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7장) 영혼의 자유본능

이요나 2007. 2. 23. 17:14

(마가7장) 영혼의 자유본능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루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니라(막7:31-34)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볼 마가복음7장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최고의 은혜와 영광을 받았음에도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교훈과 제도적 덫에 물려 선과 악의 모순된 삶을 살고 있는 유대인의 모습과 택함 받지 못한 이방인 풍토 속에서 바닥치는 인생의 고통과 아픔을 체험하며 구원자 메시야의 이름을 발견한 춤추는 영혼들의 자유본능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비단 종교적 모순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속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교단 교파의 종교적 딜레마에 사로잡혀 귀먹고 어눌한 혀가 되어버린 한국교회를 향한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I. 종교적 모순(1-23)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막7:5)

 

1절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았더라’ 기록되었습니다.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당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이단적 요소를 찾아내기 위해 파견된 유태교의 핵심요원들입니다. 기록으로 보아 이들은 예수와 그 제자들의 일거일동을 살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부정하다’라는 말은 원래 거룩하지 않다는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기에 예배에 속한 종교적 의미를 더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이란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마가는 이들의 종교적 의식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들의 유전이란 그 당시 성문화 되지 않은 구전 율법으로 유대인의 종교적 윤리 생활규범에 속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삶을 위해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되어야 할 도덕적인 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조항들을 첨부시켜 종교적 생활윤리로 확대하여 주후 3세기에 이르러서는 미슈나(mishnah) 라는 윤리 경전을 만들어냈습니다.

 

오늘 이들이 예수께 나아와 항의한 것은 유대인으로서 식사 전에 반듯이 행하여야 하는 정결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이들이 정한 정결의식에 의하면 유대인에게 있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거룩하지 못한 부정한 것이 묻어서 몸에 들어 온다고 생각하여 손과 발의 먼지를 털고 정해진 방법에 의해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그 사람에게는 악령이 침입하는 대상이라고 규정을 지었습니다.

 

물론 식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이야 위생상 좋은 습관입니다만 여기에 하나님 앞에 선과 악을 가르는 종교적 의미를 부과한다면 결국 이것은 인간의 영혼을 구속하는 죄의 문제가 되고 맙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에 관한 것이라 할 때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종교적 윤리가 부여된 정결의식이라 한다면 이 둘 사이에서 손을 씻는다는 말은 각기 다른 언어가 되고 맙니다. 한 쪽은 생활습관이 되고 한 쪽은 종교의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대인에게 있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죄인에 속한 이단적 요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A. 위선적 예배

주님은 이들에게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배의 본질에 대하여 언급한 것입니다. 주님은 예배에 대하여 의심을 갖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배는 하늘에 속한 것으로 예배자의 영과 마음에서 출발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며 영으로 노래하며 마음으로 노래하라 하였습니다.

 

나는 가끔 다른 교단에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러 갑니다. 그 때마다 나는 그 교단의 특성과 전통들을 살펴 보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많이 긴장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 교단이 갖고 있는 성경적 교리와 예배법이 우리와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먼저 외형적으로 단정하고 엄숙한 복장을 갖추어야 하며 설교제목에서 사용 언어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들의 전통 중 내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한국교회들은 설교 단상을 신성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단상은 설교를 하는 곳일 뿐인데 그들은 단상이 마치 구약성전에 지성소라도 되는 듯 거룩하게 성별하여 신을 벗고 올라가야 하며 그곳에서 십자가를 향하여 무릎을 끓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또한 단상에 놓은 기물들을 신성화 하는 곳도 있어 처신하기 매우 불편스럽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초기부터 내려온 잘못된 종교의식 규범에서 온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지라’ 기록하였고 다시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참조 골2:16-23) 기록하였습니다.

 

 * 계명과 교훈과의 관계

계속하여 주님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향한 두 번째 책망으로 첫 번째 책망이 영에 속한 것이라면 두 번째 책망은 이성에 속한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계명의 가르침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영적 속성과 함께 이성적 속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계명이란 어떤 일에 대한 맹세와 언약으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 통치 영역아래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사람마다 자결권과 선택권을 갖고 있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가르침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누가 어떤 계명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교훈과 이해를 위한 가르침이 따라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그의 종들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를 체험케 하고 그 계명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살펴 그의 부르신 백성들을 바르게 가르치고 또 친히 생활의 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에스라 학사는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 하였다’(에7:10)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끊어져 계시된 계명을 바르게 가르칠 사람도 없고 가르칠 능력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기름부음이 끊어졌던 수세기 동안의 침묵기간을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 기간 동안에 사람의 계명과 교훈 즉 미쉬나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전통과 습관적 관행

세 번째로 주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에게 육체적 관습의 속성이 있음을 지적하신 것으로 물론 육체적 관습은 이론적 원리를 받아드릴 때 적용됩니다. 나는 젊어서 담배와 도박과 유흥에 중독되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터넷과 게임 같은 것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중독은 대게 자기의 기호를 균형 없이 무분별하게 취할 때 발생됩니다. 일단 중독되면 자기의 이성적 통제가 불가합니다. 이것이 우리 육체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속성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전(遺傳)이란 전통적 관습을 의미합니다. 장로들이 만든 유전은 듣기 조차 두려운 하나님의 계명과 달리 오히려 각자의 입맛에 맞도록 지은 것이라서 장로의 유전은 쉽게 생활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깨우쳐 그 진리를 터득하고 그 말씀 속에서 은혜를 체험하여 힘써 지켰다면 계명은 그들의 생활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들에게 주신 생활 규범입니다. 이 계명 속에는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들어 있으며 그 속에는 그들을 통해서 이루실 영광된 삶의 능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 생활화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삶 가운데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듣기 싫어하고 또 힘써 지키려 하지 않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사람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치우고 그 자리에 인간의 계명과 교훈을 대체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버리는도다’ 하셨습니다.

 

*제도적 장치

주님은 유대인들 속에서 이미 악한 습관이 되어버린 일을 예증하여 언급하여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10-13)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 하셨습니다. 그 하나는 먼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불충분한 가르침으로 고르반과 같은 제도가 생기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욕구나 주장에 앞서는 규칙이나 규범을 정하는 제도를 세우는 지도체제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최근 현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통령 산하에 각 분야별로 수많은 위원회를 두고   과거사 진상조사, 친일파 척결, 언론 규제법, 부동산 조치법, 교육평준화 등 수많은 규제 제도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속 시원이 해결되는 것 없이 계속 삐그덕거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욕구를 제도로서 다스리려 한다면 우리 사회는 계속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우리 갈보리 채플 예배에 참여해 보더니 갈보리 채플은 다 좋은데 예배에 관한 규정이 없어 경건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또 설교에 있어서도 성현들이나 유명 목사들의 가르침이나 명언들의 인용이 없고 또 ‘이래야 한다’,  ‘이렇게 하라’ 하는 적용적 교훈이 없어 예배에 힘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분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관한 특별한 규정이나 예외를 두지 않으며 설교에 있어 사람들의 가르침이나 인위적인 책망이나 지배적이고 역설적인 적용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교훈과 뜻을 발견하도록 하는데 힘을 쓸 뿐입니다.

 

B.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주님은 무리를 다시 불러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 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16) 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자들이 이 말씀의 비유가 무엇인지   물었다는 기록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물음에 주님은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 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음식이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 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비유인 것입니다. 비유란 주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어떤 의미를 지정된 사람에게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식물이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나간다는 것과 또 하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마음으로 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 속에서는 공통된 원리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식물에 관하여 생각할 때 식물은 우리의 몸을 위한 것으로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가는 과정에서 사람은 그 음식을 미각하고 필요한 양분을 섭취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 안에 들어가서 연단과 인내와 시험의 과정을 거쳐 삶의 유익한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악한 생각이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들어 간다면 그 악이 우리의 모든 생활에 자리잡아 사람들을 더럽게 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의 오해

이 비유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계명을 버리고 고르반이란 제도를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증거로 하신 말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시작의 발단은 사람들은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또 그 뜻을 왜곡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문은 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루는 사두개인들이 주를 시험하여 자식 얻지 못하고 죽은 남편의 가계를 잇기 위해 남편의 일곱 형제와 차례로 혼인을 한 여인이 결국 자식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면 부활의 때에 그 여인은 누구의 처가 되겠습니까 물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알지 못하여 오해하였도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계명은 그 목적이 부모를 공경하는 데 있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도덕적 원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편법을 만들어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하나님보다 지혜로운 자가 있어 하나님의 법을 폐하고 사람의 법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얼마나 많은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마음에 역사하는 영

주님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0-23)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을 더럽히는 악한 영들이 사람들 마음 속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악한 생각 속에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이 음란입니다. 음란은 뒤에 나오는 간음과 구별되는 것으로 악한 성적 거래에 속한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바울 신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음란한 생활에서 거룩한 성도의 삶의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음란에 속한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은 오직 기도와 말씀 뿐입니다. 또한 악독이란 사람을 해치고자 하는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번지는 상태를 말하며, 음탕은 부끄러움을 상실한 무례한 마음을 말합니다. 또한 교만은 자신을 최고의 높은 곳에 두려는 마음으로 성경은 교만은 우상숭배라 하였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믿는 우리들에게 속한 것이 아닌 세속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에 빠져 악한 생각에 물들어 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에 하신 말씀이며 또 오늘을 사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이런 마음이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면 결국 당신도 위선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II. 영혼의 울부짖음(24-30)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습니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29-29)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의 영혼의 구원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의 두 번째 내용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시험에 질린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팔레스틴 북방 지중해 연안인 두로로 들어 가셨습니다. 이 지역에서도 몸을 숨길 수 없게 되었던 주님 앞에 수로보니게 족속인 헬라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쫓아달라고 소리치며 따라 왔습니다.

 

마태는 제자들이 묵묵부답이신 예수께 이 여자가 씨끄럽게 구니 제발 보내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때 주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모멸스런 말씀입니까? 속된 말로 어느 집 개가 짖느냐 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개와 같은 존재가 아니냐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주께서 왜 이 여인의 소리침에도 대꾸를 하지 않고 또 이처럼 야멸찬 말씀을 하셨느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는 이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마15:23)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자손’이란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신 메시아 언약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인 것은 성경에 기록된 계시로서 아무나 알 수 없는 비밀에 속한 것입니다. 주님은 과연 헬라 문화권에 살고 있는 페니기아 여인이 어떻게 메시아 언약을 알고 있느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계시를 받은 유대인들도 예수가 다윗의 자손인지 몰라 죽이려 하거늘 이방여인이 예수를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은 기이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화두에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로 계시된 구원자 되신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들의 개라도 되어 메시아의 집에 들어 가고 싶은 영혼의 울음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III. 영혼의 자유(31-37)

마가복음 7장 세 번째 문단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두로 지경을 나와 시돈을 지나 데카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일 다음에 7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내용은 8장에서 자세히 언급할 예정입니다만 두로와 시돈과 데카볼리를 돌아 오는 동안 수많은 무리들을  주님을 따라 왔습니다.

 

이미 이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오시기로 언약된 다윗의 자손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일까요? 우리는 이미 마가복음 5장에서 데카볼리 일대에 복음을 전한 군대귀신 들렸든 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복음의 전도자가 되어 헬라의 문화와 전통으로 가득한 데가볼리 일대를 복음화 한 것입니다.

 

 32절에는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귀머거리를 치료하는 예수님의 특별한 행동입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에게서 떠나셨으며 또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 뱉아 그 손을 혀에다 대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냥 손만 얹어서 고치셔도 될 것이고 또 말씀으로 고치실 수도 있으신데 말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습관과 관습에 매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습성을 살펴 보았습니다. 사람은 선한 것에 습관이 될 수 있고 나쁜 일에도 습관 될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주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하셨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친다는 신유은사나 예언하는 곳에 몰려가 사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넘어뜨리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귀신아 나가라 소리치기도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여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것이라면 권세라는 것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미혹의 빌미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 방문 중 어느 갈보리 채플 목사로부터 척 스미스 목사께서도 개척 초기에 어느 호수 가에서 기도 중 크게 성령체험을 하신 일이 있었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와 체험의 과정을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척 목사님은 제자들에 의해 그 지역이 성역화되고 제도화 할 것을 우려하여 일체 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거짓 이적과 예언을 표방하며 가당치 않는 소문을 조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증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이 메시지를 듣는 모든 사역자들의 막힌 귀와 어눌한 혀가 열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8장에서 뵙겠습니다. (강해설교의 자료를 필요로 하시는 사역자님께서는 갈보리채플 홈페이지를 방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