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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5장-2) 믿음의 모험과 人生共感

이요나 2007. 2. 23. 17:16

(마가5장-2) 믿음의 모험과 人生共感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볼 마가복음 5장에는 한 시대를 살아 가던 네 부류의 사람들의 구원의 과정과 믿음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로서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가운데 제일 먼저 소개된 사람은 후일 데카볼리 일대를 전도한 군대 귀신들린 자라는 데 있습니다. 더욱이 군대 귀신들린 자를 구원한 프로젝트가 전세계의 헬라화를 꿈꾸던 한 인간의 야망에서 시도된 열 개의 통합 도시국가 데카볼리에서 전개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하나의 연합국가를 향하여 그로벌 커뮤니티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유럽연합(EU)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세상 신에 사로잡혔던 군대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믿은 것은 그의 요구와 선택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이방 세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경배하며 메시아의 오심을 소망하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들은 조상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예배와 율법과 언약의 말씀을 받은 민족으로 유대인의 신앙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존립하는 모체로서 삶의 목표이자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되는 사람들은 인생의 벼랑 끝에서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모험을 시도할 때 제일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유태인의 개종은 자기만의 다툼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부터 누려 온 히브리인의 신성과 영광의 역사와 천년왕국을 향한 메시아의 이상과 그에 속한 거룩한 예배와 조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있어 출교란 사실상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나를 따라고자 하는 자는 보모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 말씀하신 것입니다.

 

I. 모험의 출발선(21-24)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에워싸 밀더라(22-24)

 

오늘 위대한 믿음의 모험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은 회당장 야이로로부터 출발합니다. 야이로는 예수께서 전도의 발판으로 삼으신 가버나움의 회당장으로 오늘 이 일은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신 세리 마태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서 죄인들과 세리와 어울려 식사하실 때 발생된 일입니다(마9:18).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또한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께 나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들의 항의는 모두 종교적 의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적 관심은 영혼의 구원과 안식에 있지 않고 의인이 되기 위한 종교적 의식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이 영혼의 구원에 관한 사고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그들의 믿음이 죄인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택한 거룩한 백성이라는 의인이라는 위치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 신앙의 기준은 죄인과 의인을 가리는 율법적 행위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신앙관은 주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용기와 결단

어느 날 갑자기 명예와 부를 누리며 존경 받던 유대 지도자 야이로에게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열두 살 난 딸이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두 살이면 성인식을 거행하고 혼인을 준비할 나이로서 가장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회당장의 직위와 생활로 보아 야이로는 예수의 발 앞에 오기까지 딸을 살리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취하였을 것입니다. 유명한 의원들은 물론 민간요법과 좋다는 약은 모두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질병을 위한 종교적 의식도 행하였을 것이며 이제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딸을 살릴 도리가 없다고 판단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야이로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간청한 것으로 보아 그는 예수께서 병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치신 일들을 목격한 바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일과(막1:26), 또 손이 마른 사람의 손을 만져 고치신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막3:5). 이러한 기적들은 모두 가버나움 회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딸의 죽음을 놓고 더 이상의 길을 찾지 못한 야이로는 결국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결단은 지금까지 쌓아 온 자신의 모든 명예와 지위를 버려야 하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덕망 받는 지도자이며 유대교 조직의 한 일원으로 이미 이단 괴수로 낙인 된 나사렛 예수 앞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단일 신앙 공동체인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의미합니다. 출교 이후 그는 자신이 누리든 모든 종교적 지위와 명예로부터 퇴출되어 이단의 추종자로 전락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야이로의 용기와 결단은 결국 딸의 생명을 살려낸 믿음의 출발선이었습니다.

 

*믿음 출발선

오늘날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어떤 일에 용기와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비전과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물질과 현실주의에 빠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 속에서 만나는 야이로의 용기 있는 결단은 위대한 믿음의 출발선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야이로의 용기와 결단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결단과 용기는 믿음으로 나가는 과정이지 믿음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는 아직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였을 뿐입니다.

 

야이로의 용기 있는 결단을 보신 예수님은 그의 청을 쾌히 받아 주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께서 사경을 헤매는 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주시면 사랑하는 딸은 소생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깨달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딸의 생명을 구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께 무릎을 꿇은 사건은 가버나움 일대의 빅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오늘날은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욘사마에게서나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마가는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기록하였습니다. 이 때 갑자기 예수께서 주변의 돌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에서 그 능력이 나가는 것을 스스로 아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타인의 병을 고치는 능력이 몸에서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II. 믿음의 모델 혈루증 여인(25-34)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5-29)

 

혈루병이란 부인병으로서 요즘 말로 하면 만성 자궁 출혈병입니다. 요즘 같으면 자궁만성 출혈병에 걸린 것이 여인의 인격에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마는 유대인에게 있어 유출병은 율법에 기록된 부정한 병으로 유출병에 걸린 여인은 부정한 여인으로 예배의 참여는 물론 모든 공동체 생활에서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물론 이혼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유출병을 아주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율법은 유출병 든 여인을 부정한 자로 규정하였습니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것은 문둥병과 같이 저주와 관련된 말입니다. 또한 유출병은 그 병든 여인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유출병자가 누운 침상이나 앉았던 곳을 모두 부정하게 여겨 그곳에 누가 앉았다면 그 옷을 빨고 저녁까지 다른 사람에게서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또 누가 유출병자가 탔던 나귀나 말 안장에 닿았다면 그 흐르는 물에 몸을 씻고 옷을 빨아야 했으며 이들이 만진 그릇도 부정한 질그릇은 깨뜨려 버리고 목기는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야 했습니다.

 

또한 유출병에 들린 자가 정결해 지기 위해서는 병이 나아 깨끗해진 후에도 칠 일 동안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어야 했으며 제8일 되는 날에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잡아서 여호와 앞의 제사장에게 가지고 나가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그 비둘기 중 하나는 죄를 속하는 속죄제로 하나는 번제로 드려서 여호와 앞에서 그 유출병을 속죄하였습니다(레15장 참조).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종교의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엄격한 율법이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와 아론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투쟁과 종교적 현실

오늘 본문 속의 이 여인은 이러한 종교적 생활규제 속에서도 열두 해 동안 부정한 병에서 놓임을 받기 위하여 투쟁을 하였습니다. 많은 의원에게서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여인은 여러 의원들의 임상실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열두 해 동안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재물을 허비하였다는 기록은 이 여인은 유복한 가정의 이혼녀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은 결혼 시에 그의 부모가 그 남편으로부터 미리 지참금을 받아 보관하게 됩니다. 여자들의 인권이 무시되던 시대에 이혼녀가 먹고 살아야 할 위자료를 미리 받아 두는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과 이혼을 당한 후 부모형제는 물론 유대인 공동체에서 격리 되어야 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하루 아침에 부정한 여인이 되어 가족들과 격리되어 하나님 앞에 예배도 드릴 수 없는 저주 받은 여인이 되었을 때 이 여인의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열두 해 동안 투쟁하였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 여인의 투쟁을 바라보며 부질 없는 일이라 비난하였을 것입니다만 이 여인은 자신이 부정한 여인으로 인생을 마감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길을 모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절망의 상태가 도달하였습니다.

 

의사들도 손을 들었고 갖고 있던 재물이 바닥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삶에 대한 인간의 소망은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과 능력의 한계가 끝이 날 때까지 달려나가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가 끝나기 전까지 인간은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이미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에 관한 성경의 지식들을 갖고 있다 하드라도 현실적 한계에 도달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지혜는 믿음의 현실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실체가 현실 속에서 종교화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발견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여인은 어느 날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신 일을 들었을 것이며 중풍병자의 구원과 손 마른 자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열두 해 동안 오직 의사에게 병을 고치겠다고 생각하고 달려오던 이 여인에게 나사렛 예수의 소문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진리로의 자각은 인간의 지혜와 이성적 판단의 뒷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있었다면 그 많은 시간과 재물을 허비하지는 않았을 것인데도 말입니다. 이처럼 재물은 영혼을 가로막는 우상인 것입니다.

 

절망의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이 여인의 심령 깊은 곳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인은 저주의 절망 가운데서 메시아의 음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듣는 순간 그가 자기의 영혼을 구속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깨닫고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이 저주에서 놓임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복음의 실체에 대한 영적 자각에서 나타나는 이성의 지표인 것입니다.

 

성경은 네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영적 자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현실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구원의 믿음 앞에는 항상 커다란 영적 장애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향한 구원의 믿음을 발견한 혈루증 여인은 예수를 향하여 달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장벽을 뚫고 돌진하였습니다. 구원의 문을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순간 누가 부정한 여인이라 돌을 던진다 해도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믿음을 실행하였고 그 믿음의 투쟁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라는 평안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옷자락이라도 잡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여인의 믿음의 증언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를 발견하지 못한 회당장 야이로의 심령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III. 믿음의 목표 달리다굼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게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41-42a)

 

혈루증 여인을 통하여 살아 있는 믿음의 증언을 들은 야이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삶의 목적이던 종교적 행위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집에 거의 당도할 무렵 하인들이 딸의 사망 비보를 가지고 와서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절망적인 순간입니까? 혈루증 여인의 믿음의 증언이 마음에 새겨지기도 전에 이 여인만 아니었다면 내 딸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과 울분이 솟구쳤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실로 인간의 모든 지혜와 지식들을 종결 지어 버립니다. 더 이상 소망도 미련도 애착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 누가 무엇을 말할 수 있으며 무슨 소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생명에 관한 인간의 지혜와 종교적 이상들이 한 순간에 모멸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은 오직 영혼의 주관자이신 창조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체험과 부활

이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 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이 따라 오는 것을 막으신 것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부정적인 말들이 오히려 믿음의 장해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아직 제자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와 함께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 속에도 하나님의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에 기록된 이적들은 후대 사람들의 믿음을 고취하기 위한 신화적 요소이며 또 신약에 기록된 기적들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었던 일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러한 능력이 나타나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있으며 문명 이전의 일들이라고 일축해 버리기까지 합니다. 지나치게 영적 요소만을 추구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지만 이러한 잘못된 생각들은 믿음의 능력과 역사를 방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이 야이로의 집에 당도하자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을 행하며 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헌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헌화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육체에서 생명이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이로의 딸은 실제로 죽은 것으로 의학적으로 생명의 호흡이 끝난 것입니다. 이 때 만약 누가 딸의 죽음을 놓고 잔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동생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믿는 자들의 죽음을 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은 주께서 오실 때에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부활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의식을 모두 내려 놓고 육체와 영혼이 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체의 고통을 내려 놓고 그리스도의 날까지 자고 있는 것입니다. 잠든 영혼은 주께서 오셔 깨우실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려갈 때 우리가 잠시 주 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들을 모두 집 밖으로 내어 보내고 아이의 부모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오직 그들만이 주께서 능히 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누워있는 아이를 향하여 "달리다굼" 다시 말하여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잠자는 아이에게 말씀하시듯이 말입니다. 성경은 소녀가 곧 일어나 걸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마 이 아이는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기분일 것입니다. 우리도 후일 잠들어 쉬다가 주께서 오실 때에 달리다굼이란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소녀와 같이 상쾌한 기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모험과 섭리의 시간

오늘의 메시지 중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열 두 해와 열 두 살이라는 숫자입니다. 시각적으로 말하자면 이 여인이 혈루증에 잡혔을 때 이 아이가 태어난 것이 됩니다. 희비애락 속에 펼쳐진 인생공감(人生共感)이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열 둘이란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구약의 열 두 장로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열 두 제자, 이러한 성경적 의미 속에서 열둘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뜻 합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요 밤이 열두 시간인 것처럼 이 세상을 섭리하는 하나님의 섭리라 하겠습니다. 또한 이 한계를 넘은 13이란 숫자가 사단을 의미한다고 할 때 열 둘이 시사하는 바가 특별합니다.

 

오늘 회당장 야이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오늘 이 말씀은 구원의 실체를 상실한 체 종교의식에 혈안이 된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한 체 예배를 표방하는 종교적 의식 속에 매여 버린다면 우리의 부르심이 어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날로 제도화되고 있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의식을 바라보며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경계하라 말씀하였습니다.(막8:15). 이것은 의식적인 종교활동과 자유주의적 신앙관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 기자는 자만하는 히브리 성도들을 향하여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기록 하였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날을 예비할 우리를 향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제도적인 종교적 의식 속에서 깨어나 영혼의 구원을 향한 믿음의 모험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성경은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11:9-10) 기록 하였습니다. 우리 앞에 섭리하신 시간이 남아 있을 때 균형을 잃은 형식과 제도에서 벗어나 오직 진리의 말씀을 향한 믿음의 모험을 떠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7장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