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6장) 양들의 침묵

이요나 2007. 2. 23. 17:15

(마가6장) 양들의 침묵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4)

 

오늘 마가복음 6장에서 사단이 통치하는 세상 가운데 새롭게 출발하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모습과 이 땅에 공존하는 두 왕국의 서로 다른 속성들을 살펴 보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주의 공간 즉 하늘을 말할 때 대기권과 우주권과 보좌권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여기서 보좌권이란 사도 바울이 다녀 온 삼층 천 하늘이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보좌권은 곧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우주권 밖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좌권은 결코 은하계를 벗어난 곳에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미 과학자들은 물질 구조에 대하여 물질 속에는 우리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고체보다 훨씬 많은 공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이러한 원리로 수소폭탄과 원자폭탄이 발명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 사이의 공간을 없애버린다면 우리 몸을 보기 위해서는 현미경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전혀 서로 다른 분자 구조를 가진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가 서로 교차하여 공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이 이것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적 세계의 분자 구조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설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영적 세계와 교감(交感)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습니다. 십이궁성에 감추어진 복음을 비밀을 밝히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으며 수많은 종교를 창출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영적 체감을 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 우리가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I. 메시지의 상실(1-6)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4)

 

주님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제자들을 파송 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습니다. 무엇인가 이곳을 통해 무엇인가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셨던 모양입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에 더욱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회당장이 선지자 이사야서를 주께 드리자 주께서 책을 펼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을 찾아 낭독하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주께서 어떤 메시지를 주실까 주목하고 있을 때 주님은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이제 성취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너희 귀에 응하였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오늘 나타난 은혜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성경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을 수 없다면 우리의 상태는 어떠할까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오기까지 400여 년 동안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전할 사람을 보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      보지 못하는 눈

여기서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예수께서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고향 사람들만큼은 예수께서 메시아 되심을 증거할 사람들인데도 도리어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메시아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에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태어나 다른 형제들과 같이 목수 생활을 하며 그들 속에서 함께 살던 나사렛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하여 좀더 냉철한 이성을 갖고 성경을 상고해 보았다면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당시는 아직 백성들에게 성경이 보급되지 않은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 천년 동안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되던 하나님의 메시지가 중단 된지 400여 년 동안 안식일 마다 회당에 모여 서기관들이 전해주는 성경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 그 말씀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었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이 전하는 설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2.      듣지 못하는 귀

그러면 백성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맡고 있었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출생의 가사를 살피고 성경적 고찰을 하였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능히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복음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계시를 알고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마리아를 통해 낳은 나사렛 예수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메시지를 통해서 깨달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삼십세 전후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전함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에 있었던 일로서 천사로부터 기쁜 소식을 받은 많은 사람들과 꿈과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송축한 많은 증인들이 아직 그들 속에서 살고 있었던 시대입니다. 사실 복음서 기자들도 그들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계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미 선지서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이 메시아의 별을 따라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로 하여 제사장들을 불러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날 것이냐 물었을 때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에서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나오리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로 하여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죽이므로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마2:18)는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3. 출세의 속성

오늘 예수께서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목도하는 제자들에게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4) 하신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들은 배경과 혈육적 지배 속성을 따를 수 없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먼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던 것입니다.

 

만약 선지자가 고향이나 친척이나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게 된다면 그는 족벌체제의 군왕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일들은 매우 두렵기만 합니다. 세습과 관련된 대형교회의 모습은 마치 왕국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통치 속성과 그리스도 왕국의 통치 속성이 어떻게 다르게 역사하고 있는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II. 그리스도 왕국의 출범(7-13)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7)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보내시기 앞서 두 명씩 조를 편성하셨습니다. 이것은 서로의 견제와 보안을 위한 조치입니다. 성경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하였고 다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 12) 기록하였습니다. 복음사역에는 그 주신 권세로 하여 사람들 속에 능력이 나타나므로 자칫하면 사역자들이 권세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요한삼서와 유다서에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호하는 군중의 박수 갈채는 인간의 욕망을 충동하는 출발점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를 방해하는 귀신들의 역사를 전재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더러운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 마음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게 하며 온갖 질병들로 사람을 구속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집을 늑탈치 못하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두 명씩 조를 편성해 먼저 서로 개인적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냉철한 이성적 보안장치를 하신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영적인 존재를 제어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1. 사역수칙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몇 가지 수칙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로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벌 옷도 입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을 갖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는 모든 능력이 주께 있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 가거든 그것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10)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시기와 경쟁을 유발하지 않기 위한 조치입니다. 이 집 저 집 옮기는 가운데 인과관계가 복잡해지고 공공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의 또 하나의 문제는 사역자들이 성도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고 인지상정이라 내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마음이 변하여 사역의 공평성이 상실 됩니다.  

 

예수께서 명하신 세 번째 수칙은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11)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두려운 말씀 중 하나로 이것은 제자들에 주신 권세의 징표이기도 하며 또한 제자들의 사역에 대한에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복음 전함을 받고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한 것이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명을 받고 파송 된 열두 제자들은 각 고을과 촌으로 나가 귀신을 좇아내며 병을 고쳤습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들어나 그 소문을 들은 헤롯 왕은 두려워 하며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그 능력이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엘리야라 말하기도 하고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온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신저가 없어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직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지식과 또 그 앞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서로 분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III. 헤롯의 시선(14-29)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 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22-23

 

세 번째 단락에서는 헤롯과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무엇 때문에 헤롯 왕의 사생활 문제를 거론하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는 여기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화합할 수 없는 세상의 속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내용이 열두 제자들의 파송과 관련된 글 속에 삽입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의 이념적 충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힘의 대결이 아니라 윤리에 속한 전쟁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주제를 크게 둘러 나눌 때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 자녀들의 거룩한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거룩한 생활은 신약 전체에 흐르는 복음적 이슈입니다.

 

  1. 욕정과 욕망에 불타는 족보

여기에 나오는 헤롯왕은 헤롯대왕이 말다케에게 낳은 헤롯 안디바였습니다. 헤롯대왕은 안디바를 낳기 전 제사장 가문의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알렉산더와 아르스토 불르스를 낳았으나 정치적 두려움 때문에 모두 살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로디아는 아리스토 불르스의 딸로 헤롯대왕의 또 다른 후처에게서 낳은 헤롯 빌립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 살로메를 낳았습니다.

 

원래 헤롯 빌립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 로마에서 귀족생활을 하였습니다만 정치적 야망이 강한 헤로디아는 로마를 방문한 시동생 헤롯 안디바와 눈이 맞아  헤롯 안디바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촌 헤롯 빌립과 결혼한 헤로디아는 시동생이자 삼촌인 헤롯 안디바와 결혼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헤롯 왕가는 정치적 야망과 욕정을 따라 불륜을 행하는 부도덕한 가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족보들이 세상 속에서 계속 불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      연민과 번민의 다중성격

여기서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헤롯이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는 기록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헤롯이 의에 대한 분별 능력과 의의 메시지에 대해 연민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차라리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불륜과 만행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통치자들에게 의로움과 거룩함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욕정과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전쟁터를 달리는 말처럼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는 속성을 지녔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불륜을 책망한 하나님 선지자 세례 요한을 죽이고자 원한에 불타 있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고 맹세를 하고 맙니다. 결국 이러한 헤롯의 다중성격은 하나님의 선지자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내어줍니다. 마가는 헤롯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위를 떠난 화살을 중단 할 수 없게 하신 하나님의 판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IV. 그리스도의 시선(30-4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34)

 

오병이어는 설교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설교제목 중에 하나입니다. 떡 다섯으로 오 천명을 먹인 하나님의 기적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내용에서 아주 중대한 메시지를 놓쳐버리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34절에서 주님은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리를 가리켜 목자 잃은 양 같다 하신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양에게는 세 가지 성질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스스로 살아 갈 자생능력이 없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목자의 음성을 듣기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침묵한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먹이가 충족되지 않으면 장막 터를 파헤쳐 쑥밭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양들에 의하여 쑥밭이 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6,27)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영적 체감을 상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즉 먹을 것에 질 들여진 양들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서 영적 체감을 상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목자 잃은 양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양들의 침묵은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를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허기에 차 있습니까? 그러나 그 나라들도 복음으로 충만하던 은혜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오늘과 같이 되어버린 것은 헤롯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목자의 목을 베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1. 충동하는 군중심리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를 건너게 한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수 천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술렁거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월드 컵 함성과 촛불시위에서 체험하였듯이 정치적 욕망으로 충동된 군중은 성난 파도와도 같습니다. 이에 주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를 건너게 하시고 사람들을 돌려 보낸 후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군중들에게 충동될 것을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이때 놀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 앞에 몰려 오자 베드로는 왜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주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루스드라 전도여행 중 바울과 바나바에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왔다 하며 제물을 드리려 했습니다. 이에 바울이 옷을 찢으며 우리는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외쳤습니다(행14:8-15). 이 때가 사도들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2. 열광의 박수갈채

우리는 앞에서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것이 사람들에게 충동되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수많은 군중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은 일이 있습니까? 집회 중에서 회중들의 환호를 받으신 일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 순간이 지옥으로 미끄러지는 길목입니다.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이나 밧세바의 사건도 모두 이러한 데서 연루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마지막 부분에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박수를 받기 위해 사도 야고보를 죽인 자입니다. 그 당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왕의 내관을 매수하여 헤롯을 거대한 집회에 세웠습니다. 헤롯이 화려한 왕복을 입고 메시지를 전하자 백성들이 신의 소리라 하며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때 하나님께서 헤롯의 입에 큰 권세를 허락하셨던가 봅니다. 그러나 헤롯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자 주의 사자가 처서 벌레가 먹어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박수갈채를 먹고 사는 각계각층의 스타들을 보고 있습니다. 집회나 경기장에서 열광하는 군중들의 환호와 박수 갈채는 그들을 신들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V. 양들의 침묵(45-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2)

 

본 문단에는 주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이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공상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믿지 않는 자들은 성경은 예수를 우상화한 논픽션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태초에 하나 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신 말씀을 믿게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불가능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질서를 초월하시며 천지의 주재이심을 증거하신 것 외에 잠들어 버린 제자들의 영적 의식을 깨우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영적 체감의 상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을 보내시며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를 건너게 하신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 기도하시던 중 깊은 밤 사경에 바다 가운데서 바람과 싸우는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달려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 하며 놀랐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는 자신의 터득한 지식과 의식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려고 하시매 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님은 그들을 구하려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냥 지나쳐 가시려고 했을까요? 그들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바다 위를 걸어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예수께서 제자들이 바다 위에 서신 예수를 보고 유령이다라고 영적 반응을 보였을 때 배에 오르셨다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감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사랑하는 자들의 고통 속으로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현실적인 실체를 체감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 양들의 침묵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52절의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는 말씀입니다. 이 기록은 제자들이 영적 체감을 상실한 이유를 떡 떼시던 일과 관련하여 우리의 이해를 돕는 주석입니다. 여기서 둔해졌다는 말은 깨달음이 없는 무지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서 체험한 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을 망각했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권세를 받은 제자들로서 예수께서 천지의 주재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들이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영적 불감 상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이런 상황을 체험을 해 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주께서 당신의 고통을 보고 달려 오셨는데도 당신의 믿음이 현실을 뛰어 넘지 못하여 주의 영을 체감하지 못한 체 주께서 당신을 지나쳐 가시게 하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당신이 만약 제자들처럼 유령이라도 느낄 수 있는 영적 체감을 할 수 있다면 주님은 당신의 문제의 현장으로 들어와 고통의 바람을 잠 재우실 것입니다.

 

IV. 믿음의 열정과 아름다운 스킨쉽(53-56)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오니(55)

 

이제 우리는 본문 마지막 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주를 향해 구원의 손을 내뻗은 사람들은 마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들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혈루증 여인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이 믿음을 발견하기까지는 열 두 해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은 고통 중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병든 사람들을 둘러 메고 나온 사람들의 믿음의 열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의 열정입니까?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을 주께 데려 오는 믿음의 열정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킨쉽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제 나는 우리가 모두 이 아름다운 사역의 주역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한 여름 평안하십시오. 7장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