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8장) 성경적 깨달음과 영적지각

이요나 2007. 2. 23. 17:12

(마가8장) 성경적 깨달음과 영적지각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막8:27-29)

 

만약 예수께서 세상에 와 계시고 귀신들린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며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중 표적들이 사람들 속에서 나타난다고 할 때 누구의 눈에는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보이고 또 어떤 사람의 눈에는 귀신이 역사하는 목수의 아들로 보인다면 이건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마가복음 8장은 예수님의 세 가지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깨달음과 영적 지각에 관한 함수관계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세계를 체감하기 위한 영적시각에 관한 원리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8장 전체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8장 전체를 문맥을 따라 문단별로 주의 깊게 살펴 마음에서 메시지의 핵심이 떠오르기까지 충분한 사고가 필요 합니다. 그 이유는 8장의 말씀은 단순하게 기적과 관련된 사역자의 영적 깨달음만을 시사하는 것뿐이 아니라 부름 받은 사역자들의 세상을 대처하는 영적 관리 능력에 관한 그 원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I.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1-21)

마가복음 8장은 서두에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일의 발단은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과 데가볼리 지역을 돌아 올 때 따라 나선 수많은 무리들로 인한 것입니다(7:31참조).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러한 상황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병이어의 기억을 체험한 후인데도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끈질긴 종교적 논쟁에 염증을 느낀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갑자기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여행을 위해 미처 빵을 준비하지 못한 것 때문에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글을 읽는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제자들이었구나 생각할지 모르나 이처럼 한계 속의 인간은 지식의 상황적 합리를 이루지 못할 때 생각과 사고의 갭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온전한 믿음을 지향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종교적 원리로 제시된 누룩의 속성과 관련하여 바리새인들과 헤롯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이룰 때 현실적 적용이 가능한 말씀입니다.

 

  A. 제시된 의문을 고민하라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첫 번째 질문은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하시며 내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일 때에 몇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느냐“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물음에 이에 제자들은”열둘입니다“답하였습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느냐“물으셨고 제자들은 ”일곱입니다“답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겠느냐“하셨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주님은 앞에서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그리고 ‘오병이어’와 ‘칠병이어’가 무엇을 시사하는 메시지인가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하여 고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그 말씀에 대한 해답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B. 성경 언어를 이해하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종종 마음으로 다가오는 질문들 만나게 됩니다. 만약 누가 이를 지나치지 않고자 노력한다면 그는 하늘의 보화를 발견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냥 지나쳐 버린 채 마가복음 8장을 이해하려 했다면 당신은 코끼리 다리를 만진 소경이 될 것입니다. 한 부분은 보았으나 주께서 설정하신 전체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언어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란 각 민족의 오랜 풍습과 문화와 생활 관습을 따라 역사와 함께 태동됩니다. 따라서 한국인들만이 이해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미국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 부모가 자녀에게 ‘썩을 놈’ 또는 ‘고얀 놈’이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자식을 염려하는 사랑의 표현이지만 미국인에게는 저주의 말이 됩니다. 이런 일들로 갓 미국 이민을 간 한국인들에게 큰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외국인이라도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풍습을 충분히 이해하면 그들의 언어의 속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으라’(골2:2) 권면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룩이라는 성경 용어를 사용하여 바리새인들과 헤롯이 교회와 믿음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여정(旅程) 속에 언급된 누룩의 상징적  속성을 발견하고 현실 속에 나타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속성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책망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인 그들이 성경에 계시된 누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영적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C. 종교의식과 정치적 현실을 직시하라

여기서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속성이 복음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한 것이고 헤롯의 누룩은 헤롯의 정치적 속성이 복음에 미치는 영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교회를 부패시키는 원인이 종교적 의식주의에 있으며 또한 재물과 명예를 추구하는 현실주의에서 비롯된 것을 상기 시킨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문제는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교회들이 성경의 가르침 보다 종교적 의식에 그 비중을 두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정치와 유착하여 제도화 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여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의 교훈을 따른 것을 책망하셨습니다(계2:14,15).

 

헤롯의 누룩을 생각할 때 정치 체제는 믿음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헤롯은 역사상  에서의 마지막 후손으로 그는 정치적 욕망으로 가득 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창출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유대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이제 곧 우리 앞에 두각을 나타낼 적그리스도 역시 종교를 이용하여 정치적 세력을 구축하여 두각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러한 양상은 계시록 17장과 18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의식주의에 빠지고 정치속성에 매이면 결국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이 비록 교권을 쥐고 종교적 의식을 행하고 있다 하드라도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터득하지 못한 영적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D. 질문의 열쇠를 찾으라

그러면 주께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언급하시며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주님의 질문과  제자들의 답변 속에서 메시지의 핵심을 발견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느냐“ 하셨고 제자들은 ’열둘입니다‘ 답하였습니다. 계속하여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일곱이니이다“답하였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질문의 열쇠는 ’몇 바구니‘,  ’몇 광주리‘에 있습니다.

 

1. 기적의 대상은 누구인가?

먼저 우리는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대상들이 누구인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의하면 오병이어 사건은 열두 제자들의 전도여행 결과로 모여든 이스라엘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칠병이어의 이적은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과 그리고 데가볼리를 돌아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따라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유대인 가운데 나타난 것이며,  칠병이어의 기적은 이방인 중에 나타난 기적입니다.

 

이것은 본문에 언급된 바구니와 광주리로서 그 대상들이 누구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민족의 생활 도구와 풍습이 시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구니는 유대인들이 여행할 때 음식물을 담는 작은 여행용 도구였으며, 광주리는 이방인들의 여행 도구입니다. 다메섹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 제자들이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밖으로 내린 바 있습니다(행9:25).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여야 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병이어와 칠병이어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복음적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열 둘’과 ‘일곱’이 뜻하는 성경언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숫자적 상징을 통한 성경해석은 좋아하지 않지만 성경에서 열둘과 일곱의 숫자는 믿는 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시사하는 성경 언어로서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열둘은 ‘구속과 섭리’를 의미하며 일곱은 ‘하나님의 신적 완전성’을 뜻합니다.

 

2. 기적의 요건은 무엇인가?

두 번째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누가 준비하였느냐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7절에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알아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라고 기록되었으며  이 떡은 어린 소년이 안드레에게 갖고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요6:8,9). 

 

그러나  칠병이어의 경우는 다른 상황입니다. 마가복음 8장 5절에는 “주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천 명을 먹인 칠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이 준비한 떡 일곱 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 본 이 말씀에 대한 합리적인 적용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도 앞에서 나열된 조각들을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말씀과 예배와 율법의 도를 받은 하나님의 택하신 유일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이 설혹 조상으로부터 교권을 받은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나 장로라 할지라도 스스로 아이들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 주께서 친히 세우시고 보내신 자 곧 사도들 앞으로 나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복음의 권위를 도전하는 자들을 향하여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은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7:29) 책망 하셨습니다.

 

그러면 일곱 광주리와 관련된 이방인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이방인은 고대로부터 하나님을 모르던 백성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습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택하신 종들을 성령으로 기름 부어 이방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의 구원은 주께서 보내신 제자들의 온전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시라(계3:1) 하였고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계19:10) 증거 하였습니다 .

 

II. 무엇이 보이느냐(22-26)

주님의 두 번째 질문은 소경의 눈에 안수하신 후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이 소경 한 사람을 예수께 데려와 안수를 원했을 때  주님은 그 소경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며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님의 특별한 행동에 여러 가지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아무 쓸데없는 소모적인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의 내용 속에 담긴 메시지를 바르게 깨닫게 하는 영적각성입니다.

 

A. 종교행위에 빠지지 말라

7장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주께서 소경을 사람들에게서 피하여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것은 군중들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종교적 표적으로 삼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시고 소경으로 다시 보게 하신 것은 긍휼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종교적 의미를 부과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 중에 나타난 은사들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교회는 부패하고 사람들은 종교적 행위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소경의 안수하신 주님은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습니다. 소경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다시 안수하시니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왜 주님은 두 번씩 안수를 하셔야 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주께서 점진적 치유의 필요성을 설명하신 것이라 말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우리에게 흡족함을 주지 못합니다.

 

B. 성경의 지혜를 발견하라

여기서도 우리는 메시지 전반에 그려져 있는 보이지 않는 그림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눈 뜬 소경은 처음에 사람들이 보인다 하였고 이어서 나무 같은 것이 걸어 다닌다 하였습니다. 그가 본 것은 사람이었지만 나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설교 가운데 여러 번 나무를 복음의 사역과 관련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하셨으며 또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시며 열매 맺는 가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계시록22장에는 달마다 열매 맺는 나무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어디 나무를 말한 것이겠습니까?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을 비유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께 부름 받은 사람들이 주의 뜻을 따라 온전히 가르친다면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 지혜의 점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외면한 채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려 합니다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학문을 배움에도 그 순서와 질서가 있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도 성경 말씀의 깨달음에서 더해집니다. 영적 시각은 깨달음의 깊이에서 그 지식과 지혜를 더해 가는 것입니다. 만물을 밝히 볼 때까지 우리는 성경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결코 어떤 종교적 행위와 의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때가 오래매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13)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 안에는 눈 뜬 소경들이 가득합니다. 모두가 표적을 바라는 종교의식에 사로잡혀 물질적 축복을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어떠한 행위적 방법이 아니라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매일매일 그의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지식이 더해 가면서 만물의 실체를 밝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III.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7-38)

주님의 세 번째 질문 속에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8장 전체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FI 빌립보 지방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명은 헬몬산의 정기가 흐르는 곳으로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신비스러워 헤롯 빌립1세가 황제 가이사에게 신전을 지어 바쳐 생긴 이름입니다.  이처럼 신비로운 자연 경관 속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순간 제자들 마음속에도 특별한 영적 신비로움이 젖어 들었을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어라고 하느냐’ 이에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답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유일한 백성으로 수많은 이미 말씀과 예배를 받았고 선지자를 통하여 가르침을 받아 온 백성들이 어떻게 이처럼 메시아에 대한 지식을 갖지 못하였을까 생각하게 됩니다만, 우리는 이미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라는 영적지식을 갖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그러한 영적지식이 열려지지 않은 시대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예수를 가리켜 세례요한 엘리야 또는 다른 선지자라고 성경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A. 믿음의 출발점은 하나님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는 나를 무어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라 답하였습니다. 오늘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 베드로의 답변은 그리 특별한 것 같지 않지만,  주님은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를 주로 영접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들을 질시할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 인내로서 그들이 주를 아는 지혜의 눈이 뜨게 되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께 답한 핵심은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따라서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나의 주인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여 이 지식은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라는 말을 종교적 의식과 믿음생활의 상징적 언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주 곧 우리의 생명과 인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주는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증거 하였습니다(계19:10). 만약 이 진리가 사실처럼 여겨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에 빠져 있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B. 그리스도로 믿음의 초점을 삼자

이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메시아 교육을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매달리며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간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책망하셨습니다. 바로 전에 주는 그리스도라 말하여 칭찬을 받은 베드로가 사단의 앞잡이로 변신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 되고 또한 사람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 한다는 것은 부름 받은 사역자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며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자기의 육신적 소욕을 죽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오시기까지 그의 교회를 위하여 기름 부어 세우신 자들의 모든 생명과 주권이 주께 있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부귀와 영화를 모두 포기하고 주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일들을 지고 주님의 가신 길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C. 믿음의 함량을 채우자

주님은 본문 마지막 절에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하셨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워하면’이란 말은 ‘함량 미달’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격적 기준과 그의 가르침에 도달하지 못하면’이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천하를 얻은 것처럼 교회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분당에 대형교회들이 줄지어 들어서는 바람에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유행어까지 생겼습니다. 또한 세습과 관련한 일들과 목사들이 서로 교권을 다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일들이 왜 생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단이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어떻게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가 말하는 분도 계시겠습니다마는 사단은 처음부터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종교의식과 현실주의로 이끌어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한 눈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