는 팔십 노모가 치매에 걸려 오줌 똥을 못 가린다고 두들겨 패 노모가 죽게 되자 동네 사람들의 신고로 감옥에 들어 왔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직도 회개를 이루지 못하고 신학적인 논쟁을 걸어 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지혜를 얻었으니 나머지 계명은 소홀히 하여도 되겠는지요?

 

  C. 네게 부족한 것

주님은 그에게 영생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하셨습니다. 참으로 친절한 예수님이십니다.

 

이 구절은 많은 목사들이 부흥회에서 돈 좀 있는 성도들에게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그런 말을 한다면 성도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물질적인 축복을 기원하는 그 기도 또한 성경적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의 의도는 있는 재산을 모두 팔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라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그 청년의 부족한 한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물론 이 한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것이 억망이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지요? 주님은 너희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하셨으며 바울은 음행하는 자, 탐람하는 자, 술 취하는 자들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성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율법을 지키고도 영생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로 부자 청년이 이 경우입니다. 일생 동안 사람들 속에서 계명을 지켜 부모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하드라도 주께서 말씀하신 한 가지를 따르지 못함으로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가 행한 모든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그가 주의 말씀을 따르지 못한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재물을 다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근심 어린 얼굴로 돌아가는 청년을 바라 보며 주님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기가 심히 어렵다 하셨습니다.

 

  D. 삶의 능력의 근원

여기서 주님은 그 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 청년은 많은 재물이 있기 때문에 그 계명들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곤핍한 중에 있었다면 부모도 잘 모실 수 없었을 것이며 자기를 위해 이웃을 모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청년의 재산을 모두 팔라는 말씀의 요지는 계명을 지키는 힘이 물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에 놀라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7)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국은 사람의 능력과 세상의 힘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는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는다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들어 온 나라들은 모두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평안한 나라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점차로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모든 일들을 물질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니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책망 하셨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또 어떤 사람이건 축복을 빌어 주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의 나라에 있어서는 그 축복의 본질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목사들의 설교가 물질적 축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름 받은 자들의 인생관에 있어 그 우선 순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III. 제자들의 선택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5-37)

 

바다에 나아가 고기잡이를 좋아하던 베드로는 도전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 살아있는 물고기를 그물에 가득 잡아 올리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로 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에 비하여 야고보와 요한은 정치적 속성이 강한 제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갈 때에, 은혜를 많이 입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를 영접하기를 싫어하자 요한은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기도 하였습니다. 이디 그뿐입니까? 요한은 주께 나아와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고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야고보와 베드로의 불 같은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순하고 지적인 제자일 것이라 생각하는 요한은 상당히 과격하고 도전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로하여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당돌한 요구에 다른 제자들이 분이 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출세를 향한 속성은 복음을 위해 부름을 받은 모든 종들이 갖고 있는 속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속성들로 하여 수많은 교회들이 서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정치적 속성은 이방인 집권자들에게 있는 것이라 하시며 너희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객이 바뀌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말씀이기도 하며 다시 말하여 너희들의 본분과 입장을 기억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내용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세 번째 메시야 교육으로서 주께서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 나리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A. 첫번째 메시야 교육(막8:27-34)

주님의 첫 번째 메시야 교육은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며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말하여 이것을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시라 하시며 그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제 곧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것을 비로서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간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는 책망을 받았습니다(막8:27-33).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메시지는 인생의 의미가 먹고 사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따라 온 무리들을 향하여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7) 하셨습니다. 계속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냐 묻는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첫 번째 메시야 교육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의 본질에 대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B. 두번째 메시야 교육(막9:30-35)

주님의 두 번째 메시야 교육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를 데리고 변화산상에 올라 장차 임할 천국을 답사한 이후에 있었습니다. 이때 세 명의 제자들은 주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았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나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 산에서 내려오신 주님은 사람들에 둘러 쌓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면서 신학적 토론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라 책망하시며 귀신에게 고통 받는 자를 향하여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구원의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기도 외에는 할 수 없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계속하여 누가 큰 가를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욕망은 막을 수 없는가 봅니다. 이 때 주님은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의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번째 메시야 교육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 내는 제자들의 사역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C. 세번째 메시야 교육(막10:32-34)

그러면 10장에서 말씀하신 메시야 교육 세번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45절에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또 제자들을 부르고 택하신 사역적 사명이기도 합니다.

 

IV. 거지 바디메오의 선택(46-52)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자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51-52)

 

, 그러면 우리가 주께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여야 할까요? 그 대답은 마지막 문단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리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리고는 지중해 해면 보다 250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한 곳으로 여리고에서 해발 760미터인 예루살렘을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파로운 오르막길이었습니다.

 

또한 여리고는 종려나무의 성읍이라는 의미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종려나무는 승리의 나무이기도 합니다. 후일 요한은 이상 속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을 찬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요한은 이들이 누구인지 몰라 보좌에 둘러 있는 장로들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는 큰 환난 중에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 하였습니다(계7:9-14).

 

이곳에 이르자 수많은 사람들이 주를 따랐습니다. 그때 길에 앉아 동냥을 하던 바디메오가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쳐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그는 멈추지 않고 주를 찾았습니다. 이때 주께서 그를 불러 네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물으신 것입니다. 그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특별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소경 바디메오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그가 소경인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소경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예수를 불러 다윗의 자손이라 칭하였고 주 앞에 서서는 선생님이라 하였습니다. 앞에서 보건 데 부자 청년도 주를 가리켜 선생님이라 하였지만 이것은 그 의미가 아주 다릅니다.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며 사람들로부터 의인의 칭호를 받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메오는 나사렛 예수를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 칭하였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께서 성경에서 오시기로 약속하신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비록 성경을 보지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였고 재물도 없어 남들이 저주받은 인생이라 불리는 거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마리아가 낳은 목수의 아들 나사렛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디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메시야이신 선생님을 보기를 원한다 하였기 때문에 제자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52)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묵묵히 주의 가르침을 따르고 지키는 복음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께서 하신 말씀처럼 섬기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바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이기도 합니다.

 

, 이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주의 오심이 가까운 이 때에 서로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다툼하여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가장 낮은 여리고로 내려가서 주를 보기를 힘써야 할런지요? 흥미롭게도 바디메오란 명예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비롯 이승에서는 거지처럼 살더라도 장차 주께서 오르실 예루살렘에서는 명예의 아들이란 칭호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당신이 선택할 차례입니다.

 

혹시 당신은 부자청년처럼 갖고 있는 것을 버리기 아까워 근심된 얼굴로 내려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던지 그 선택한 대가가 당신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비롯 갈보리에 처해 동냥을 얻어 연명하드라도 명예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때 우리 함께 만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