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15장) 성경의 재발견

이요나 2007. 2. 23. 17:03

(마가15장) 성경의 재발견

(막15:21-28)

 

최근 미국 어느 교사가 쓴 다빈치 코드라는 책이 전세계적으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 책이 얼마나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는지 카톨릭계에서는 이에 대한 반서(返書)를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작년 휴가 중 미국에 머무를 때 어느 교수가 권해 주어 읽어 보았지만 그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참으로 말 같지 않은 일들에 흥미를 갖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반지의 제왕이나 주라기 공원과 같은 비실제적 상황을 실제적 상황처럼 묘사한 영화들이 더욱더 흥행을 이루는가 보다. 나는 최근 계시록을 마치면서 더욱 확신하는 것은 이 세상에 성경처럼 흥미진진하고 실제적이며 또 미래에 대한 확실한 예언을 한 책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성경이 세상에 발간된 이레 수세기 동안 이 지구상에서 베스트 셀러의 위치를 지켰다. 성경이 그처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세계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이 사람들 에게 많이 팔리고 있다는 의미도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성경이 베스트 셀러의 입지를 확보한 것과 성경이 사람들 속에서 그 내용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갖고 있다는 말과는 다른 견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여 성경을 구입한 사람들이 성경을 소지하는 이유는 자신이 교회의 한 일원이기 때문에 구입한 것이지 그 성경을 읽고 기록된 내용에 대하여 흥미와 공감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만약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다빈치 코드와 같이 어떤 비밀에 대한 흥미를 발견하고 또 그 비밀들이 모두 사실 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면 다빈치 코드 같은 책은 서점에서 사라질 것이고 세상의 문화 매개체와 메스콤은 성경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성경의 내용으로 화제를 이룰 것이다.

 

나는 이러한 날이 이 땅에서 한번 다시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간절한 소망은 그 때가 지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지금 이 땅에서는 성경적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마치 잠복기와도 같이 무거운 침묵 가운데 종교적 활동만 있을 뿐이다.

 

간간히 어느 특정 단체를 통해서 종교적 부흥운동이 고조되고 있지만 대부분 신유와 기적들을 표방하는 이벤트성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은 오히려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구실을 제공하여 왔다.

 

오늘날 기독교적 이단들이 그의 지지자들에게 각광을 받는 이유에는 변명하지 못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무지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할만한 이론적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믿음을 유발시킬 사술적 기능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면에서 생각할 때 성경은 참으로 위대한 이론적 근거와 사실적 증거 그리고 미래 지향적인 예언을 가진 신이 기록한 유일한 문서이다. 또한 삶 가운데서의 실제적 증거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은 모든 사람들을 믿음으로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도 성경이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적인 경전으로만 인식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이유가 성경적 이해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여 성경을 선포하는 교회가 과거 지향적이고 제도 중심적이며 종교적 활동의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서 있어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미래지향적인 신비에 가득한 예언서였다.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경전이라기 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성경의 말씀 속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함께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이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그의 나라로 이끌어 가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호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을 맡은 교회의 책임이다. 계시록에는 먼저 하나님의 본체에 대하여 설명한 후 예수께서 택하고 부르신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실제로 있을 일들과 경계해야 할 일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전하고 있으며 또 곧 이 땅에서 속히 이루어질 일들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수많은 교회 중에 요한 계시록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 싶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1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련된 일들을 살펴보게 된다. 이 내용들은 이 사실을 그대로 겪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의 증인들에 의하여 사실대로 묘사된 내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용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가르쳐 줄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말씀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 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관련된 구약 성경의 예언적 성취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발생된 일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서 실제로 성취된 일들을 성경에서 발견해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가복음 15장의 초점을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후에 기록된 성경의 위치를 재발견하는데 두고 싶다. 그 이유는 그곳이 바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I.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 가셨다고 기록하였다 (고전 15:3)

  A. 바울의 증거

사도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은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시고 게바에개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고전15:3-8)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예수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성경대로 장사 지내신바 되었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 나셨고 성경대로(미리 말씀하신 대로) 그의 제자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성경대로라는 바울의 증거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다.

 

B.      성경의 구약적 증거

마가는 14장에서 예수께서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당할 때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라고 정회라고 혹은 그에게 침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막14:64,65)라고 기록하였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700여 년 전의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내가 치는 자들에게는 내 등을 머리카락을 뽑는 자들에게는 내 뺨들을 맡겼도다. 내가 치욕과 침 뱉음으로부터 내 얼굴을 숨기지 아니 하였도다’(사50:6) 기록하였다.

 

오늘 본문 3,4절에서 마가는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를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기록하였다. 이것은 매우 희귀한 일로서 사람들의 거짓 고소로 인해 사형을 당하여야 할 입장에서 또 재판관이 자신을 위해 변명을 하라고 기회를 줄 때에 자신의 생명을 위한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이 땅에 있을까 싶다. 이에 대하여 마가는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바를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를 채찍질한 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 주니라”(15)기록하였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 일을 미리 말하여 ‘그가 억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여도 그 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어린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또 털 깎는 자들 앞의 양이 말 없듯이 그가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사53:7) 기록하였다.  

 

여기서 채찍질이란 쇠꼬챙이 갈고리가 달린 아홉 가닥으로 내려치는 혹독한 형벌로서 대부분의 죄수들은 40번의 채칙을 견디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서른 아홉 번을 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이러한 채칙을 맞으실 것과 또 그 이유에 대하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의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칙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하였다.

 

마가는 24절에서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기록하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말씀은 시편에 이미  ‘그들이 그들 가운데서 내 겉옷을 나누고 내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22:8)고 기록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시편기자가 말한 것은 꼭 예수님의 일을 언급한 것이라 볼 수 있겠느냐 하겠지만 이 지구상에 의로운 사람의 옷을 주사위 게임을 통하여 나누는 일이 증거 된 일이 있었는가? 설혹 있다 하드라도 수백 년 전에 태어난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일을 증거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더구나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말이다.

 

마가는 27절에서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기록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그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하며 강한 자들과 더불어 탈취물을 나눌 것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영혼을 버려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또 그는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으나,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를 하였음이라’(사 53:12) 기록하였다.

 

계속하여 마가는 그때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주를 모독하여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헐고 삼 일만에 짓는 자여, 네 자신을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9) 기록하였으며 계속하여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더불어 이와 같이 서로 조롱하며 말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는가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십자가에서 지금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으리라 하며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주께 욕하더라” 기록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시편기자는 ‘나를 보는 자는 다 조롱하며 비웃나니, 그들이 입술을 내밀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그가 주께서 자기를 구하실 줄 신뢰하였도다. 주께서 그를 기뻐하시니 그를 구하시게 하라”(시22:7,8) 기록하였다. 누가 이 기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날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내용의 다른 것이 있다면 언어의 표현이 조금 다를 뿐이다. 

 

마가는 그때의 시간을 기록하여 “제 육시가 되니 어두움이 온 땅에 덮여 제 구시까지 가더라”(33)기록하였다. 여기서 9시란 한 낮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하루는 저녁 6시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모스 선지자는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내가 정오에 해를 지게하며 대낮에 땅을 어둡게 하리라. 또 내가 너희의 명절들을 애통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들을 애가로 변하게 하리라. 또 내가 모든 허리들에 굵은 베옷을 가져올 것이요, 모든 머리들로 대머리가 되게 하며, 또 내가 독자로 인한 애통으로, 그 끝을 쓰라린 날로 만들리라’(암8:9,10) 기록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날은 개기일식일 것이라 말하지만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날에 개기일식은 없었다. 우리가 그날을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그날은 유대인의 유월절 전날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아모스 선지자는 정오에 해가 지고 너희 명절들에 애통할 것을 예언하였다. 유월절은 유대인 명절 중 가장 큰 명절로서 독자 곡 하나님의 독생자를 버린 애통을 노래한 것이다. 

 

인간의 모든 기록된 역사는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년을 365일로 하면 2,190,000 일인 것이다. 나는 역사 속에서 다른 어떤 예외를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자면 맑은 날 대낮에 어두워지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다.

 

마가는 34절에서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며 말씀하시기를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 하시니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고 기록하였다. 흥미롭게도 시편 22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되고 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한 성자라고 잘못된 가르침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라고 하신 말씀을 잘못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음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라는 간절한 기원문인 것이다.

 

시편 22편 28절에는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하였고 다시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시22:30,31) 기록하였다.

 

마가는 36절에서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 흠벅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우게 하였다 기록하였다. 이에 대하여 시편기자는 ‘그들이 또 쓸개즙을 나의 음식물로 내게 주었으며, 내 갈증에 나로 식초를 마시게 하였나이다’(시69:21)고 기록하였다. 죽음 직전의 사형수에게 갈증을 면하게 하기 위해 신포도주를 마시게 한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어림잡아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계속하여 마가는 43절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니 그는 존경 받는 공회원으로 그 자신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라 빌라도는 그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놀라 백부장을 불러서 그가 죽은 지 오래되었는가 물으니라.  그가 백부장으로부터 들어 그 일을 알고 난 후 그 시체를 요셉에게 주더라’ 라 기록하였다,

 

이사야는 메시야가 부자와 함께 묻힐 것을 예언하여 ‘그가 악한 자들과 더불어 자기의 무덤을 마련하였으며 그의 죽음을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이는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그의 입에는 속임수가 없었기 때문이라’(사53:9) 기록하였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아무런 원인을 말하지 않으셨으며 그들의 악행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셨고 어떤 속임수도 말하지 않으셨다. 과연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증거 된 일이 없다.

 

이제 마가는 24절에서 ‘그들이 예수님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그 사실을 눈으로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미 성경은 이 일에 대하여 ‘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악인의 무리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그들이 내 손과 내 발을 찔렀나이다’(시22:16) 기록하였다. 물론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II. 누가 몇 시간만에 이 많은 성경의 예언들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

A. 사실 후에 쓰여진 예언은 예언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앞날에 대한 일들을 알고 싶어한다. 그것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제로 앞날에 대해 상세히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는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아마 그 이유는 성경의 예언을 읽어 보지도 또한 들어 보지도 못하였고 또 읽고 누구에겐가 들었다 하드라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바로 얼마 후에 하늘에서 집 더미 만한 우박이 떨어질 것이라든가 하늘의 일월성신이 흔들리고 우리가 사는 온 땅에 지진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재난이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세계적이라면 당신은 어디로 피할 것인가? 당신의 집이 아무리 견고한 성에서 살고 있다 하드라도 피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환난을 이겨내고 땅에 살아서 그리스도를 맞이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때에 구원을 받기로 약속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될 것이다.

 

십 여 년 전 15세기의 예언자라 칭한 노스트라다므스라하는 사람이 쓴 책에 1988년 5월에 캘리포니아 일대에 큰 지진이 일어 날 것이란 말을 믿고 대소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1988년은 아무 일도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또한 9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다미 선교회의 이장림이란 사람이 일어나 15살 난 중학생의 환상을 믿고 종말이 올 것이라 사람들을 미혹하였지만 그들이 말한 날은 조용히 지나가 버렸다. 예언가란 열 번 말한 것 중 한가지만 틀려도 그는 거짓 예언가가 된다.

 

예언이란 사실이 전개되기 전에 공포되어야 하고 그 말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그 내용이 전개된 후에 쓰여진 것은 예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많은 비평가들은 성경을 공격하여 왔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그 성취에 있어 이중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각 시대별로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권면하고 또 당면한 종말적 현실로부터 구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다니엘서는 이미 지나간 시대 속에 성취된 일들이 많았다. 그로하여 사람들은 다니엘의 예언은 이미 끝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니엘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고 그 언어가 지배하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다니엘이 말한 바 예언들을 현실 속에서 보았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약 성경은 기원전 200년에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되었으며 다니엘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속에서 하나씩 베일을 벗겨졌다. 그러므로 천사는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 하였고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해질 것이라 한 것이다(단12:4).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구약에 능통했음으로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 빌라도 앞에 침묵한 것이며 또 신 포도주를 마시리라는 구약을 성취하기 위해 ‘목 마르다’고 말하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려 했다고 비아냥 거린다. 그러나 십자가 형벌이라는 죽음 앞에 성경의 그 많은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B.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예언들을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적 요소들의 가능성을 추정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당신이 그 많은 사건들을 다루는 것처럼 당신은 그 요소들을 복합시켜 보아야 한다. 십자가 앞에 발생한 일들 곧 성경에 기록된 일들이 그대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10의 49제곱 정도의 확률을 가져야만 한다.

 

과학자들은 우주에는 대략 10의 23제곱에 이르는 수의 별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는 은하계에 대략 천 억 이상의 별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며. 우주에는 대략 1조 정도의 은하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아무도 그 수를 세어보지는 못한 것이며 셀 수도 없는 무한대의 숫자이다. 단지 추측일 뿐이다. 만약 과학자들이 추정한 은하계의 별의 수를 세려면 1분에 250개씩 센다고 치고 밤낮 쉬지 않고 세어도 750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성경에는 별과 관련된 신비한 내용들이 많이 기록되었다. 그런데 우주에 있는 그 별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각 행성의 질서를 따라 궁창 위에 두신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누가 만일 10의 49제곱개의 별들을 가졌었다면 그는 그 별들로 우주를 충분히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누가 그 별들의 주인이라면 그는 자신의 소유인 별들을 자신의 뜻대로 다루고 움직일 것이다. 하물며 천지만물과 일월성신을 창조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일까 보냐? .

 

이와 같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전파하는 복음을 받아 드리기를 구했을 때 그 믿음을 위해 예수를 믿기 위한 엄청난 양의 자료들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믿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그 놀라운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믿지 않으려는 쪽을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분명한 것은 당신은 죄 때문에 죽음의 형벌에 처해지지 않아도 된다는 하나님의 판결을 받은 사람이 된다. 당신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죄 사함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권세를 받은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며,  기쁜 소식이다.

 

III. 미래 지향적인 성경의 증거

여기서 우리가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구약에 대한 신약의 성취만을 증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미래지향적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에 그 모든 것이 완성을 이루게 되어있다. 이것은 성경 내용이 미완성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성경의 모든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그의 날에 이르도록 기록된 것이라는 말이다.

 

신약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모두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신약은 성취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를 우리는 신약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오늘 십자가의 사건과 연루된 일 중에서도 그 증거를 볼 수 있다.

 

마가는 21절에서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 올라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기록하였다. 이 내용은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직접 본 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3장 1절에서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는 기록을 읽게 된다.

여기에 기록된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와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올라간 사람이 틀림없다. 그가 사도들과 함께 예언자와 교사의 반열에 올라가 있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기만 하다.

 

또한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니라(롬16:13) 소개하고 있다. 구레네 사람 시므온은 그후 자신과 그의 처와 아들 모두가 주를 영접하고 복음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신약은 그리스도의 날이 이루도록 계속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당신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사도 요한은 계시록 20장 15절에서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 기록하였고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22:7) 하였다. 또한 주께서 친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고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계22:14) 하셨다. 이제 당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주사위는 당신에게 던지어졌다. 나는 부디 당신이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