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2장) Paradigm Shift (1)

이요나 2007. 2. 23. 17:21

(마가2장) Paradigm Shift (1)

 

 (막2:21-2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인도를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는 여성의 성차별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며 패미니즘 운동이 조심스럽게 확대되고 있으며 체첸을 비롯한 소수 민족들은 정치적 혁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미 문화혁명을 주도했던 중국은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정치 사회 여러 부분에서 진보와 보수의 충돌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의 바람은 마치 임신한 여인에게 이를 해산의 날과도 같아서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격돌하며 밀고 당기는 사이   찢어지고 찢기는 처절한 투쟁 속에서 민중의 합의를 이끌어 낼 것입니다. 이러한 충돌은 이 지구상에 선과 악이 존재하는 한 끊이지 않는 해산의 고통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진보 세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고는 보수 세력의 끊임없는 충돌 속에서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고 문화를 창출해 왔습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인류의 새로운 장을 창출하기 위한 문명의 충돌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보고자 하는 마가복음 2장에는 복음의 시작과 함께 나타난 기존세대의 거부 반응과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신세대의 개념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립은 인류의 역사 속에 야기된 종교적 이념과 정치적 사상의 충돌을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진리의 복음을 완성하는 합리적인 의식전환(paradigm shift)의 실행 키(key)가 3장과 4장에서 정의 되고 있습니다.

 

I. 복음의 균형원리

“생베 조작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리라”(21절)

 

주님은 율법시대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는 기존 세대를 향해 ‘새 천 조각과 헌 옷이 서로 조합하지 못하며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 ‘균형과 보전의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살펴 볼 ‘새 천 조각과 헌 옷이 서로 화합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복음의 두 가지 속성 즉 ‘미래지향적 속성’과 ‘균형의 속성’을 함께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베’란 아직 옷감으로 가공이 되지 않은 상태이며 또한 낡은 옷은 옷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떤 것이 서로 합하려 한다면 먼저 그 조직의 밀도가 같아야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설혹 같은 재질이라도 서로가 화합하기 위해서는 같은 조건을 충족하는 시행과정과 인식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의 의도는 이미 낡은 옷에다 새 천을 깁는 시대는 지났음을 시사하신 것입니다. 낡은 옷은 새 옷이 없을 때 입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이방 선교의 전초지 안디옥 교회에 발생된 문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이 개척한 교회로서 그곳에서 크리스천이란 말이 탄생되었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온 믿는 유대인들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모세의 할례를 받지 못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로 하여 바울과 그들 사이에는 커다란 논쟁이 일어나 결국 이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회의에 상정되어 장시간 논쟁 끝에 ‘복음을 위해 주께서 너희 중에서 나를(사도) 선택하셨다’는 베드로의 사도권 선언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처 복음에 대한 합리적인 의식전환을 이루지 못한 유대인들이 ‘은혜의 복음’과 ‘모세의 율법’을 함께 조화시키려던 시도라고 하겠습니다.

 

오랜 세월 모세의 ‘율법의 옷’을 입고 살던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옷’으로 갈아 입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해진 옷을 새 천 조각으로 기우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 천 조각은 조직 밀도가 약해진 헌 옷을 잡아 당겨 옷을 망가트리고 말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마치 카톨릭 의전(儀典)으로 회귀하려는 듯 화려한 강단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로운 교리들을 하나씩 덧붙여 또 다른 교파를 만들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누더기로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미 ‘애굽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 도모가 파하신 바 되었다’ 하였으며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기록하였습니다. 믿는 자녀들을 애굽으로 다시 돌리지 않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창조자의 지혜를 발견하는데 있어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II. 복음의 보전원리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2절)

 

예수께서 두 번째로 제시하신 복음의 원리는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에 대한 비유입니다. 새 술은 숙성의 과정 속에 발효가 남아 있어 숙성이 완성될 때까지 스스로 가스를 방출하여 공기의 압력을 팽창 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탄력이 없는 낡은 가죽부대는 터지고 맙니다. 이것은 보전을 위한 융통성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기존 사고의 옹졸함으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수 없음을 시사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새롭게 변화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이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혐오의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식의 모순’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 새로운 생활방법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치를 먹던 사람이 치즈와 버터로 살아야 할 때 나타나는 금단현상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인식(認識)의 틀 안에 고정관념(fixed idea)의 성을 쌓고 안주하려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고정관념은 선택된 코드의 인식 속에서 평안을 추구하는 인간의 귀착본능에서 출발합니다. 누가는 사람들의 이러한 성질에 대하여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5:39) 기록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상반된 코드가 서로 맞지 않으면 서로를 거부하게 되고 그 대립은 기류의 포화 상태를 일으키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류 현상은 유기적이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 오늘의 개혁세력은 내일의 기득층으로 전락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속성은 인간의 미래를 향한 이상적 사고를 봉쇄하고 부패와 타락의 원인이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사사들이나 더 나아가 다윗과 솔로몬과 같이 충성스럽고 위대한 왕들이 타락하게 된 이유도 여기서 기인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도록 예비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따라서 그 복음의 성취는 말씀과 성령의 교감 속에서 끊임없는 믿음의 모험과 탐구의 열정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히11:8) 하였습니다. 또한 야곱은 죽음의 침상에서도 그 오른 손의 지팡이를 놓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아들 요셉을 축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경륜은 최고의 면류관을 얻기까지 달려나가는 순례자의 길입니다. 그것을 멈추려는 것은 기압의 상승 원리를 무시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사고를 갖은 사람은 결국 쌓아 놓은 그 모든 것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앞에서 언급된 복음의 속성들을 생각하며 유일하게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메시아로 더불어 천년왕국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용납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들을 살펴 오늘날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복음의 활동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문둥병으로부터의 탈출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7절)

 

마가복음 2장 서두에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중풍병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온몸이 마비되어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생활 할 수 없는 의식과 감각을 상실한 고약한 병입니다.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풍병은 살아 있는 송장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수많은 군중들로 하여 도저히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중풍병자 일행은 지붕을 뚫고 병자의 침상을 예수 앞에 내려 놓았습니다. 주님은 중풍병자 일행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중풍병자와 그 일행들은 예수께서 구원의 실체이심을 알고 나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향해 나갈 때 발생하는 가장 큰 장애는 무지(無知)와 불신(不信)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확신이 있다면 그 장애를 뛰어 넘는 것은 극복의 수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미 그 집에 들어가 있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하며 서로 얼굴을 보며 마음으로 의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말씀에 대한 의심과 도전을 서슴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어찌 하여 마음에 의논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아 가라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어느 것이 더 완전한 것이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너희는 완전한 것과 불안전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느냐는 책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바리새인과 중풍병자를 놓고 생각할 때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것을 먼저 알아야 할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중심에 선 종교적 대표 그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알아야 할 필요성 조차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만에 빠져 새로운 지식을 감각하지 못하는 중풍병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당신이 성경의 말씀 속에서 복음의 실체를 만나지 못한다면 당신 역시 복음의 중풍병자입니다. 당신에게 있어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도 모두 그림의 떡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의심의 지경을 넘어 믿음의 모험을 하게 된다면 당신은 구원의 영광을 주께 돌리는 복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2. 이분법적 사고로부터의 탈출

“예수깨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절)

 

바리새인들의 두 번째 질문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세관원들은 로마정부의 앞잡이로서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오늘 주님을 초대한 사람은 제자로 부름 받은 세리출신 마태로서 그 부르심의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해 식탁을 준비했습니다. 그것을 본 유대인들이 제자들에게 시비를 건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식탁을 성스럽게 생각하여 이방인이나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의식은 갈라디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의 전초지인 안디옥 교회에서 그곳의 형제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갑자기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그 식탁을 떠났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안디옥 교회 지도자 바나바에게 까지 미쳤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을 면전에서 책망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리새인들의 시비의 본질은 어떻게 죄인 된 세리가 복음의 제자로 부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죄인과 의인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함께 선택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의 잣대로 죄인과 의인을 구분하였습니다.

 

바래새인이란 구별된 그룹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출신과 배경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의 모든 사람은 평등한 것입니다. 더욱이 죄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인간이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후 그 죄를 깨달았을 때 ‘내가 하나님께만 범죄하였다’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각계각층에서 출신과 배경을 따라 사람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까지도 이 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무리 인재가 출중해도 출신과 배경이 다르다면 등용되지 못하는 고정관념은 이제 벗어버려야 할 복음적 의식전환입니다.

 

3. 종교의식으로부터의 탈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가”(18절)

 

바리새인들의 세 번째 질문은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입니다. 이것은 종교의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금식은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나타내는 경건생활 중 하나로서 유대인들은 매월 주기적인 금식을 자랑으로 여겨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주님은 “혼인집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을 할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금식을 중요시 하지 않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관습적인 종교의식을 경계하신 것이며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지금은 나와 함께 기뻐할 때’임을 시사하신 것입니다.

 

나는 가끔 젊은이들과 산상집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나눌 때가 있습니다. 함께 주를 찬양하며 말씀을 살피며 맛있는 식사와 또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을 나눕니다. 그런데 그 중에 금식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목적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는 축제의 기쁨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의식(儀式)에 빠져 예배의 본질을 상실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일에 빠져 진리를 외면한 마르다 보다 주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마리아의 선택을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성경 가르침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의식을 과도하게 조장하는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 것은 지금은 복음과 함께 기쁨을 함께 나눌 때라는 것입니다.

 

III. 복음의 종교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4)

 

끝으로 우리가 살펴 볼 말씀은 복음의 교리화 즉 교회의 종교화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종말을 사는 우리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네 번째 질문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안식일은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거닐다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율법적 항의를 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다윗이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할 제단에 드린 떡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먹었던 실화를 들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에 대한 규제는 매우 엄격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유대교의 경전인 탈무드를 만들었습니다. 만약 누가 넘어져 손목이 다쳤어도 안식일에는 치료행위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며 너희가 안식일에도 할례를 주며 구덩이에 빠진 가축을 꺼내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부르신 그의 백성들이 주님께 나아가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은 그의 거룩한 안식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미쁨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안식일을 위해 주신 제반 율법들은 효율적인 은혜의 동참을 위한 것이지 백성들의 생활을 구속하고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뵈러 갈 때 교통법규를 염려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 나갈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관한 많은 규제들을 만들어 성도들로 안식일에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들을 마음을 주관하는 것은 주의 말씀이 아니라 안식일을 규제하는 율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종교로 만든 원인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날이 갈수록 종교화되고 있습니다. 종교화 된다는 것은 교회가 은혜의 복음을 떠나 교리화 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들은 날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고 성도들은 그 일에 매어서 일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말씀 속에서 주를 만나고 성도의 교제 속에서 주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많은 일과 규제들이 성도들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도들은 일의 노예가 되고 그 일을 주관하는 자들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상실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미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 아무것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묶고 있는 사슬을 훌훌 벗어 버리고 안식일을 주인께 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식을 주인께 돌려 드리는 첫 번째 시도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여러 가지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의식전환(paradigm shift)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막고 있는 잘못된 지식과 의심의 장애를 뛰어 넘기 위해 주께서 계신 지붕을 뚫어야 할 때입니다. 신년의 시작과 함께 당신의 모든 생각과 삶을 당신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관하시기를 기원합니다. 3장에서 뵙겠습니다. 모두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