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14장) 실패의 단계
(막14:66-72)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의 실패의 쓴 눈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베드로의 실패의 아픔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이 믿음의 성장 과정 속에서 겪어야 할 실패의 쓴맛이 아닌가 생각한다. 베드로는 그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늘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로 하여 주 앞에 커다란 과오에 빠지게 한 것은 작은 여 종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아주 작은 사람이나 요소에 의해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과오를 범하기까지는 이미 우리의 마음이 범죄의 단계에까지 도달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범죄는 단계적 과정이 있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범죄는 어떤 순간적인 자극에 의해 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는 오늘의 이야기를 통하여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주님을 부인하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베드로는 늘 다른 제자들 보다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과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신은 성격적인 데서 오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족한 지식과 부족한 경륜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복음사역에 있어서는 사회적 지식과 경륜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실수를 부추기게 한다.
복음서에 의하면 야고보와 요한의 동업자이기도 한 베드로는 동료들 중에 연장자로서 리더쉽을 갖고 있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그는 동료들을 충동하여 갈릴리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처럼 사람들 속에 리더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던 앞장을 서게 되는 경향이 있다.
어느날 주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답하였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복이 있다’고 칭송하시며 ‘이것을 알게 하신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하시며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이것은 영적인 인도함을 받은 신앙고백을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께서 ‘내가 곧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말씀하셨을 때 ‘정녕 그럴 수 없습니다’ 고 말려 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서라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심하게 책망을 받았다. 이와 같이 세상적 경륜은 오히려 앞에 나서게 하여 실수를 촉박하게 한다.
이러한 성향은 비단 베드로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서로 주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실 우리 중 누가 가장 크며 누가 가장 높은 위치에 놓일 것인가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었다(막9:34). 또한 야고보와 요한은 제자들 앞에서 주께서 왕국을 세우실 때 그의 오른편과 왼쪽에 자기 형제들을 세워달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자들의 경쟁 속에서 베드로는 좀 미묘한 입장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유월절 식탁에서 주님이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 하신 것이다. 이때 베드로는 기회를 잃지 않고 나서서 ‘다른 사람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고 호언장담했다.
어디 그뿐인가 주께서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을 때도 그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은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였고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였다. 이처럼 자신들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호언장담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속성인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평가하여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안다” (롬 7:18) 하였으며 우리에게 너희가 서 있다고 생각할 때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계하였다. 또 그는 “우리는 어떤 일이라도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만족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이라”(고후 3:5) 라고 말하였다.
세상은 늘 우리에게 자신감을 갖도록 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제자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육신 안에서 확신을 갖지 말라는 경계이기도 하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 말씀하셨으며 또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 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증거하였다.
II. 두 번째 위험의 징조 - 주님(성경)과 논쟁하는 것이다.(31절)
사람들은 논쟁을 좋아한다. 이것은 자기의 주장을 내세워 다른 사람들 보다 자기가 뛰어남을 주장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다. 마가복음 9장에는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놓고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는 제자들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책망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논쟁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가끔 목사들 모임에 나가면 당신은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온다. 대게 그들의 물음은 이미 자신들의 답을 갖고 상대의 무지를 조롱하던가 아니면 그의 부족함을 폭로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된 에덴동산으로부터 있었던 일로서 뱀은 하와에게 나아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갖고 변론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사단은 하나님 아들 예수님 앞에까지 나아와 세번이나 시험하였으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 그리고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 서기관들도 주 앞에 나아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당신은 무어라고 말하느냐 시험을 일삼았다. 그러나 성경을 가지고 변론하고자 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한 일로서 아주 잘못된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읽고 깨달아 지키기 위한 것이지 변론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만약 누가 성경을 변론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면 그는 성경의 저자보다 더 큰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은 오늘의 시대와 맞지 않고 그 당시에만 국한된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와는 상관없는 내용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으로 초월자이시다. 다만 한계 속에 있는 인간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황이 다르다해도 인간을 대하시고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 언제까지라도 항상 동일 하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창조자에게 대항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변론의 태도를 갖는다 하면 당신은 곧 쓰디쓴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변론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III. 세 번째 위험의 징조 -기도하지 않고 잠자는 것 (37절)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신 후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셨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위하여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가까히 두셨다. 주님 고난의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고통의 무게를 느끼며 자기를 도와 함께 기도해줄 동역자의 필요성을 느끼셨을 것이다.
주님은 특별히가까히 두신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때의 심경을 토로하여 “내 마음(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4절) 하셨다. 그리고 조금 앞으로 더 나아가 머리에서 피가 나도록 기도에 전념하셨다. 그리고 한 시간 후 그들에게 돌아오셨을 때 세 제자들은 잠이 들어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37절) 라고 물으셨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가장 큰 약점들 중의 하나는 기도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몰론 우리나라 교회는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을 말하며 기도만큼은 자신을 가지려는 태도를 갖는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기도하느냐를 가지고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가 생기면 밤을 세워 기도하기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끊어 내려는 일들에 대하여 자각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깨어 기도라’ 하신 성경의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필요에 의한 기도를 위해 깨어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를 훼방하며 그의 오심을 대적하는 악한 영들에 대하여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기도하거나 말씀 중에 있을 때 그는 적을 대항하는 제일의 방어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도의 힘을 잘 아는 사탄이 크리스챤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온갖 힘을 다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적 전쟁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기도는 영적 투쟁의 결정적인 요소인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으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엡6:11,12) 하였다.
또 바울은 영적 무질서에 빠진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통하여 견고한 요새들을 무너뜨리는 능력이라”(고후10:4)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엡6:18) .
IV.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 베드로는 칼을 사용하였다(47절)
우리는 때때로 영적 전쟁에서 자신의 위급함을 발견하고 곧바로 어떤 즉흥적인 조치를 취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조치는 사단에게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 베드로는 제사장의 군사들이 예수를 잡으러 겟세마네 동산에 왔을 때 그 위급함을 면하기 위해 칼을 들어 종의 귀를 베었다. 그러나 기도에 실패한 사람이 든 칼이 무슨 위력을 발휘하겠는가? 이미 그는 영적 전쟁에서 실패한 자이기 때문에 그의 칼은 오히려 적에게 더 큰 빌미를 제공할 뿐이다.
나는 가끔 내 주변에서 발생되는 일들을 내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쓴다. 사실 나는 지난해 우리 교회에 발생된 채무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 왔었다. 나는 나의 실패는 주께서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갈보리채플의 후임자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나는 이 영적전쟁의 현장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려 힘을 썼다. 그러나 이년에 걸친 나의 노력은 무참히 실패를 하고 결국 나는 제 자리로 돌아와 오늘 이 말씀을 보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의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영적전쟁에서 실패했다는 증거이다.
V. 더 큰 실패 - 멀리 떨어져 있는 것((눅22:54)
이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부꾸럽게 한다. 주님은 만일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영광의 날에 천사들과 함께 올 때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다 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주를 믿고 있는 것을 구태이 세상에 밝힐 필요도 없고 마음으로 믿으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여 아주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예수를 믿으려 한다. 그들은 십일조에 대한 인식도 갖지 않으며 교회의 봉사에도 나서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공개적인 크리스찬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오히려 열심을 다하는 성도들을 종교적 열성분자라 하여 경멸하기까지 한다.
사실 이런 사람은 이미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딘 사람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을 무너뜨리는 데는 커다란 힘도 필요없다. 아주 사소하고 아주 작은 종의 말 한마디로 넘어지게 된다. 그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옆집 사람의 유혹을 받아 귀신들의 모임에도 나가 간간히 술도 마시고 도박에 빠지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음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 가게 될 것이다.
VI. 이미 세상의 불 곁에서 몸을 녹이는 모습을 보자.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이미 세상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잡힌 후 베드로는 영적 구심점을 잃고 대제사장의 뜰 안으로 들어가 하인들 속에 어울려 그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을 쪼이고 있었다. 만약 그가 주께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깨닫고 기억하였다면 그 시간에 제자들과 함께 모여 주를 위해 기도하였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베드로는 작은 여자 종의 힐문에 놀라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고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하였다. 오늘날 이 글을 보는 당신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베드로라고 하겠지만 지금 당신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신이 깨어서 한 시간도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당신 앞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세상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고 그를 얻기 위해 세상 속으로 한발 내어 딛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 속에서 세상의 불을 쪼이기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국 당신은 당신이 실패한 시험대에 다시 서게 될 것이다. 당신의 영혼을 구하신 주의 은혜가 당신을 다시 깨우치게 하여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크리스챤의 증거를 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당신으로 하여 베드로와 같이 배신의 아픈 고통을 체험한 후가 될 것이다.
후일 베드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공회에 서게 된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또 대제사장의 친족이 모두 참석하여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였느냐?"고 책망하였다(행4:7) 이때 베드로가 당당하게 일어나 너희 건축자들이 쓸 데 없다고 제쳐 놓은 돌이었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증거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을 깨우친 닭 울음 소리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닭 울음 소리가 아닌 천사장의 나팔소리를 듣게 되기를 기도한다. 만약 당신이 세상의 방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살고자 한다면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며 하늘 보좌에서 당신을 중보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깨어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이 땅 모든 사람들에게 임할 대환난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주께 멀어져 은밀한 가운데 주를 섬기며 세상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고자 한다면 언젠가 당신은 세상 사람들 속에서 만족을 얻고자 초라하게 앉아 불을 쪼이는 그날에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때 당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다음 단계에 서야 할 것이다. 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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