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5장-1) 신세대 프로젝트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막5:18-20)
신세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볼 때 ‘새로운 세대’ 즉 10대부터 3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청소년과 청년층을 포괄하는 대명사입니다. 개화기 구한말에는 서구 신학문을 접한 소위 ‘High Color’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신세대란 말은 동서양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역사적 조류 속에 새롭게 유입된 문명과 문화의 충돌 가운데 파생된 세대교체를 주도하는 신진세력을 가리키는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세력균형을 위한 민족주의 사고가 팽대해지면서 신세대라는 의미는 문명과 지식의 차원을 벗어나 보수주의 성향을 타도하는 진보개혁주의의 정치적 용어로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신세대’라는 용어는 1960년대 구미 전역을 휩쓸던 ‘뉴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과 관련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정치 경제 사회적 혼돈의 시대로서 사회 전반에서 가치관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사상과 이념의 고정관념 틀에서 벗어나 원초적인 자연의 조화와 육체의 요구를 따라 새로운 느낌을 창출하고자 하는 소위 ‘히피족’(Hippies)라는 별단의 공동체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초월 명상을 통해 우주적 신비주의를 주창하는 고도의 영적 세력이 역사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의 의식 속에는 정치와 종교가 결탁되어 도덕과 윤리가 제도화 되면서 인간 고유의 사고와 자유마저 통제되는 현대사회의 매너리즘에 반발하는 자율 회복의식이 용트림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본문의 제목을 ‘신세대 프로젝트’라 이름한 것은 4장에서 천국복음의 비밀을 선포하신 후 첫 대목으로 대두된 내용이 군대귀신 들린 자의 변신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귀신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 속의 이야기로 묘사되거나 실존 불가능의 영적 존재로 분류되고 있는 가운데 극단적 종교 논리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귀신들의 활동 영역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항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현대 속에 역사하는 귀신들의 존재와 활동의 영역과 관련하여 보다 현실적이고 성경적인 각도에서 생각하고 접근해야 할 신사고적 메시지로 받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에 걸쳐 함께 살펴 볼 마가복음 5장은 각양각색의 인간의 영혼의 구원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내용으로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 첫 단락은 귀신에 속한 자에 관한 내용이며 두 번 째는 종교와 믿음에 관한 내용이며 세 번째는 죄와 질병에 관한 것이며 내 번째는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로서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안에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들인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1-2)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라는 기록은 우리에게 이 내용이 4장의 맥락에서 진행된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4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곳을 건너오기 전 예수님과 제자들은 생명을 위협할만한 거대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의 비명에 잠에서 깨어난 예수께서는 바람과 풍랑을 꾸짖으시며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영혼 구원을 향한 복음의 계획에 대한 사단의 영적 대응이 얼마나 사실적이고 위협적인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그를 물리칠 절대적 요소는 오직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1절에 기록된 ‘거라사인의 지방’은 다른 복음서와 서로 대치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8장 28절에는 ‘가다라 지방’이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지역은 지도상으로 살펴 볼 때 거라사 지역은 갈릴리 호수 남쪽 끝에서 남동쪽으로 50 여 키로 지점의 성읍이며, 마태가 기록한 가다라 지역은 갈릴리 남동쪽 십여 키로 지점의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옛 베레아의 수도로서 거라사와는 서로 다른 지역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가와 마태 중 하나가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도 하고 두 지역이 인근 마을일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같은 시대에 살던 증인들이 동일 내용을 다루면서 서로 착오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후일 이 내용을 읽는 우리에게 본 사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고를 요구하는 묵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마태는 이 지역을 ‘가다라 지방’이라고 기록한 데 비하여 마가와 누가는 이 지역을 ‘거라사 지방’이라 하지 않고 ‘거라사인의 지방’(땅)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은 거라사인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사는 곳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기록은 20절에 기록된 ‘데카폴리’(한글 성경은 데가볼리)라는 지역에 대한 역사적 고찰입니다.
데카폴리란 단일 지역명이 아니라 10개의 도시를 묶어서 지칭하는 도시국가 형태의 통합 도시 명칭입니다. 다시 말하여 오늘날 유럽연합(EU)과 같은 성격을 가진 10개의 통합 도시국가의 명칭으로 후일 이곳은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게 된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참조 막7:31, 8:20)
1. 핼라와 데카폴리
‘데카폴리’란 10개를 의미하는 ‘데카’와 성읍을 의미하는 ‘폴리’란 두 단어의 합성어로 본래 수리아의 영토였습니다만 헬라를 일으킨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한 후 동방의 헬라화 정책의 일환으로 건설한 10개의 도시국가입니다. 이 지역은 요단강 주변의 가장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알렉산더 대왕은 아시아 지역에 헬라의 문화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이곳을 그리스적인 사상과 배경을 가진 도시로 건설하였습니다.
데카폴리에 소속된 10개의 성읍의 이름을 열거하면 스키도폴리스(Scythopolis), 펠라(Pella), 디온(Dion), 거라사(Gerasa), 필라델피아(Philadelphia), 가다라(Gadara), 라바나(Raphana), 가나다(Kanatha), 히포스(Hippos) 그리고 다메섹(Damascus)으로서 이 지역은 위도상으로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적 교류의 천혜의 조건을 갖고 있어 고대 팔레스틴 통치자들이 서로 노리던 전략적 요지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 지역을 가장 효과적으로 헬라화 하기 위해 10개의 각 도시마다 독립된 의회와 화폐를 가진 지방자치 군주 제도를 도입하고 상호 방위조약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연방 정치를 수립하였습니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은 데카폴리를 최고의 헬라도시로 활성화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치적 특혜를 주어 데카폴리는 헬라의 상류 귀족들의 휴양도시가 되어 후일 쾌락주의 철학자 필레데모스(Philodomus), 풍자시인 멜레아갈(Meleager), 자메니푸스(menipus) 그리고 수사학자 데오도로스(Theodorus)와 같은 헬라의 명문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오늘날 중국과 북한을 비롯한 개발 도상국들이 자국 안에 특별 국제도시를 만들어 경제 개발을 꾀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점 우리나라도 전국시도 편재를 도시형으로 개편하려는 움직임이 검토되고 있는 것도 시대를 가늠하는 중요한 표적입니다.
*마카비 왕조 시대
그 후 기원전 2세기 중엽 유대의 정복자 마카비 형제들이 일어나 유대를 독립하면서 데카폴리 일대는 다시 유대에 예속되어 유대인 이주정책이 의해 헬라인들이 추방되었습니다. 또한 유대의 마카비 왕조는 헬라정책을 말살하기 위하여 유대의 유일신 메시야 사상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의 마카비 왕조는 기원 63년경 로마의 폼베이에 의하여 몰락하였고 다시 이 지역은 로마의 지배로 들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데카볼리 지역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지배세력의 사상과 종교적 이념을 따라 사고와 이상의 충돌이 거듭되어 왔습니다. 결국 이 지역은 오랜 세월 동안 통치세력에 의하여 정치 종교 철학적 사상과 이념을 따라 의식의 충돌이 불가피한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제국 시대
동서고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복자들은 자신이 점령한 국가의 두뇌들 즉 국가 경영자들과 지식인들을 인질로 잡아가고 그 대신 자국(自國)의 두뇌들을 그 지역에 주둔시키는 동화정책을 써왔습니다. 이러한 정치제도는 로마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헬라의 후속 국가들을 전복하고 전세계를 제패한 로마정부는 이러한 데카폴리의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특수성을 감안하여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군주제도를 그대로 수용하고 정치적 독립권을 유지시키면서 로마에 조세와 병역의 의무만을 부여하였습니다. 또한 로마정부는 이 지역을 동방 정복을 위한 작전기지로 삼아 로마 군단본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수리아 후손으로 유대 통치자가 된 헤롯대왕과 그 후예들로 지역 분봉왕을 삼은 로마정치의 구조 속에서 속국을 다루는 로마의 통치제도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 급변하는 정치적 격동 속에서 데카폴리 지역 사람들은 철학적 지혜와 이상적인 학문을 추구하던 지적 사고에서 벗어나 현실적이고 지극히 개인주의 사고로 변천되어 영리를 위한 타협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졌습니다. 다시 말하여 돈과 명예와 쾌락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지극히 동물적인 속성에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극단적 현실주의는 주변국가로 빠르게 파급되어 급기야 수 천년 동안 메시아 사상으로 무장된 유대민족에까지 전이되어 이스라엘은 ‘음란한 세대’(막8:38)와 ‘믿음이 없는 세대’(막9:19)라 책망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2. 정치와 영적관계
나는 우리 기독교가 처음부터 공동체로 탄생한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다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구조와 조직들이 그 지배 세력의 이념과 사상과 철학에 의해 활동되기 때문에 공동체 속에 역사하는 영적 사고와 그 지식을 따라 선한 생각이 나타나기도 하고 또 악한 생각과 악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로 하여 자유국가에는 자유문명과 지식과 자유사고가 흐르고 사회주의 체제에는 주체 사상과 이념이 지배 세력이 되어 이데올로기의 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과 악의 끊임없는 투쟁은 사람들의 사고와 생각을 지배하는 거대한 바람을 타고 통치세력 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측면을 직시할 때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 전반부에서 용트림하는 사회주의적 사상과 이념의 포용은 좀더 냉철한 지식과 이해 속에서 조심스럽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차하는 순간에 선한 양심의 인도함을 받지 못한 우리의 아들들은 거대한 풍랑에 사로잡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밀려 들어가 버릴 것입니다.
II. 귀신들린 자의 상태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3-5)
우리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은 군대 귀신들린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출신에 대하여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타고난 사람이라 할 때 우리는 그의 성장 환경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후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온전한 사람이 되어 친속에게 돌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라는 주의 명령을 받고 데카폴리 일대에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친속들이 그 일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어쩌면 그는 그 지역에 명성을 날리던 명문의 후손으로서 주색잡귀에 사로잡혔던 팔난봉군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방탕하는 명문가의 자녀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귀신 들린 자에 대한 우리의 사고와 이해는 달라져야 합니다.
1. 사로잡힌 영혼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귀신과 귀신들린 사람에 관한 새로운 인식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귀신과 귀신들린 사람을 동일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귀신이 그 사람의 영과 혼과 몸을 모두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에 의해 활동하게 됩니다만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귀신 들린 자에 대한 우리의 또 다른 사고와 또 다른 접근의 필요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귀신에 의해 사로잡혀 있을 뿐 그의 영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제는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그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그는 매여 있기를 싫어하여 쇠사슬을 끊어 낼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격리된 장소에서 밤낮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 제 몸을 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이러한 일들은 나와 관계없을 일로 생각하며 소설처럼 생각하게 됩니다만 사실 이 이야기는 매너리즘이 빠진 우리 시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의 자녀나 친지 중에 이러한 일들이 벌써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들이 술과 담배와 마약에 빠져 성적 쾌락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성을 잃고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며 육체의 속성을 따라 달려 나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더러운 귀신의 사슬을 풀기 위해 주께서 친히 그에게 나아 가셨다는 것과 후일 그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혼돈의 땅 데카폴리의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메시지를 대하는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더욱 인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을 향한 모든 예정과 섭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2. 영적 속성
6절에는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귀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영적인 존재들이라 생각하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를 알아 보지 못하는데 그 어느 때이고 주님 앞에 달려 나와 엎드려 굴복하는 귀신들의 모습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귀신이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한 것은 귀신들은 다른 조직 속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타락한 천사 곧 사단이 부리는 영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영과 화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영으로 영을 분변한다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귀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변하였듯이 거룩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우리들도 사람 안에 역사하고 있는 더러운 영을 간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막3:27) 하시며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안에 임하였느라”(마12:28)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사람 속에 역사하는 귀신을 분변하지 못하고서는 그를 쫓아 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귀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복음사역은 먼저 그 속에 역사하는 영을 분변하고 더러운 영들을 결박해 내지 않고서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3. 귀신의 정체
예수께서 귀신들에게 이름을 묻자 귀신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레기온(軍隊)라 답하였습니다. 여기서 ‘군대’란 헬라어 ‘레기온’으로 로마군대의 10개의 연대 병력을 수용하는 군단 편재 단위입니다. 그 당시 전세계를 굴복시킨 로마의 힘은 로마의 꽃이라 불리던 로마군대에 있었습니다. 한때 찬란한 헬라 문화로 아름답게 꽃피었던 철학과 이상의 도시가 아시아를 정복하기 위한 군단본부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위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귀신들린 자가 자신의 이름을 가리켜 ‘군대’(레기온)라 말한 것으로 우리는 귀신의 세계에도 조직과 질서를 갖고 있음과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와 문화를 움직이는 현실적인 힘의 균형이 군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귀신들은 예수께 그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말아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귀신들도 자신의 선택적 의지와 감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귀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실 속에 역사하는 실제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들 속에 있는 귀신을 접근할 때 먼저 영에 대한 영적 지식을 갖고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귀신의 역사라고 보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귀신들이 그 사람들의 생활 영역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이 좋아하는 생활권에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 역사하는 더러운 영들을 분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일각에서도 동성애와 대마초를 수용해야 한다는 말들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인권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권이란 창조자의 거룩한 뜻 안에서 설정된 것입니다. 1200만의 성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운동이 용트림하고 있다는 것은 심히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III. 뉴 프로젝트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20)
이 세상에 귀신 들리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배 세력이 추구하는 이상 속에 역사하는 영들을 따라 자신도 모르게 얽혀 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은 그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 사람의 죄도 아닌 인간의 원죄에 속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군대 귀신 들린 자와 같이 방치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설교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는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읽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성경을 펼쳐 설교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온 것은 사단에 사로잡혀 포로되고 눈 먼 자들과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오신 것이라 증거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임을 언급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복음전도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부흥 운동이나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나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1. 기성세대의 가치관
17절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대귀신에 지펴 아무도 범할 수 없는 무덤가에 쇠고랑을 차고 있던 사람이 온전한 정신이 돌아와 앉은 것을 보고 그 지역 유지들이 몰려와 예수께서 떠나 가기를 종용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람이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수 천 마리의 돼지 떼가 몰살한 경제적 손실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셨는데 사람의 영혼을 율법으로도 금한 돼지보다도 가벼이 여기다니 세상의 말로 돼지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가치관은 거룩한 인간의 존엄성에서 멀어져 욕구 본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하루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어 감옥이나 구치소나 정신병원에 갇혀 버리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도 더 이상 그들로 하여 침해 받기를 싫어합니다. 사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지음 받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인데도 말입니다.
나는 교도소 정신교육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감옥에서 흐느끼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아 왔습니다. 또한 나는 술과 마약과 성에 사로잡혀 노예가 된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쇠사슬 속에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와 같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8:19-20)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의탁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신세대
흥미롭게도 주님은 주와 함께 하기를 원하는 군대귀신 지폈던 자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셨습니다. 그후 그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도록 타락한 도시 데카볼리의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미국 최대 교회 12개를 장악하여 금세기 교회의 모델이라 불리는 갈보리 채플은 1960년대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기 사단 문화권에 사로잡혀 거리를 배회하며 방황하던 히피들에게 예수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어느 날 저녁 부인과 해변을 산책하던 척 스미스 목사는 도요새처럼 배외하는 수많은 히피들 속에서 통곡하는 영혼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후 척 스미스 목사는 교회 문을 그들에 눈높이로 낮추고 그들에게 성경 전체를 한절한절 풀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쇠사슬을 풀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나타나심 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자국의 번영과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계각국들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서로 연합하여 그로벌 시대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이미 유럽연합은 금융을 통합하고 통합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아시아를 비롯한 지구촌은 주변국가와 연합 공동체를 추진하며 경제특구를 통한 국제물류 도시를 개설하고 있습니다. 통합체제는 최고의 유익을 창출하는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결국은 인류의 선한 양심과 자유를 통제해 버리는 패권주의로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리는 왜곡 당하고 불의가 성하여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앞에 데카폴리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우리는 거대한 데카폴리 존(Zone)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앞에 다가 선 데카폴리 시대에 새롭게 펼쳐져야 할 신세대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그들을 찾아가 쇠사슬을 풀고 신세대 전도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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