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3장) 복음의 혁명(Paradigm Shift 2)

이요나 2007. 2. 23. 17:19

(마가3장) 복음의 혁명(Paradigm Shift 2)

 

(막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와 모친이니라

 

마가복음 3장은 복음의 혁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혁명이란 개혁과는 또 다른 의미로서 (種)의 갱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각처에서 개혁에 관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만 누룩이 든 떡 반죽 그릇에 하얀 가루를 계속 붓는다고 해서 그 반죽이 온전해 질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가복음 3장은 2장에서 언급된 의식혁명의 실행 키(key)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볼 마가복음 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세계로 전환 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황과 메시아를 갈망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를 위해 세우신 열 두 사도와 함께 나타난 종교적 마찰과 영적 갈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복음혁명의 핵심 내용들이 기록되었습니다.

 

3장에는 네 부류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람들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로 스스로 거룩한 존재로 구별한 자들이며 두 번째 무리들은 죄와 질병과 귀신들에게 사로잡혀 오직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는 사람들이며, 세 번째 무리는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시대를 열어가는 소수의 제자들이며, 네 번째 사람들은 예수님과 혈육적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 복음의 가족이 되지 못한 친속들입니다.

 

또한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종교적 그룹이며 다른 한 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혈연적 그룹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속한 그룹이 이분법적 논리 속의 종교적 그룹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혈연적 그룹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I. 혁명의 요구(1-12)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3:4)

 

3장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로 사람을 의인과 악인으로 정죄하는 유대인의 종교적 행위를 책망하신 것으로 날이 갈수록 종교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 교회들도 깊이 생각해야 할 중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2장에서 주님은 이미 유대인들을 향하여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셨으며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며 종교적 교리로 정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꾀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개혁할 수 없는 종교적 속성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태 속에 흥미롭게도 유대와 예루살렘 그리고 이스라엘 변방인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 두로와 시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앞으로 나아 오고 있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질병과 악귀에 둘려 신음하며 죄 된 인간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유대 종교에 의해 죄인이라 분류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죄의 멍에 속에서 오직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구원자를 고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귀신들도 어느 때고 예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으며 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종교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는 오히려 사람들 속에 살아 있는 선한 양심을 죽여 그 영혼으로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게 하는 신학적 도그마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많은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벗어나 종교적 관계를 수립하는데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II. 혁명의 주체(13-35)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3-15)

 

열왕기하 2장에는 엘리야 시대를 마감하고 엘리사의 새로운 시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역은 여리고 성의 수질(水質)을 바꾸는 일로 시작됩니다. 그 성 사람들이 나아와 이 성은 터가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청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 명한 후 물의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던지며 여호와께서 이 물을 고치셨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혁명은 새 그릇의 준비하는 단순한 원리로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 예정하신 복음의 시대를 열어 가기 위하여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 중 열 둘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열 둘이란 개념은 창조로부터 낮과 밤과 연월을 나누신 것과 같이 창조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통치 질서로서 열두 사도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예정섭리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주권이었습니다.

 

1. 두 가지 목적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에 대하여 함께 있는 것  보내기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함께 있다는 것은 공동체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로서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거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과 그의 계획과 그의 생활과 함께 거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공동체의 금기는 분쟁과 분열로서 이것은 이단의 발생 원인으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범죄한 사람들 마음 속에 내재된 악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이단에 대하여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 증거하였습니다.

 

주께서 열 두 제자를 세우신 두 번째 목적은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히3:1)이라 칭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었다(요17:18) 말씀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가 복음의  주권을 갖고 있는 것이며 또 그의 나라를 위하여 사도를 보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두 가지 임무

또한 주님은 열 두 제자를 보내실 때 두 가지 임무를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전도’이며 다른 하나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전도를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최근 많은 사역자들이 치유목회를 말하며 마치 복음의 목적이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는 일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귀신과 질병에 신음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만 사역의 목적은 전도이며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를 방해하는 귀신의 세력을 쫓을 수 있는 권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을 주셨다 하지 않고 권세도 있게 하였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이 주님께 속한 주권적 권세임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쫓는 능력이 마치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하셨습니다.

 

III. 인격혁명(16-19)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막3:16-18)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세우시며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이름을 바꾸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름을 더하셨다’는 데 그 의미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개명(改名)이라 함은 ‘인격의 갱신’을 말하는 것이 되지만 이름을 더했다는 것은 그에게 ‘부족한 것을 채운다’는 의미로서 ‘인격의 보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복음 사역자의 인격혁명을 요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어 주신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본인의 고유의 이름 외에 다른 별명을 지어 주신 것이 아니고 이름을 개명(改名)하신 것입니다.

 

이들의 개명(改名)은 그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을 때 또한 그들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없다는 쓰디 쓴 경험을 한 후에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의 이름을 바꾸신 것은 사역자의 인격적 갱신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개명하신 이름에는 성령을 나타내는 히브리 문자의 ‘H’ 발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거듭남의 역사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물질 지향적 속성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언행을 통해 베드로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시세말로 B형 남자입니다. 현대 여성들이 왜 B형 남자들을 싫어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나를 비롯해서 내 주변의 B형 남자들의 성격을 살펴보니 정말 못 말리는 성격입니다. 한마디로 즉흥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이율배반적이며 거기다 감정적으로 충동적 도전과 모험을 즐기는 대책 없는 성격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를 따라 메시아 왕국에 대한 도전적인 꿈을 갖고 예수께 나아가 주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고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 왔지만 곧 복음사역에 흥미를 잃고 함께 부름 받은 동업자들을 이끌고 다시 고기잡이를 나섰습니다. 마음의 욕망을 채우는 물질적 풍만함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자기 중심적 현실 만족주의자였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동료들과 고기잡이를 나가 밤새도록 허탕을 치고 돌아 왔을 때 예수께서 그의 배에 오르셔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하겠습니다 말하고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예수께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참으로 행동의 반전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베드로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자 하실 때 베드로는 나의 발은 절대로 씻길 수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시자 ‘내 머리부터 발까지 씻겨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 말씀하실 때 나는 죽을 지언 정 절대로 주를 떠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하였지만 주께서 잡히시자 그는 곧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 순간적인 포착을 하는 기회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목사들 가운데서 이러한 성격이 많이 발견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충동적 도전 속성

복음서에는 베드로에 관한 흥미로운 사건이 두 가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던 날 밤 베드로는 주께서 바다 위를 걸어 오시는 것을 보고 ‘주여 만일 주이시면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청하여 바다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충동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입니까? 그러나 베드로의 모험은 사역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비를 향한 충동과 모험 심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주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상에 올라 갔을 때 그들은 주께서 변하신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주여 우리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을 셋을 지어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넋을 놓고 졸고 있을 때 베드로는 비몽사몽 중에서도 신비의 세계를 이 땅에서 실현코자 하는 도전장을 제출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황당한 발상입니까?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도전적인 믿음의 모험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무어라고 부르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답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시며 다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유대인의 혈통적 교리체제가 아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의 인격 위에 세워질 교회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간의 충동적인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다 위를 걷고 하늘의 신비를 끌어내리는 충동적 모험과 도전 정신을 갖고 있다 하드라도 그것으로 복음의 나라는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출세 지향적 속성

주님은 사도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에게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이 두 형제는 그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던 중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아버지와 삯군들을 버려두고 주를 따라 나섰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위대한 믿음입니까? 그들은 정말 대단한 결단의 소유자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던지던 중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말씀을 듣고 감동되어 예수님을 따른 것이지만 야고보와 요한은 다음 출행을 위한 준비를 하다가 주의 부름을 받는 순간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쫓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은 그 아버지의 가업 즉 고기잡이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복음을 향한 불타는 욕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의 어머니가 주께 나아와 두 아들의 출세를 위해 간언한 것으로 보아 두 형제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사려 됩니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의 어머니의 권고와 기도로 헌신한 경우가 많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성격은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느 날 요한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으로 보고 그 일을 못하게 하였습니다(막9:38). 또한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 하게 되었을 때 예수께 많은 은혜를 입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려 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은 주께 나아가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하리까’ 물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명예욕에 불타는 성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와 함께 주께 나아와 주께서 영광 중에 임하실 때에 자신들을 오른편과 왼편에 세워 달라고 말하며 그들은 예수께서 받으실 죽음의 세례에도 동참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참으로 의리의 사나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성격은 정치적 성향이 강한 혁명가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업가들은 여러 가지 정황 속에서 자신의 실리를 취하기 위해 몸을 사리다가 기회를 포착하면 사자와 같지만 달려들지만 혁명적이고 정치적 야망을 가진 사람은 명예와 명분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 버립니다.

 

사도 야고보의 불 같은 성격은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 때 바로 나타났습니다. 모난 돌이 먼저 정을 맞는다는 말과 같이 야고보는 사도 중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다가 잡혔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불 같은 성격이 야고보로 하여 순교의 선두에 나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순교를 하는 것이 주의 뜻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육신을 떠나 주께 가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나 육체로 살아 있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내던져 주의 일을 하였다 하드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무익한 객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지혜를 깨달은 사도 요한은 그의 형 야고보의 순교 후 사도들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살아서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4. 복음의 타이밍

여기서 우리는 ‘우뢰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뢰’는 천둥과 함께 내려치는 번개입니다. 천둥과 번개는 서로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 속에 담긴 메시지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여 복음의 타이밍을 의미한 것입니다.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우리를 주의 영광 중에 오른편과 왼편에 세워달라 했을 때 너희가 나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사역이 인간의 의지와 마음의 결단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후일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증거하였습니다.

 

오늘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은 의협심에 불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땅의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때를 따르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언행 때문에 복음사역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합리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다윗은 말과 나귀는 굴레와 멍에로 제어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부름 받은 사역자들은 말처럼 달려 가는 속성과 나귀처럼 나아가지 않는 속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IV. 복음의 승리(29-35)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 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23-27)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 속에 나타난 이적들을 보고 예수를 가리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집혔다고 말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해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음사역과 함께 나타날 영적 마찰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그의 보내신 사도들이 가룟 유다와 같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기 위하여 경계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실 때 종종 은유법과 대유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요철(凹凸)과 같은 예언의 이중성을 깊게 고찰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하여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물질세계에 공존해야 하는 영적 세계의 지도자들 즉 복음의 일군들이 자신의 소욕과 마음을 억제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거듭남이 성령에 주권적 사역이라 할 때 성화(聖化)의 역사는 우리의 의지가 함께 하여야 함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주님은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선언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일군으로 합당한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고집과 아집과 세상을 향한 거센 욕망을 결박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 된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더하신 베드로보아너게의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도록 하십시다. 주의 평안하심이 부르심을 받은 이 땅의 모든 동역자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