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가복음강해

(마가16장) 믿음의 모순

이요나 2007. 2. 23. 17:01

(마가16장) 믿음의 모순

 

(마가16:11)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오늘로 우리의 마가복음 여행을 마치게 된다. 강의를 마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내가 너무 게을렀고 성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족함이 있었기에 더욱 정진할 수 있는 각오와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16장은 15장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후의 일들에 대한 사실적인 내용들이다. 이 내용 속에서 특별히 어떤 신학적인 요소들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도의 실용적 믿음을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16장에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한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정말 죽어 장사지낸 사람이 다시 살아 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 내용은 전무후무한 베스트 셀러감이다. 그런데도 믿는 사람들조차도 이 부분에 대해 시쿤둥한 표정을 짓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주의 날에 다른 사람들의 부활을 보고서야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애통하게 될 것이다.

 

오늘 16장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커다란 돌 때문에 더 이상 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근심하고 있는 믿음의 여인들의 안타까운 현실과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 나심을 본 증인들의 말을 듣고도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불신앙 상태이다. 이것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잘못된 믿음의 모순이 아닌가 싶다.

 

I. 소망 앞에 놓인 돌

A.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망

(막16:1,2)’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우리는 믿음 생활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앞에 높인 장애물로 하여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한 경우 대개 우리는 기도라는 카드로 해결하려 하지만 그 장애의 크기에 따라 우리는 기도라는 카드조차도 무용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러한 고민은 전체를 볼 수 없는 한계 속에 처한 인간의 고통이 아닐까 싶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마가복음 16장 서두에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사도들은 그 화가 자기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몸을 숨기고 잠잠하고 있는 터인데 이럴 때 여인들의 용기는 남자들 보다 훨신 났다.

 

흥미롭게도 여인들 이름 중 막달라 마리아가 선두에 나오고 있다. 이 여인은 읿곱 귀신에 나간 자 로서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과 함께 전도여행을 떠날 때 다른 여인들의 선봉에 서서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던 여인이다(눅8:2,3).

 

이 여인이 과거에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정말 참혹하리만큼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일곱 귀신들린 자라는 말을 일곱 종류의 귀신에 사로잡힌 자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섭리 속의 악한 귀신에게 사로잡힌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주님을 만나기까지 이 여인의 삶을 고통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여인이 어떤 삶을 살았을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미국 갈보리채플 척 스미스 목사의 초대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정말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음란과 술과 도박과 사치와 거짓과 위선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그렇게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말 유복한 가정의 귀한 아들로 곱게 자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원치 않았던 시절 그것이 옳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상태 속에서 패륜을 일삼아 왔다. 그 생활은 내가 예수를 믿고 교회 생활을 하던 날에도 계속 되어 주께서 내 영혼을 흑암에서 구원하시기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로서 나는 한 영혼이 온전히 주 앞에 나아가기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이라 믿고 있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주님은 한 여인을 내게 보내어 복음을 전하셨다. 그때야 말로 내 영혼은 감당할 수 없는 인생에 부딛겨 구원자를 향해 밤낮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예수의 이름을 알지 못하였지만 분명한 것은 내 안에 있는 영은 영혼의 구원자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내가 예수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내 머리에 바위 같은 돌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고 나는 아무 꺼리낌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하였다. 나는 그 신선한 충격의 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날은 내가 다시 거듭나는 순간이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는 날이기도 했다.

 

그날부터 내 영혼은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장식되어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영혼을 양육할 올바른 영적 지도자를 만나지 못하여 그날부터 내 영혼은 잘못된 종교지식으로 오염되기 시작했다. 아마 막달라 마리아도 유대인으로서 열심히 종교활동에 빠졌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12년 동안을 한국에서 성령운동과 교회성장으로 유명하다는 교회에서 열성분자와 같은 종교활동을 해왔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들 또한 그렇게 가르쳤다. 어느새 나는 교회란 물질적인 축복을 쏟아 붓기 위한 영적 도구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크리스천이 되고 말았다. 아직도 나는 주변에서 그러한 성도들을 많이 보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말없이 묵묵히 고난을 받는 성도들을 성령도 없고 못난 성도라고 칭하기 까지 한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영혼의 수렁에서 다시 울부짖기 시작한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셨다. 그리고 내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기름 부으신 목자를 보내셨다. 그날의 기쁨은 내가 처음 예수의 이름을 듣던 날과 같이 아름다웠다. 그날부터 나는 갈보리채플 사역자가 되어 12년을 달려 왔다.

 

그리스도의 신비의 말씀에 사로잡힌 막달라 마리아는 더 이상 사탄의 힘에 구속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말씀의 인도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온전한 말씀의 자녀가 된 그녀의 삶의 가치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II.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망과 장애

(막16:3)’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3)

A. 지금 그녀의 중요한 관심은 누가 그 돌을 옮겨 줄까 하는 것이다.

지금 마리아와 여인들의 근심은 무덤의 돌을 누가 옮겨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 열두 제자들이 옆에 있었다면 남자들과 함께 힘을 모아 돌을 옮기려 애를 써 볼텐데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굴조차 비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삶에 어떤 곤경이 닥칠 때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앞장서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환난 중에 여인들은 정말 생각지 못했던 용기와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사사시대 여선지 드보라는 가나안 야빈 왕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이끈 칠백승의 철병거로 인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을 일으켜 다볼산 앞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때 사실 사사는 바락이었으나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두보라가 나서지 않으면 앞장서지 않겠다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이에 드보라는 이번 일로 하나님의 영광은 여인의 손에서 성취 될 것이라 말하고 바락을 이끌고 전쟁으로 나섰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이스라엘 앞에 가나안 시스라의 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기세 당당하던 시스라는 혼비백산하여 그 산간지대에 살고 있던 모세의 장인의 자손 헤벨의 장막으로 몸을 숨겼다.

 

이 때 장막 안에 있던 헤벨의 아내 야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시스라에게 더운 우유를 마시게 하고 이불로 덮게 한 후 장막 말뚝으로 심장을 찍어 죽였다. 드보라의 예언대로 바락이 드보라를 따라 전쟁에 임하여 적을 물리쳤지만 그 영광은 여인의 손으로 돌아간 것이다(사4:7-24).

 

또 사무엘상 25장에는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그녀는 어리석은 자 나발의 아내로 후일 다윗의 비가 된 여인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같이 갈멜산에서 야인 생활을 할 때 그는 그곳에 살고 있는 나발의 목장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어느날 식량이 곤핍하여 나발에게 사람을 보내어 먹을 것을 요청하였으나 나발은 다윗이 도대체 어떤 놈이냐고 하대하고 물리쳤다.

 

화가난 다윗은 군대를 동원하여 나발을 치려 작정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이 떡과 고기를 말에 실고 달려가 다윗에게 엎드려 내 주인 나발은 그 이름과 같이 불량한 자가 아닙니까? 주께서 그를 대적하여 하나님 앞에 더러운 손을 피로 물들지 않게 하십시요 라고 간언하여 다윗의 노여움을 풀었다. 이와 같이 여인들은 환난 중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지를 갖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주의 시신을 향으로 바르기 위한 것이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예루살렘을 떠나고 어디엔가 몸을 숨기고 있을 때 그녀는 지금 그녀로서 주께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용기는 예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의 발로인 것이다.

 

B. 주님과의 사이에 놓인 돌로 하여 주께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주께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재물일 것이다. 한 부자 청년은 갈급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께 나왔다가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주의 말씀을 듣고 재물 때문에 근심스러운 얼굴로 돌아 갔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재물로 하여 주께 나오기를 꺼리고 있다. 주님은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 가기보다 힘들다 하셨다. 이것은 재물을 가진 자의 영적 속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한국 최대의 재벌 정주영씨의 상속자의 자살을 보라. 그들이 대대로 모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자금 도청사건의 전모가 들어난 정경유착의 의혹 수사를 받고 있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귀국하여 회장이 8천억을 사회에 내놓겠다. 국가든 사회단체던 두려움 없이 삼성제국을 이끌어 가던 그가 왜 갑자기 그러한 결정을 하였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미국 체류 중 그의 딸 하나가 자살을 했다.  참으로 얼마나 애석한 일이냐? 돈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재물로하여 주 앞에 나오기를 꺼리고 있다.

 

당신이 예수 앞에 나오지 못하는 두번째 요소는 당신의 명예와 지위 때문일 것이다. 그 위치에서 자신의 과오와 죄인임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기록하였다. 당신이 어떤 고고한 인생과 명예를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딸의 죽음 앞에 주 앞에 무릎을 꿇은 회당장의 이야기를 보라 생명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번째로 당신을 예수 앞으로 나 올 수 없게 하는 것은 섹스와 술과 마약과 게임일수도 있다. 이것은 참으로 극복하기 힘든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크리스챤들도 다시 이 문제에 얽혀 주 앞에 나오기를 꺼리며 또한 죄로 더렵혀진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이 예수를 믿어 영혼의 구원을 믿는다 해도 그 더러운 몸을 갖고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 성경은 영과 혼과 육이 온전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네번째 또 다른 요소는 불신앙이다. 여기서 불신앙이란 논 크리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당신들의 불신앙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주 앞에 자신의 운명과 그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은 자들이라도 정작 주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갖고 있었고 주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III. 불신앙의 원인은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11절에는 그들은 예수를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였다 기록되었으며 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노중에 주를 뵙고 돌아와 자신들이 주를 만났음을 고했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제자들로서 그들 중에는 주께서 중히 여기시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자기의 살아 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은 자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책망하셨다. 여기서 마음이완악하다는 말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자기의 생각과 지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못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생각한다. 그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면 무조건 부정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것은 수천년 동안 인간이 갖고 있던 지식에 위배된다. 아무리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거닌 것을 보고 또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은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미 장사한 지 사흘이 지났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살아났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다. 이미 그들은 나인성의 과부 아들의 살아남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살아남을 목격한 바 있다. 더욱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주께서 부르자 베를 동인채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본 자들이다. 그런데도 예수의 살아나심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의 말은 무조건 믿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 만약 베드로나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예수를 보았다 하면 그들은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나 또 자기들만 살겠다고 엠마오로 길을 떠난 두 제자에게 친히 보이셨다니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으로서는 믿겨지지 않았다.

 

IV. 무엇을 믿는가?

예수께서는 자기 살아 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을 꾸짖으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매우 주의하여야 할 부분 중에 하나다. 만약 남들이 본 것을 전했을 때 믿을 수 없었다면 복음은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복음의 증인 곧 예수와 함께 한 제자들의 증거를 통해서 믿는 것이다. 그런데 주께서 친히 세우신 사도들이 자기들 중에 자기들보다 연약한 자들의 증거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말에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다. 또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도 있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인간의 심리에서 나온 말들이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보지 않으면 좀처럼 믿지 못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형제들에게 내가 전에 말한대로 갈릴리에서 너희를 볼 것이라는 말을 전하라 하셨다. 이 말씀은 마지막 유월절을 먹던 식탁에서 떡과 포도주를 떼시며 하신 말씀이다(막14:28). 불과 사흘전에 하신 약속의 말씀인데 그들은 그 말씀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불신앙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느냐에 대해 감각을 잃은 것 같다.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예배 드린다 봉사한다는 개념을 갖고 있어서 내가 정작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를 잊고 있다. 다시 말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설교를 듣되 모두 지난 간 역사에 대한 증거와 자신들의 현실적 축복의 기원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분명한 한 지점을 향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의 나라를 제시하고 있다. 그 영광을 얻기 위해 우리는 지금 주의 사도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살피고 우리의 천국 행로를 방해하는 자들로부터 주의 백성들을 구원하여야 하는 것이다.

 

V. 불신앙의 댓가.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불신앙이 가져온 결과를 생각해 보자 먼저 그들은 슬퍼하고 있었다. 주님은 사람들은 애통할 것이나 너희는 기뻐할 것이다 하셨는데 그들은 슬픔과 실의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떨고 있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너희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유의해 보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며 길쌈도 아니하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을 누릴 때도 이 들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도다.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앗을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곡물창고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하셨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오는 가장 큰 대가는 영혼의 멸망인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말씀을 뒷전에 두었다가 결국 불신앙의 조상이 되어 죽어야 했다. 또 노아시대에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전하셨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 외의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하여 모두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때 멸망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셋과 에녹과 같은 위대한 조상을 둔 믿음의 후손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약속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매다가 약속하신 땅을 들어 가지 못하였다. 사실 그 약속은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하신 성경의 말씀이기도 하다.

 

오늘 만약 이 말씀을 들은 당신은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배도 중요하고 찬송도 중요하고 봉사도 중요하고 전도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에 있는 것인데 당신은 남을 구원하고 자신 멸망을 받는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경은 둘째 사망에 대하여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가증스런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하는 자들과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믿지 않던가 우상을 섬기는 불신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음행을 행하는 자들이나 마술하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음행은 성적 행위를 말한 것으로 성경은 몸의 행실에 대하여 상당한 경고를 하고 있다.

 

또 마술이란 상업적 행위를 포함한다. 다시 말하여 요즘 모든 상업적 행위는 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유혹하여 자신들이 만든 상품에 미혹되게 만든다. 계시록 18장24절에는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기록하였다.

 

여기서 믿는 우리가 한가지 주의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확신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열방의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그는 네게 아들을 낳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 사라의 말을 믿는 바람에 이스마엘을 낳아야 하는 불신앙을 겪어야 했으며 또 백살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름을 받을 때에 사울을 통하여 목숨의 위험을 받아야 했으며 육체를 이기지 못하여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짓기도 하였다. 또 다니엘과 그 동무 세 사람은   무섭게 타는 풀무 속에서 믿음의 시험받았으며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져야 했다.

 

오늘날 주의 오심을 위해 부름받은 당신의 믿음도 시험받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시험 속에서 고난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기쁨을 배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시려는 뜻임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