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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5:9) REDEMPTION(다시 찾음)

이요나 2007. 2. 24. 13:28

(계시록5:9) REDEMPTION(다시 찾음)

 

(계5:9,10)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여러분은 단 한번의 실수로 자신의 소유 권리가 포기되어 영원히 남에게 빼앗겨 버린 것들은 없었던가? 만약 그것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더구나 그것이 조상이나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기업일 경우 그 애통함은 평생을 두고 후회되는 아픔이 될 것이다. 누가 복음에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소개 되어 있다. 또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찾은 여인의 기쁨이 소개되어 있으며 돌아 온 탕자를 맞는 아버지의 기쁨이 소개되어 있다. 오늘 우리는 이 기쁨을 함께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빼앗긴 당신의 소유권리를 다시 찾게 되는 기쁨을 누리가 바란다. 

 

우리는 4장에서 하늘에 올라 네 생물들의 인도를 받으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24장로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완성 된 영광스런 교회의 모습이다. 오늘 5장은 그 연장 페이지로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그 시작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6장에서부터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 땅을 더럽혀 왔던 파괴자(abaddon)와 그 추종자들을 심판하는 과정이 기록되고 우리는 19장에서 천년왕국의 전야제에 참석하게 된다. 이 일들은 이제 곧 우리 눈 앞에서 전개될 일로서 나는 이 메시지를 듣는 당신이 이 땅에 남아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I. 하나님 오른 손의 두루마리(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1)

 

지금 사도 요한은 하늘에 있어 그의 눈은 하늘 보좌를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몸이 사실 하늘에 있었던 것인지 땅에 있었던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바울은 자신이 삼층천 하늘에 이끌려 갔을 때 자신의 몸이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체험해 보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하늘에 속한 비밀일 것이다.

 

 요한이 본 것은 보좌에 않으신 이의 오른 손에 있는 책이었다. 그 책은 안팎으로 씌여져 있었고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다. 여기서 책이란 두루마리로서 고대문서에 속한 것이다. 고대의 두루마리들은 나일강 삼각주 유역에 재배되던 갈대로 만든 최초의 종이로서 파피루스라 불렀다.

 

  A. 두루마리

흥미롭게도 이 두루마리는 오늘날 우리의 성경책처럼 양면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또 일곱 인장을 찍어 봉해져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두루마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 성경적 해석은 결국 성경 속에서 찾아 볼 수 밖에 없다. 아마 사도 요한은 이 두루마리를 보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성경에서 두루마리가 처음 소개된 것은 에스겔서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내가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겔2:9,10) 하였고 다시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3:1-3) 기록하였다. 사도 요한은 이와 흡사한 체험을 계시록 10장에서 다시 소개하고 있다.

 

  B. 봉한 책

여기서 봉해진 책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하나는 그 두루마리를 아무나 열 수 없다는 의미와 또 하나는 그 내용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여 소유권자에 속한 비밀문서인 것이다. 로마시대의 유언장은 일곱 사람의 증인이 도장을 찍어 봉인하여 그 유언장은 날인한 도장을 가진 일곱 사람이 법정에 서야만 열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극비 문서라고 하겠다.

 

따라서 여기서 봉한 책이란 아직까지 수행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으로 인을 떼고 책을 편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의 논란이 있었지만 이것은 아직은 성취되지 않은 일로서 사단에게 넘겨진 이 세상의 소유권 증서일 것이다.

 

  1. 사단의 세상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사람 아담을 지으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그들에게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기 위함이었다(창1:26-28). 이를 마치신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1:31) 하셨다.

 

그리고 주께서 지으신 생령 된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아가기 위해 동산 중앙에 세우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명령을 지키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을 받은 하와는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고 그 남편 아담까지 넘어지게 하였다. 그로 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죄악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모든 인간의 조상이 되었다. 그 후 이 땅과 그에 속한 모든 권세는 사단이 주관해 온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성령세례를 받으시고 40일간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5,6) 하였다. 이 때 주님은 사단의 말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14:30) 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고후4:4) 하였다. 이미 사단은 세상의 신으로 군림하여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사단으로 오는 명령만을 받게 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떠나면 당신은 사단의 메시지를 받게 될 것이다.

 

2. 토지 무르기

하나님께서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3:7) 하셨다.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모든 비밀들을 여는 첫번째 열쇠가 되는 말씀이다. 따라서 계시록의 모든 비밀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속에서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구약에 능통한 사람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세움을 받아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충만함을 받아 자신에게 계시된 모든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특별히 4장과 5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 요한의 영적 상태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조율하며 그 말씀의 깊이를 음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의 소유권에 대하여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25:23) 하셨다. 따라서 이 땅은 영원히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에게 기업으로 물려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 수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 갈 것이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 올지니 그가 곧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25:23-28)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기업으로 받은 토지의 소유권을 7년이 되는 해가 되면 언제고 다시 무를 수 있게 하셨다. 그 이유는 이 땅의 소유자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능력이 없어 투지를 무를 힘이 없을 경우에는 50년이 되는 희년에 다시 소유를 돌려 받아 기업으로 돌아 갈 수 있게 하셨다.

 

이 일에 대한 예증이 실제로 룻기에 기록되어 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 흉년이 든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에 기거한 유다 지파의 엘리멜렉의 처 나오미의 며느리다. 남편과 아들들의 돌연한 죽음으로 나오미는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는 과부 된 며느리 룻을 데리고 유다 땅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나오미가 그 남편과 유다를 떠날 때 기업으로 받은 땅은 다 팔았고 또 아들이 없음으로 막상 희년이 된다 해도 기업을 이어 갈 수 없었던 나오미는 엘리멜렉의 친척 중 보아스에게 며느리 룻을 주어 그 대를 잇게 하고 보아스로 하여 토지 무르기를 실현시켰다(룻4:1). 이 보아스는 가나안 기생 출신인 라합이 살몬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서 룻을 아내로 맞아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다윗의 아비인 이새를 낳아 그리스도의 조상에 올랐다(룻4:19,20, 마1:5).

 

3. 노예의 구속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또 하나의 흥미로운 법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형제들을 이방 노예처럼 종으로 부릴 수 없고 또 종으로 팔리더라도 6년 동안 종 노릇을 하다가 7년이 되는 해에는 자유 하였으며 또 형제가 빈곤하여 이방인에게 종이 되면 근속이 그의 몸값을 갚고 되 찾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게 하셨다(레25:47-55)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러한 율법 속에는 오묘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깃들어 있는데 첫 사람 아담에게 주어졌던 땅의 소유권이 사단에게 넘어간 것은 성경상으로 계산할 때 6천 년이 된다. 그 후 사단은 지금까지 6000년 동안 이 땅에 속한 세상을 지배하였고 이제 곧 세상은 7000년을 맞게 된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혈과 육을 가진 인간으로 보내시어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죄값을 십자가 위에서 치르시게 하심으로 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셨고 이제 정하신 7000년이 이르면 이 땅은 아담의 가장 가까운 친속의 자격으로 토지 무르기를 하실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 시작의 감격적인 순간을 접하게 된다.  

 

II.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 (2-5)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입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2-5)

 

A. 천사의 질문

사도 요한이 본 힘 있는 천사란 과연 누구일까? 이 힘센 천사는 계시록 10:1절과 18:21절에 다시 소개된다. 이 힘센 천사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앞으로 더 살펴 보아야 할 것이지만 10장과 18장의 내용으로 보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예정된 일들을 실제적으로 실현시킬 천사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힘센 천사가 실제적인 사람으로 나타날 것인지 또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 이 땅에 임할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힘센 천사가 사단의 영역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예정하신 일들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것이다.(10:7, 18:20)

 

힘센 천사는 큰 음성으로 누가 책을 펴며 누가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고 외쳤다. 여기서 합당이란 말은 능력과 권세에 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의로움에 속한 하나님의 공의를 말한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도달하는 최고의 도덕적 기준을 의미한 것이다.

 

 1. 요한의 눈물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책을 떼거나 펼 사람이 누구냐 외치는 천사의 물음에 사도 요한은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기에 합당한 이가 없음을 보고 크게 울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다는 증거로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일의 결말을 성취할 사람이 없음을 보고 애통한 것이다.

 

학자들은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고 펴는 것은 사단에게 빼앗긴 이 땅을 다시 찾는 것을 말한다고 말한다. 나도 이 학설에 공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이것을 몰라서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로 세움을 받아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의 애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주께서 이미 자신의 피를 흘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셨지만 이제 하나님의 예정하신 때가 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 오르고 이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사단의 손에서 다시 찾아 원래의 주인의 손에 돌아 가게 하여야 하는데 이 땅의 사람들 중에 그 일을 실행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께서 생전에 내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처럼 세상은 극히 악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극에 달하였고,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와 그리스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때를 면하여 하늘 위로 휴거 된 상태이다. 이 지음에 도달된 이 땅의 토지 무르기에서 그 위대한 임무를 수행할 사람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죄 없이 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처럼 죄가 없는 사람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요한 자신이 거룩하심을 입은 사도라 해도 그는 원초적으로 죄 속에 속한 사람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B. 장로의 답변

그때 장로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5) 하였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가? 흥미롭게도 이 메시지는 장로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왔다. 이 장로는 이십사 장로 중의 한 사람으로 이 땅에서 유대의 사자 곧 다윗의 뿌리를 목격하고 그의 구속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자가 틀림없다. 그가 말한 내용들은 모두 성경적 조명과 해석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기었다 라는 말은 이미 일곱 교회의 권고에서 주어진 단어로서 여기서는 과거시제로서 사용된 법정용어로서 판결문이다. 이 싸움은 아담의 범죄 이후 이 땅이 존재한 이래 멈추지 않았던 전쟁이다. 이것은 이미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단판 승부로 결판이 났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셨다

 

1. 유대지파의 사자

유대지파의 사자란 참으로 흥미로운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감추어진 퍼즐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그의 열두 아들 곧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대한 예언을 하였다.

 

야곱은 유다를 향하여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9,10) 예언하였다.

 

유대지파의 조상인 유다를 가리켜 새끼사자라 칭하였으니 이는 그 지파 중에 사자가 있다는 것이며 또 다윗의 뿌리라 하였은즉 다윗에게 언약하신 다윗의 위를 지탱하신 뿌리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이사야는 이미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11:1) 라고 예언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이며 감격스런 성경해석의 실마리인가? 바울은 이 감격을 노래하여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롬1:3,4) 증거하였다.

 

III. 하나님의 어린 양(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음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6)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네 생물과 장로들이 서 있는 위치를 언급하였다. 이것은 3,4절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계시록을 이해하는 기초적인 토대가 된다. 여기서 다시 말하지만 4장과 5장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 교회들이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 들림을 받은 후의 일이다. 따라서 충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 된 이십사 장로들은 면류관을 쓰고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를 향하여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사도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4장에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를 향하여 앉은 이십사 보좌에 앉은 장로를 보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5정에서 하늘 보좌에 구성된 또 다른 구심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선 어린양이다. 이것은 동시에 볼 수 없는 우리의 한계를 위해 보좌의 시야를 확대 시킨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서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종전의 가르침과대치되는 기록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완성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서 계신 어린 양은 어린 양으로서의 최종적으로 하실 일들.. 하늘 보좌에서는 이루어졌지만 아직 이 땅에서 이루지 않았던 하나님의 예정들이 시행되는 시점이다. 이와 같이 스데반 집사는 그의 맡은 일을 마치고 하늘에 오를 때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증거하였다(행7:55).

 

A. 어린 양의 죽음

장로는 먼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선 어린양을 소개하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왜 사도 요한이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어린 양이라 하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다는 장로의 증언 속에서 이미 성경에 소개된 어린 양에 대한 많은 내용들을 생각하게 된다. 성경에서 어린양은 처음부터 대속의 역할로서 아벨의 제사에서 그 기원을 찾게 된다. 또한 이 일은 출애굽기 12장 3절에 구체화 되어 애굽의 종살이 된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한 피의 제물로 소개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에서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예언하여 그는 주 앞에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하였다. 계속하여 이사야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은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2-3) 증거하였다.

 

계속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지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하였으며 다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기록하였다. 이는 장차 이 땅에서 멸시와 곤고를 받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예언한 것이다.

 

  1. 계시의 완성자 어린 양

신약에서 어린양이란 단어는 29번 이상 소개되고 있는데 계시록에서 24번 기록되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의 어린양이란 단어는 신약에서 소개하는 어린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소개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상 짐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 하였고 베드로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1:19)라 소개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앞에서 사용한 단어는 모두 암노소(amnos)이지만 여기서 아르니온(arn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으므로(렘11:19) 라고 증거한 예레미야서에서 사용된 것으로 사도 요한은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하여 어린양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시사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은 앞서 말한 내용을 부인 하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어린양으로만이 아닌 계시의 완성자로서의 어린양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B. 일곱 뿔과 일곱 눈

요한은 어린양과 함께 일곱 뿔과 일곱 눈을 보았다. 일곱 뿔이란 권세를 나타내는 성경용어로서 절대 능력과 권세를 의미한다. 스가랴 선지자는 환상 중에 이스라엘을 멸망케 한 네 뿔의 이상을 보았다(슥1:18). 그 네 뿔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나라들이다. 또한 뿔은 높이 들린 명예를 의미한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자기의 뿔이 높이 들림을 받았다(삼상2:1) 하였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뿔을 높이실 것이라 찬양하였다(시80:17, 148:14).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일곱 뿔이란 하나님의 절대 능력과 권세를 말한다. 이것은 어린양이 일찍 죽임을 당함으로 얻으신 능력으로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롬1:4) 증거하였다.

 

또한 요한은 일곱 눈을 보았는데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성령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이미 요한은 보좌 앞의 일곱 등불을 일곱 영(5)이라 소개한바 있다. 이는 하늘 보좌에서 세상을 밝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등불임이 틀림없다.

 

 스가랴 선지자는 보좌 앞의 일곱 등을 보았는데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슥4:10)라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세상의 밝히는 하나님의 등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살피는 그리스도의 눈인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보좌에서 그의 진리의 영으로 세상을 밝히고 계시고 또 그리스도의 영으로 세상을 살피고 계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돕는 보혜사를 가리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영이라 하셨고(요14:17)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나를 증거하리라(요15:26) 하셨다. 또한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 일을 알리시리라 하셨으며(요16:13) 진리를 가리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다(요17:17) 하셨다.

 

IV. 어린양의 진노 앞의 교회의 중보

어린양이 나와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더라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7-8)

 

A.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부복한 이유

요한은 어린양이 나아 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인가? 이제 하나님의 지으신 영화로운 땅의 권리문서를 다시 되찾는 순간이다. 아담의 죽음으로부터 수천 년에 걸쳐 상실된 이 땅과 그 속에 속한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하나님께 돌리는 순간인 것이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이 책을 취하실 때 엎드렸다는 것은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이제 곧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벨의 피 흘림으로부터 이 땅에 피 뿌림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의 원한을 갚기 위한 어린양의 진노하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1. 거문고로 마음을 감동시키자

그런데 흥미롭게도 요한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의 손에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진 것을 보았다. 더군다나 각각이란 의미는 더욱 우리의 눈을 집중시키게 된다.  과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비밀을 알기 위해 구약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거문고란 고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하프와 같은 악기로서 사람의 심기를 북돋기 위해 위해 사용되었다. 거문고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곳은 열왕기하에 기록된 선지자 엘리야 시대이다.  아합이 죽은 후 그 아들 여호람 때에 하나님께서 모압을 들어 이스라엘을 치고자 하실 때이다.

 

북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배반한 모압을 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을 청하여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이 에돔 광야에 이르자 말에게 먹일 물을 얻지 못하여 전쟁은 해 보지도 못하고 패하게 되었다.

 

여로함이 엘리사의 책망을 받기 싫어 하였으나 유다왕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할 선지자 엘리사를 청하니 엘리사가 이르러 내가 만일 유다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않았다(왕하3:14) 말하며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서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다(왕하3:15,16) 전하였다.

 

또한 거문고는 계시록에서 여러 번 소개되고 있다. 요한은 15장 2절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으며 또 18장 22절에서 힘센 천사가 맷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바벨론에서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라는 소리를 들었다.

 

또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남용하는 고린도 교회 지도자들을 향하여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이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고전14:7) 하였다.

 

이와 같이 거문고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 시키는 악기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감동이 그의 종 된 사역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기쁨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선지자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찬양할 자들을 제사장의 반열에 중용하여 날마다 새로운 찬양이 끊어지기 않게 하였다.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예배시 찬양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서는 모든 악기는사단의 부속물이라 하여 드럼이나 나팔이나 기타들을 금하는 곳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땅에서 거두는 곡식도 먹어서는 안될 것이며 믿지 않는 자들이 생산하는 의식주에 속한 것을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미 많은 교회에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 시키는 음악 소리가 멈춘 지 오래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군들에게서 사역의 기쁨이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모든 교회가 인위적 거룩함과 지식문화에 빠져 고전 찬송가만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흐르는 물을 막는 것이며 시대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멈추려는 사단의 책략일 것이다.

 

갈보리채플은 찬양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나 역시 찬양에 감동을 받지 못하면 메시지에 힘을 얻지 못할 때가 많다. 1960년대 사단 문화권 속에서 방황하던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금세기 교회의 모델을 일으킨 갈보리 채플은 찬양을 매우 중요시 하고 있다. 모든 교회들이 100여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음악을 선호할 때 갈보리채플은 그 당시 젊은이들이 좋아하던 록 리듬의 찬양을 예배에 등장 시켜 오늘날 프레이즈의 선봉장이 되었다.

 

 B. 성도들의 기도

그러면 금대접에 가득한 향은 무엇일까? 그 향이 얼마나 귀한 것이기에 금대접에 담았을까?

하나님은 아론에게 하나님의 성전에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향을 피워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하게 하였다(출30:7). 또한 잠언 기자는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나니 친구의 충고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27:9) 기록 하였다.

 

 1. 아브라함의 중보

우리는 창세기 18장에서 타락한 소돔을 멸망키 위해 보내신 세 천사를 맞는 아브라함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때 그의 선지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이다(창18:17).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을 향하여 떠나기 전에 그들을 맞이하여 최고의 식탁을 베풀고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아직 소돔성에 살고 있을 하나님의 의인들을 위해 여호와께 의인을 죄인과 함께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님을 당부하였다(창18:25). 또한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18:29) 기록하였다.

 

  2. 기도의 목적

주님은 제자들에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것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라 하셨다. 이것은 이 땅에 거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의 거룩한 일과 행실과 공의를 성취하기 위한 중보를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불의한 재판장 앞에 자신 억울함을 강청하는 과부를 비유로 사람이라도 자기 아들에게 좋은 것을 주거늘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3. 성도의 중보

만약 당신의 동생이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계속 방탕 된 생활을 할 때 더 이상 아들의방종을 묵과 할 수 없는 아버지가 아무도 감당 할 수 없는 엄한 벌을 들고 타락한 아들 앞으로 나가려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진노한 아버지의 마음을 좀 누구려 뜨려기 위해 그의 기쁨을 위해 거문고를 울려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밖에서 아직 고통 중에 있는 나의 형제를 위해 이제라도 그들이 아버지의 합당한 뜻 가운데 돌아 와 있기를 기도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하여 바울은 성도들 향하여 항상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도하라 명하였다.

 

V. 새 노래(9-14)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하더라(9-10)

 

여기서 새 노래란 시간적인 의미(neos)를 말하는 새 노래가 아니라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새개념(kainos)의 노래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전무후무한 개념을 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새 노래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새로운 깨우침을 제공하는 지식과 지혜를 시사하고 있다.

 

이해를 위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근의 일들을 생각해 보자.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사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역사 속에 숨겨진 일들을 파헤쳐 그 진실을 바로 세우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 그로 하여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명단이 속속 들어 가고 있고 그 위치에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는 좌파적 활동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 인간은 그 족속과 방언과 나라를 따라 모두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역사들은 자기들 뿐이 아니라 세계의 위대한 유산이 되어 찬란한 문화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찬란한 역사들은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 조명되고 발굴되어 그 진실이 들어난 것이지 오늘날 우리 정부가 파헤치고자 하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과거사 진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구호 속에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정치적 속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살아 온 발자취를 후대 사람들에게 역사로 남기고 그에 대한 진실은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과 모든 물질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등불이 그 모든 진리를 밝혀 나간다. 그러므로 성경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하는 일들을 보자. 과연 우리가 바라보고 살피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노래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하심 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나간 일들을 돌아 보는 과거사 청산과 같은 것이다.

 

한 예를 들어 칼빈주의나 알마니안주의와 같은 신학사상 속에 근거를 둔 성경학자와 또 그를 추종하는 교회들의 주장을 보면 그들은 칼빈주의나 알마니안주의의 속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도리어 앞선 자들의 발 뒤꿈치를 물어 당기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토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에 사로잡혀 잘못된 길로 달려가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 베드로는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하였고 다시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0,21) 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말씀은 과거와 현재에 속한 미래를 향한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를 가리켜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속에서 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뜻을 따라 성취하시는 발걸음을 쫓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것이다.

 

봉인된 일곱 인을 떼시기 위해 하나님 오른손의 책을 취하신 어린양을 향한 찬양은 세 부류로 나누어졌다. 그들의 선두에는 단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앞장 서 있고 그 다음에는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천사들이며 그리고 하늘 위와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 위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들의 찬양이 이어졌다. 따라서 이 찬양 속에는 성취하심이 모두 포함되어 있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와 찬양은 오늘에 있는 것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제와 이제와 내일을 향해야 할 것이다.

 

A.     교회의 노래

먼저 우리는 네 생물과 장로들이 그들은 왜 어린양이 인봉 떼기에 합당하다고 하였는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어린양이 책을 가지고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공의

여기서 합당이란 거룩한 공의를 말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에 오르실 때에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기 위해 맹세로 임하신 거룩하고 죄에서 떠나 계신 예수를 가리켜 이러한 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다 기록하였다(히7:20-27 참조)

 

만약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제사장이 거룩한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지 않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린다면 그의 판단은 공평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할 수 있는 분이 천상천하에 어디 있겠는가? 오직 의의 표상이시며 성결의 영으로 부활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인 것이다.

 

  2. 순교자

두 번째로 그들은 일찍 죽임을 당하심을 찬양하였다.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순교 당하심을 언급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삼십의 꽃다운 나이에 죽임을 당하셨다. 그것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세상에 밝히고 사신 것은 고작 3년 남짓하였다. 그에 비하여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 복음을 누리고 있다.

 

  3. 자기 백성을 피로 사심

계속하여 그들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다 하였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버려 남을 구한다는 것은 자기와 어떤 직접적인 관계를 갖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도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 다시 말하여 각 족속과 나라말과 백성과 나라 속에서 아직 보지도 알지도 못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주기 피를 흘린다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 일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 할 때 이 일은 정말 찬양 받으실 일이다.

 

   4. 제사장 삼으심

끝으로 그들은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노래하였다. 이것은 정말 우리의 머리를 돌로 내려치는 듯한 감격스런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 앞에 나라와 제사장을 삼는다는 것은 오직 천하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나라이 임하옵시며로 시작된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다. 여기서 나라란 가공된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던 것 같이 이제 온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 속한 자들인 누구인가 생각해 보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 대리인이다. 원래 제사장은 레위에 속한 아론의 자손에게 주신 직분이었다. 이 영광은 아무나 취할 수 없는 영광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6:20) 기록하였다.

 

  2. 왕으로 삼으심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인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하였고 바울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딤후2:12) 하였다.

 

또한 계시록 20장6절에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하였고 다시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22:5) 기록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를 받은 자들이 누구일까 이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세상의 환난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심을 받은 성도들이 아닌가? 요한은 지금 이들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요한은 이미 계시록 1장6절에서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기원하였다. 지금 요한은 5장에서 자기의 기원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B.     천사들의 노래

11절에는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기록되었다.

 

이 노래는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수많은 천사들의 노래이다. 요한은 이들의 수를 가리켜 만만이요 천천이라 하였다. 이것은 사람의 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수를 언급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천사들에 대하여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1:14) 기록하였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땅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 돕는 수많은 천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우리의 생각처럼 날개를 달고 허공을 나는 허상의 존재들이 아니라 실제로 증인들이 만난 존재들이다. 천사들은 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원하기도 하고 선교의 방향을 잡지 못해 방황하는 바울을 마게도냐로 보내기도 했다

 

천사들은 네 생물과 장로들의 찬양과 달리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것들 곧 이 땅에서 하늘에 속한 아름다운 것을 노래하였다. 흥미롭게도 여기에 기록된 능력,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은 모두 하나의 정관사 속에 속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 모든 것을 이루는 능력을 말한 것이다. 

 

천사들은 먼저 능력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것은 어쩌면 역설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다.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은 모든 것에서 끝난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죽임 당하신 예수를 가리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롬1:3) 증거하였다. 죽음이란 모든 것으로부터의 끝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에게 있어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 땅에 사망에서 생명을 찾을 자가 누구인가? 다윗은 사망에서 주를 찬양할 자가 없다 하였다.

 

천사들의 두 번째 찬양은 부와 지혜와 힘이다. 이것은 사실 모든 것이 완성된 하늘나라에서는 불 필요한 것이다. 이것들은 부족함을 채우는 능력의 도구이다. 이것은 장차 주께서 이 세상에 임하실 때 한계 속의 세상의 부족함을 친히 채우실 것을 노래한 것이다.

 

세 번째로 천사들은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노래하였다. 이것은 4장 11절에서 이미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드리는 찬양으로서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그의 뜻대로 운행하실 자의 존귀와 영광과 그에게 있을 찬송을 노래한 것이다,. 

 

C.     만물들의 노래

천사들의 노래에 이어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였다. 여기서 만물 곧 피조물들이 인격화 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하였고 다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으로는 것이라 피조물도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19-23) 증거하였다.

 

하늘이나 땅이나 바다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것이다. 이사야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 위에 가득하도다 증거하였다. 그러나 장차 우리 앞에 올 세상은 온 땅 뿐이 아니라 하늘 위와 땅위와 땅 아래 그리고 바다 위의 모든 만물들이 주를 향하여 찬양할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왕노릇 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곧 당신이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당신의 삶이 되어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 장에서부터 장차 이 땅에 펼쳐질 하나님의 진노를 살펴 보게 될 것이다. 부디 이 일들이 있을 때 나는 당신이 내 옆에 서서 금대접에 향을 채워 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 아멘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