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1장-1) 복음의 시작과 영적전쟁(1)
(마가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는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기록하였습니다. 간단 명료하고 단순한 문장입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출발의 근원을 제시하는 이 말씀은 하늘의 신비 속에 감추어진 신적 비밀을 여는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함께 인간으로 접근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 하늘에 속한 신적 지식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황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만약 누가 이 말씀을 받아드릴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구원의 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하늘나라의 출입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란 ‘엘로힘’은 복합 단수명사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신 창조자의 직함을 언급한 칭호이며. ‘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성육신 하신 예
수 그리스도를 칭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아들’이라는 의미 속에 하나님도 인간과 같은 혈족관계를 갖고 계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아니시므로 아들을 낳거나 아내를 거느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인간에게 설명할 때 ‘신의 의인화’ 즉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그 시작에서 항상 하나님의 ‘본체론’(ontology)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천상천하 최고의 아름다운 칭호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슈아’의 헬라어 번역으로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의 아름다운 이름에는 ‘그리스도’라는 직임적 칭호가 부여되었는데 이것은 구약의 ‘메시야’의 헬라어 번역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복음’은 원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수여되는 상급을 말한 것으로 그 말 자체가 ‘기쁜 소식’이란 의미가 되었습니다. 또한 여기서 언급된 ‘시작’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시간들을 포함된 것으로 이 속에는 창조로부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을 포함하여 우리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날에 동참한 모든 믿음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짧은 말씀 속에는 창조자 하나님에 관한 신적 속성과 그의 뜻 안에 예정된 모든 비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과 함께 나타난 영적전쟁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l 복음은 무엇을 예비하고 있는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2-4)
이 말씀의 주제는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입니다. 또한 ‘너희’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이르기까지의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역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살피는 우리의 관심은 주의 길을 위하여 ‘무엇을 예비할 것인가’에 있겠습니다.
수세기 동안 교회들은 주의 복음을 위하여 예배와 전도와 봉사와 구제를 펼쳐 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크게 부흥되었고 그 위상은 세상 가운데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기록된 것과 같이’라는 마가의 주석입니다. 마가는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 삶 속에서 성취되고 있는 성경기록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며 오늘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재 인식입니다. 성경은 지나간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성취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 나는 신문지상에서 유럽연합 공동체 25개국 정상들이 로마에 모여 ‘EU헌법’ 제정 서명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유럽연합은 향후 2년 내에 회원국의 승인을 얻어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을 선출하여 거대한 주권국가로 군림할 것입니다.
이 사실들은 이미 다니엘서에 기록된 말씀으로 그 결말이 계시록에서 펼쳐져 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성경에 기록된 날을 향하여 빠른 속도로 질주해 오고 있는데 그 말씀을 맡은 교회들은 종교적 행위에 치중하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l 복음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5-6)
얼마 전 KBS 방송에 비춰진 한국교회 100년의 모습은 정말 세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성도 모두가 함께 회개하고 반성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마가는 여기서 세례 요한의 사역 가운데 나타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소개하며 세례 요한의 사역 윤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사역자 세례 요한의 생활태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사람 중 가장 큰 자’라 칭호를 받은 위대한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약대 털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꿀)을 먹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이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다윗 성전을 섬기던 스물 네 제사장의 가문 중 여덟 번째에 해당하는 아비야 반열의 후손으로 명문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가만히 자리만 지켜도 부드러운 옷을 입고 왕궁을 드나들 수 있는 실세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대털을 입은 세례 요한은 거룩함을 자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기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에덴동산으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한 죄인이라는 중대한 복음적 이슈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생활한 세례 요한은 이 땅의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사역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세습문제와 여러 가지 문제로 지탄을 받고 있는 교회 현실 속에서 이 말씀은 오늘의 목회자에게 다시 제시되어야 할 복음인 것입니다.
l 복음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7-8)
이 말씀은 어쩌면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에 대한 태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전도에 그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수세기 동안 크게 부흥을 하였습니다만 결국 교단 교파의 분열의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전도할 것이냐가 아니라 누가 전도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준비하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대유법(代喩法)을 사용하여 아주 중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주님은 ‘성령세례’와 ‘요한의 세례’를 대유(代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벽을 두드려서 대들보가 울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설명할 때 두 개의 사물을 대유(代喩)하는 이유는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최종 목적과 그 중요성을 한층 강조하여 듣는 자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할 때 사용하는 어법(語法)입니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는 가장 큰 이슈였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을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설교의 초점은 앞으로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에 관한 것입니다.
l 복음은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서 내려 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9-11)
마가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강까지 친히 오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침례)와 관련하여 요한이 증거한 ‘성령세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 것입니다.
‘세례’(baptism)란 물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종교적 의식으로서 이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상징적 의식이 될 수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받는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복음의 세계를 향한 출발선입니다.
주님은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7:29,30) 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세례’(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능력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약속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세례(침례)에 대하여 가벼이 여기는 풍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도 있으며 또 어떤 교회들은 성도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종교적 의식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기록된 세례 요한의 증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복음을 방해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사역을 살펴 볼 때 세례는 성령세례와 함께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어디를 펼치던지 성령세례는 항상 침례와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 나아가 세례를 베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친히 사도로 세움을 받았음에도 아나니아에게 인도되어 침례와 안수를 받음으로 그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주님을 친히 만나 사명을 받은 사도 바울이 일반 제자에게 침례를 받고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정말 그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또한 베드로는 이달리야대 백부장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전할 때 그들 위에 성령이 임함을 보고 꺼리김 없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흥미로운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이 그 지역에 사는 제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물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하였고 요한의 침례를 받았을 뿐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이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기록되었습니다(참조-행19:1-6).
베드로는 교회의 출발 앞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외쳤습니다. 이와 같이 세례(침례)는 믿는 자들에게 있어 구원의 증거이며 성령세례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례와 성령세례를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성경은 세례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베풀어졌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세례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부터 복음을 들을 때 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나아갈 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마3:15)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의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으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나는 이 말씀은 믿고 세례를 받는 모든 자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l 복음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 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2-13)
최근 많은 사역자들이 사역의 어떤 인증 과정도 없이 목회에 한판 승부를 걸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광야에서 사십일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말씀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는 사십 일이 의미하는 성경적 의미 속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보리 채플을 일으킨 척 스미스 목사님은 목사가 된 후 17년 동안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거듭 된 실패 속에서 터득한 것은 자신의 목회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성도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기 보다는 멋진 설교를 해서 위대한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척 스미스 목사는 오직 성경전체를 성도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기를 결심하고 성경 가르침을 최고의 목회전략으로 삼아 오늘날과 같은 강해설교의 명문 갈보리 채플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에 그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씀이 몇 마디 성경을 외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삼십 년의 세월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사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안다는 것은 신학을 했느냐, 어떤 대학을 졸업했느냐와 다른 맥락인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고 있느냐를 의미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역자들의 믿음에 대한 의지적 선택의 시험이라 하겠습니다.
성경은 부르심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일군들이 받은 시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다윗으로부터 사도들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역자들은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살기를 작정하였다면 지금까지의 실패는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전한다면 당신은 칭찬 받는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의 경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다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와 함께 나타난 영적전쟁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2005년도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한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에 복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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