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1장) 복음의 시작과 영적전쟁(2)
막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앞에서 우리는 ‘복음의 시작과 영적전쟁(1)’에서 복음의 시작과 함께 제시된 복음적 이슈와 오늘날 복음사역 과정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을 대비하여 보았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 1장 강해 두 번 째 시간으로 복음의 시작 가운데 나타난 복음사역의 우선순위와 복음 사역 속에 나타나는 영적 현상에 관한 전반적인 사건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첫 번째 우선순위 ‘복음선포’(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복음의 시대 개막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제1순위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주께서 선포하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메시지는 세례 요한과 제자들의 공통 메시지로서 이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세상을 향하여 선포될 ‘복음의 대주제’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음의 대주제인 복음선포는 날이 갈수록 교회 속에서 점점 그 열정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메시지는 지하철이나 백화점 앞에서 붉은 띠를 걸치고 십자가를 들고 외치는 이름없는 목사들의 구호처럼 인식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영혼 구원의 메시지가 잠식되고 있는 가운데 현대교회의 메시지는 교단적 이슈와 교회성장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영적 부흥은 멈추었고 성도들은 각 교회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의 기호에 따라 수평 이동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선포하신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복음선포는 세상을 향한 주님의 첫 메시지로서 죄인 된 인간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오는 유일한 천국의 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선포의 메시지를 분석해 보면 먼저 주님은 ‘때가 찼음”을 알리셨습니다. 이것으로 복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된 스케쥴인 것을 알게 합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세 번째로 주님은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
회개는 영적 자각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 앞으로 돌아 가게 합니다. 네 번째로 주님은 ‘복음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인간의 선택적 합리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가는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선상에서 조명한 것입니다.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같이 복음은 영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잡힌 후’라는 말씀 속에서 복음의 사역적 윤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복음의 시작과 그 완성이 모두 자신에게 있음에도 삼십 년을 가족과 함께 세상을 사셨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신 후에 광야에 이끌려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복음 사역의 출발에 있어서도 세례 요한의 사역과 충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 중 하나는 교회와 사역자들 간의 사역적 충돌로서 경쟁구조의 목회 현실 속에 휘말려 자기를 부르신 소명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직 복음사역의 경륜을 얻지 못한 젊은이들이 너무 성급하게 교회개척과 해외선교를 서두르고 있는 것도 커다란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이 성인이 되었다고 결혼을 서두르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2. 두 번째 우선순위 ‘제자사역’(16-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의 복음사역 제2순위는 ‘제자사역’입니다. 제자사역은 주님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주님은 3년간에 걸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복음을 가르치시고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마가는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3,14)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는 원리와 양육 방법과 부르심의 목적이 포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그 제자들을 모두 생활현장에 있던 보통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형제들은 물론 빌립과 나다나엘도 모두 갈릴리 어부들이었으며 세상에서 죄인이라 지탄 받던 세관원 마태도 현장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에는 많은 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율법학자들이 있었고 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같은 교파들의 대립 속에서 랍비학교와 같은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속에서 제자를 부르지 않고 생활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친히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단별로 신학교를 두고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가운데 매년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신학에 입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하여 시대적 변화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하면 목사가 되는 제도적 씨스템의 모순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만약 오늘날 모든 교회가 주께서 하신 방법대로 삶의 생활 현장에서 친히 제자를 부르고 가르쳐 복음의 일군으로 세운다면 매년 제도권 속에서 쏟아져 나온 수 천 명의 목사 후보생들이 갈 곳을 얻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은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강해설교를 통해서 전 세계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 갈보리채플의 수많은 목사들은 대부분 자유 분망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척 스미스 목사의 메시지를 듣고 회심하여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복음의 제자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학교나 일반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출신과 학벌을 시비 삼아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의심하기도 합니다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오직 성경에 기록된 복음을 가르칠 뿐입니다.
3. 세 번째 우선순위 ‘가르치심’(21-22)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 세 번째 우선순위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14절에서 언급된 ‘복음전파’와 또 다른 맥락으로 우리가 다시 살펴 보아야 할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거하여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4:23)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사역적 방향을 세부적으로 나눈 것으로, 여기서 ‘전파’(preaching)란 복음의 주제와 속성을 대중에게 선포하는 설교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는 메시지는 세상을 향한 포괄적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기록된 ‘가르치다’(teaching)는 그 어원이 ‘제자를 삼다’, ‘지식을 주다’, ‘훈련하다’ 와 같이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강해설교’를 의미합니다.
마가는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랐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영적 반응을 언급한 것으로 여기서 ‘교훈’이란 성도의 삶에 필요한 성경의 지식을 말합니다. 그 당시 회당은 회당장의 주관 아래 서기관들이 상주하여 랍비들에 의해서 제정된 탈무드를 갖고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도들의 종교적 생활규범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이라’는 말씀은 주님의 메시지는 서기관들과 전혀 내용이 다른 주권적 지식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시자 ‘이는 새 교훈이다”하며 놀랐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속에서 영적 각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설교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어떤 설교자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것은 모순된 설교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경의 말씀을 풀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교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설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메신저는 복음을 위탁 받은 자로서 오직 성경의 말씀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가르침을 보면 흥미 위주의 설교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불필요한 예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잡고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풀어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예정을 알려 성도들에게 소망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II. 복음의 현장에 나타난 영적현상
1. 가르침을 훼방하는 영들(23-28)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함께 나타난 첫 번째 또 다른 영적 현상은 귀신들린 사람의 대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귀신들린 사람의 상태입니다. 우리 성경은 ‘귀신들린 자’라 기록되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정신분열증이나 미친 사람처럼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는 외적 상태가 아니라 영적인 상태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회당은 회당장의 엄격한 관리 속에 있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정신병자들이나 미친 사람들의 회당에 출입은 용인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주 앞에 나타나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폭로하는 이 사람은 제사장이나 서기관들도 깨닫지 못한 고도의 영적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 속에는 간교한 계략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귀신들린 사람의 증거는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증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에게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또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음으로 증거하느니라”(요15:26,27)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하나님의 성령과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폭로의 목적은 나사렛 예수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빈민 집단지역인 나사렛에 대한 좋지 않은 성경적 인식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인 것을 부각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을 부정한ㅇ 것입니다. 그 당시 나사렛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제자가 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할 정도였습니다.
2. 제자의 부르심을 훼방하는 영들(29-31)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 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 나타난 사단의 두 번 째 전략은 제자들로 하여 온전한 순종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는 기록으로 시몬과 안드레는 회당에 함께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시몬의 장모가 한 집에 살았던 것으로 보아 베드로의 가세는 어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함께 어부 생활하던 동료들의 리더로서 주께서 사도의 머리로 삼으실 제자였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고 또 ‘네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순종할 수 있는 결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끈이 그의 발목을 휘어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하여 주님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부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환경적인 이유로 번민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질병과 생업의 문제에 발목이 잡혀 온전히 복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께서 부르신 제자의 발목을 붙잡는 열병의 사슬을 끊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3. 복음의 목적을 바꾸려는 영들(32-39)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 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이제 우리는 사단의 세 번 째 훼방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사단의 책략은 갈수록 교묘해져 사람들 속에서 높아진 사역자의 마음 속에 역사하여 복음사역의 방향을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고후11:14-15)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음으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하여 주님은 갈릴리 일대를 벗어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들도 병과 귀신들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록된 것 같이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기 때문입니다.
미묘한 문제에 봉착한 예수께서는 다음날 이른 새벽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출입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몰려드는 병자들 속에서 복음사역을 위한 진로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때 시몬과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모든 사람들이 찾는다고 재촉하였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새벽부터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신바람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이곳에 거대한 기도원이라도 짓고 본격적인 복음사역을 하면 하루아침에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를 마치신 주님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해 왔다’ 하셨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은사자들이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는 일로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다는 기도원마다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말씀은 복음의 사역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전도를 위하여 온 것이라’ 하셨습니다.
4. 복음을 차단하는 불순종의 영들(40-45)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복음을 방해하는 사단의 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교묘하여 복음의 현장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어 오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단은 구원 받은 백성들의 높아진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본문에는 문둥병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문둥병은 저주 받은 병으로서 인간의 원죄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발병의 원인도 모르고 치료의 방법조차 없이 살이 곪고 썩어 결국은 죽게 됩니다. 또 문둥병의 특징은 감각을 잃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 시킨다는 의미에서 죄의 속성과 같습니다. 인간의 죄도 깊어질수록 감각을 잃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죄로 물들게 합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에는 문둥병에 과한 율법이 상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이 문둥병이 걸리면 정결함을 얻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공동체 속으로 들어 올 수 없으며 다만 제사장 앞에서 율법에 따라 정결의식을 통해서 회중에게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성경에는 문둥병자의 정결의식에 관한 내용이 문둥병에 관한 율법이 제정된 이래 예수께서 오시기까지 한번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린 미리암과 아람의 나아만 장군의 깨끗케
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미리암의 사건은 문둥병에 관한 율법을 주시기 전의 사건이며 나아만 장군은 율법과 관계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주 앞에서 정결케 된 문둥병자는 문둥병에 관한 율법이 제정된 이래 그 첫 번 째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죄인 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결케 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주께서 문둥병자를 보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민망히’란 말은 창자가 끊어지도록 고통을 느끼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죄인 된 인간에게 이처럼 고통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깨끗게 하시고 엄히 경계하여 보내시며 “삼가 아무에게도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게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하셨습니다. 여기서 ‘엄히 경계하셨다’는 말씀은 ‘책망하여 다짐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제 원죄에서 풀려났으니 교회로 돌아가서 목사에게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성도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가서 돌아 다니며 간증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도 새사람이 되었으니 자신의 일을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전도자가 되겠다고 생각 하였나 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간증자들이 교회를 전전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 문둥병자로 살던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겠습니까?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히려 방해를 받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주께서 마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시사하는 복음의 뜻을 이해 하시겠습니까?
성경강해는 기록된 말씀 속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지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속에서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입니다. 이미 선포하신 주님의 때가 실로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긍휼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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