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4장) 천국의 열쇠
(막4:23-25)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우리는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의 개막과 함께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할 수 없는 복음의 속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향한 의식전환의 필요성과 종교개혁을 위한 복음의 혁명에 관한 내용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보고자 하는 마가복음 4장의 주제는 이 땅에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의 토대가 되는 복음의 비밀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사람들 속에 나타나는 복음의 반응과 복음의 성질 그리고 복음의 성장 속성과 과정을 설명하신 후 이 모든 과정은 성도의 실제 생활을 지키는 믿음을 생성하는 열쇠임을 환기 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마가복음 4장은 흥미롭게도 바다 위에서 시작되어 바다 위에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인생은 고해바다라고 말했습니다만 오늘의 말씀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황망한 바다와 같은 세상 길에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지켜 줄 삶의 원동력이 되는 믿음을 생성시키는 가장 기초적이고 토대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 기록하였고 또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풍처럼 몰려 오는 환난으로부터 천국의 삶을 지키는 온전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두 번이나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말씀하시며 씨 뿌리는 비유를 가리켜 ‘천국비밀’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살펴 보는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은 반듯이 마태복음 13장과 누가복음 8장을 함께 살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이 부분만큼은 서로 대조하며 주위 깊게 살펴 각 저자들을 통해서 전달되는 메시지 속에 녹아 있는 복음의 비밀을 음미하여야 합니다.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하시니라”(9)
배에 앉으신 예수님은 바닷가에 선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 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1. 문제와 해답을 공유
마가는 2절에서 이 말씀은 비유로 가르치신 것이라는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내용은 요즘 세상을 온통 코메디로 만들고 있는 웃찾사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씨 뿌리는 자의 실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자가 처음부터 좋은 땅에 뿌리면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은 씨 뿌리는 자는 처음부터 길가와 돌 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에 씨를 뿌렸다는 것이며 그 결과는 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성경의 비유는 그 속에 문제와 답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유의 살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말의 구조를 살필 것이 아니라 비유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그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2. 공평하신 하나님의 말씀
오늘 주께서 가르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가장 큰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공의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듣는 사람들을 향하여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셨습니다. 마태는 이 부분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기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희에게 내 말을 들을 귓구멍이 있느냐’라고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오늘 주 앞에 몰려 온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오늘은 어떤 기적을 일으키실까 하는 호기심에 바쁜 일손을 내어 던지고 바닷가로 달려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 씨 뿌리는 농사군의 비유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고기잡이로 먹고 사는 갈릴리 사람들이라도 그 정도의 상식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부에게 농사짓는 일이란 관심 밖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투덜대며 발길을 돌렸을 것입니다..
II. 두 번째 열쇠 “성경 해석과 깨달음” (10-2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11)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주를 따르는 사람들과 열 두 제자들만 남아서 비유의 뜻
을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한다’ 하셨습니다. 아마 돌아간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 들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시대고 하나님은 항상 자기의 말씀을 들을 사람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바알신으로 가득한 엘리야의 시대에도 칠 천명을 보전하셨으며 바울의 가르침을 받던 아시아의 제자들이 모두 떠났어도 말씀을 사모하는 빛의 아들들을 준비하셨습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비유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사야 6장의 말씀으로 이사야가 주로부터 소명을 받을 때 받은 말씀입니다. 그 당시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을 내세워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만 벌려 놓고 왕이 죽자 개혁의 선봉에 섰던 이사야는 절대절망의 상태에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를 보게 됩니다. 이 때 이사야는 자신도 백성들과 동일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소명감에 불타 도리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죄하는 범죄를 지었던 것입니다(사5-6장 참조)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신 주님의 의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사야로 하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때에 스스로 성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1. 비밀과 비유의 뜻
여기서 ‘비밀’(musterion) 이란 신비 속에 감추어진 계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나사렛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비유’란 말의 어원은 ‘배가 항구에 도착하다’ 다시 말해서 갈 데까지 다 갔다는 말입니다. 또한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 옆에 나란히 놓은 물건과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유사한 것일 수도 있고 서로 상극의 상태 즉 천적(天敵)일 수도 있습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하시며 비유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살펴 보는 씨 뿌리는 비유는 모든 비유를 해석하는 근간이 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2. 네 종류의 사람들
14절에서 주님은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말씀을 맡은 자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먼저는 예수님이시고 사도들이며 오늘날 복음사역에 헌신된 우리 모두가 포함된 말씀입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말씀을 마태는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길가에 뿌리운 자요”(마13:19) 라고 기록 하였으며 누가는 동일한 내용을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8:12) 기록하였습니다.
같은 말을 두고 성경의 저자들이 각각 다르게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누구의 기록이 진짜 주께서 하신 말씀이냐를 가리는데 시간을 허비하려 합니다만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은 모두 동일한 해석으로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어디에 비중을 두었느냐에 따라 그 적용이 달라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마가는 말씀과 사단과의 관계에 비중을 둔 것이며 마태는 말씀의 깨달음에 비중을 두었으며 누가는 구원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의 불변성 속에서 상황을 따라 달리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비유 속에 언급된 네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말씀을 들은 자들로서 오늘날 우리와 같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가에 있는 사람은 당신일 수도 있고 돌밭에 있는 사람은 나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듣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말씀을 대하는 상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성경 해석의 원칙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비유를 해석하신 말씀을 통해서 성경해석의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길가에 씨를 먹어 버린 새에 해석하여 마가는 ‘사단’이라 기록하였고, 마태는 ‘악한 자’ 누가는 ‘마귀’라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계시록에서 다시 보게 되는데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12:9)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공중의 새’와 ‘용’과 ‘뱀’은 ‘사단’과 ‘마귀’ ‘악한 자’를 지칭하는 동의어가 됩니다. 이러한 해석의 원리를 우리는 성경해석의 일관성이라고 합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 두 번째 원칙은 어느 단어나 어휘를 해석할 때 그 해석의 기준은 그 단어나 어휘가 성경에서 제일 처음 언급된 말씀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에 관한 것은 창세기 1장 1절에 기록된 ‘창조’를 기준으로 하여야 하며 ‘믿음과 의’는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를 또한 ‘은혜와 언약’은 창세기 9장의 노아에게 내리신 ‘은혜와 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그 어원적 해석을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해석의 세 번째 원칙은 성경 전체의 문맥을 따라 관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거두절미하고 어느 한 부분을 떼어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해석의 오류는 대부분 이 부분에서 잘못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이 성경전체를 조명하지 않고 한 두절을 도려내어 아전인수격인 해석과 적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 순서와 문맥을 따라 관찰해야 합니다.
만약 누가 이러한 해석의 원칙을 무시한다면 성경은 각 사람의 지식과 생각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최근 성경에 어려운 부분들을 제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해석하며 자신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음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베드로는 무식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을 당하였다 하였습니다.
4. 말씀의 숙성 훈련
두 번째로 주님은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곧 넘어지는 자요’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마가와 마태는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게 ‘환난과 핍박’의 때가 필연적인 것을 암시하였고 누가는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라 기록하여 믿는 자들에게 ‘믿음의 시험’은 필연적임을 암시하였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숙성되기까지는 내적인 갈등과 외적인 유혹이 따를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부르신 사람들에 대한 성경적 기준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터 다윗에 이르기까지 주 앞에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모두 시험의 기간이 있었으며, 또한 예수께서도 사단으로부터 말씀의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몇 년 전 미국 갈보리채플 목회자 컨퍼런스에 참가했었습니다. 그때 척 스미스 목사님은 본문을 50번 이상 읽지 않으면 설교할 생각을 하지 말라 하시며 잠을 자는 동안에도 말씀을 묵상하라 하셨습니다. 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만 최근 내 머리 속에서는 잠을 자는 중에도 말씀과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직 완연하게 헤아려지지 않는 말씀의 비밀이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유혹과 마음의 조화
세 번째로 주님은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된 일 단계와 이 단계를 모두 통과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착실하게 성경공부를 한 성도들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오늘날 우리를 지칭하는 말씀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어 넉넉한 믿음으로 은혜의 삶을 살 수 있는 말씀의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세상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종용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아가는 문제들 그리고 재물의 매력과 세상의 향락들은 늘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이러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말 복 받을 사람입니다.
주님은 제자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귀하냐’(눅12:24)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디 까마귀를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비둘기처럼 선한 삶을 위한 경계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8)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일곱교회 중 가장 끝에 나오는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6. 말씀의 토양
주님의 네 번째 비유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마태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라 기록 하였고 누가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을 하는 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마가는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데 비중을 두었고 마태는 깨달음에 비중을 두었으며 누가는 사람의 선한 마음과 인내에 그 비중을 두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된 네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지금 주님은 믿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복음과의 관계를 갖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믿는 자들을 염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씨 뿌리는 자에게 있을까요. 아니면 듣는 자들의 태도에 있을까요. 만약 씨 뿌리는 자가 말씀을 뿌린 것이라면 그 책임은 듣는 자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잘못된 말씀을 전하였다면 그들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저들이 지식의 열쇠를 갖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며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다 하셨으며 또 저희가 바다를 다니다 사람을 만나면 저희보다 더 악한 지옥의 아들로 만든다 하셨습니다.
III. 세 번째 열쇠 “Ministry” (21-25)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24)
주님은 21절에서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하셨습니다. 세상에 등불을 그릇으로 씌워 두던가 침대 밑에 두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가는 “이는 들어 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8:16)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집에 세운 등불 즉 복음의 일군들을 가리키신 말씀입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드러내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 사역자들과 관련된 모든 것은 다 밝히 드러내기로 작정되어 있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다’ 기록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가르친 모든 진실과 모든 교리들의 흑백은 곧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1. 입력과 적용의 중요성
흥미롭게도 주님은 23절에서 또 다시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말씀하셨습니다. 9절에서 씨 뿌리는 비유와 함께 말씀하신 후 여기서 다시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이 기록된 두 단락을 엄밀히 살펴 볼 때 이 말씀의 대상이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자는 말씀을 듣는 자들을 향한 것이고 후자는 말씀을 뿌리는 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후자의 말씀은 오늘날 목사들을 향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셨습니다. 누가는 이를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마가는 입력(Input)에 비중을 두었고 누가는 적용(Application)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들었는가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 성경공부의 연속성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집안에 세우신 등불 즉 복음의 일군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할 때 복음을 맡은 우리는 심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네가 목사가 되기까지 무엇을 들었으며 또 어떤 해석을 들었는가를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 증거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세미나가 열리고 인터넷을 열면 수많은 설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특별한 행사를 하는 교회나 기도원 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저희를 향하여 바울은 ‘저희가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룰 수 없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유명 목사의 설교 원고를 그대로 발췌하여 사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수 만장의 설교 CD를 들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준비해 주셨다고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오늘과 같은 인터넷 시대에 더 이상 필요도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천사가 하늘을 나를 것이라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IV. 네 번째 열쇠 “성장 프로세스” (26-29)
“저가 밤낮 자고 깨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27)
오늘 이 말씀은 우리의 깊은 사고와 이해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는 복음의 원리를 말씀하신 것으로 땅에 뿌려진 씨는 뿌린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이 스스로 자라는 속성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씨를 뿌리는 자의 인격과 관계없이 스스로 자생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택하심과 부르심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비밀을 언급하신 것으로 만약 이러한 원리가 없다면 엘리 제사장 밑에서 사무엘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비의 죄가 자식에게 미치지 않는다 기록하였으며 계시록에 기록된 여섯 교회들이 모두 다른 길로 나아 갔어도 주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우리 중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주님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성장 프로세스를 설명하신 것으로 밥을 많이 먹고 공부를 많이 했다 하여 소년기를 거치지 않고 청년이 될 수 없는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비행기 안에서 뛴다고 더 빨리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교회성장 프로그램에 대해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씀으로 교회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목회자들의 생각을 새롭게 일깨워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교회가 인간의 노력과 프로그램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생각과 계획으로 창조자의 키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네가 염려하므로 키를 한치라도 크게 할 수 있느냐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주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교회를 성장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맡기신 성도들에게 성경의 모든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참조 엡4:12).
오늘 이 말씀을 읽을 때 두려워지는 것은 땅에 뿌려진 모든 씨는 추수 때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추수와 관련하여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라”(마13:38-39)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추수의 목적은 충실한 이삭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하였습니다(고전3:13-15 참조).
나는 갈보리 채플로 전향한 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한번 살펴 보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사십에 시작한 나이가 이미 오십의 중턱에 앉아 있으면서도 아직 변변한 가지 하나 내지 못한 초라한 모습이지만 곧 다가 올 주의 날을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지금 생각하니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온전히 살펴 보지 못한 채 목회를 하겠다고 했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께 오시면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열매를 보시겠습니까. 과연 누룩으로 부풀어 죄의 온상과 같이 된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겠습니까.
V. 다섯 번째 열쇠 “예언의 성취”(30-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34)
주님은 30절에서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에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잎만 무성한 나무를 보고 안타까워 하며 주의 날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비록 사람 눈에 보이지 않은 겨자씨 한 알이 땅에 심기웠을지라도 땅 위의 모든 나물보다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에서 성취될 주님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말씀이 속히 우리 중에서 성취되기를 소망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합3:17-18) 노래하였습니다.
마가는 34절에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78편 2절의 말씀으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그의 나라를 위한 예언의 말씀이며 모든 말씀은 우리 가운데서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VI. 여섯 번째 열쇠 “믿음의 실제” (35-41)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40)
천국의 비밀 마지막 문단은 바다 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5장에서 보게 되겠습니다만 흥미롭게도 갈릴리 바다 저편에는 군대귀신 들린 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36절에서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라 기록하여 이 사건이 천국의 비밀을 선포하시던 날 저녁의 일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앞에서 언급된 천국의 비밀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결과에 해당하는 말씀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탄 제자들의 배는 갑자기 일어난 광풍으로 풍전등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열
두 제자들의 태반이 어부 출신인데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던 모양입니다. 제자
들은 황급히 배 뒤 편에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 보지 아니하십니까” 하고 외쳤습니다. 이에 주님은 깨어 일어나 바람을 꾸짖
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마치 사람을 대하듯이 꾸짖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
다. 이러한 내용은 복음서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성경의 미스테리입니만
이로서 우리는 천지만물이 모두 주께 속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이 땅의 모든 물체는 그 뒤에 본질적인 어떤 능력의 존재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고대로부터 사람을 미혹하던 이단사상입니다.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대적하는 사단의 역사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와 함께한 사람들에게도 풍랑은 거침없이 불어 온다는 사실과 영혼의 구원을 맡은 교회는 폭풍의 바다를 통과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자이심을 믿고 있었다면 그들은 천지만물이 그에게 속한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신 후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습니다. 이론 강의가 다 끝나고 실습을 나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을 심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말씀들과 같이 성취될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으므로 동남풍이 불던 서북풍이 불던 배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여 주의 말씀의 능력이 제자의 삶 속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믿음과의 역학적 관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증거하였습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때 우리가 오늘날 무엇을 들으며 또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믿음의 중추적 토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만한 믿음이 없는 것은 성경에 기록하신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원인은 하나님의 집안을 밝히기 위해 세운 등불들이 그 맡은 바 직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주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잘못된 관행의 틀에서 스스로 벗어나와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귀를 기울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히브리 사람들에게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라’(히5:12) 기록하였습니다. 이제라도 발길을 돌려 말씀의 제자에게 주신 믿음으로 세상의 파도를 제압시키는 능력의 종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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