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4:11)예배의 완성과 정의
(계4: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만약 누가 당신에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무어라고 답할 것인가? 어쩌면 당신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고 어쩌면 명예를 얻기 위해서라고 답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한 이래 이 두 가지를 성취하여 만족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만약 그들이 만족을 하였다면 자신들이 성취한 부귀영화를 우리 모두에게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나에게 당신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을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나를 지으셨고 내 바라는 모든 소망이 그의 영광 속에 있으며 그분만이 존귀와 능력을 받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1장 19절에서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하셨다. 이에 요한은 1장에서 자기가 본 것들을 기록했다. 영화로운 모습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른 속에 일곱 별을 들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서 계시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이어서 2장과 3장에서 현재 있는 일들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앞에
서 살펴 본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이다. 이 교회들은 긴 시
간 속에서 이 땅의 교회사 속에 펼쳐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바 세 번째 단계를 살펴 볼 차례이다. 이 단계를 살피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기록된 말씀과 함께 하늘의 공간 속으로 들어 가는 일이다. 이 기간은 상당히 긴 여행으로 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가 된다.
이 세 번째 부분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계시록 4과 5장에는 이 땅에서의 교회의 사역이 완성 된 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교회의 영광이 기록되었으며 6장부터 18장까지에는 이 땅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그리고 19장부터 22장까지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1)
사도 요한이 먼저 본 것은 하늘의(In Heaven) 열린 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에 열린 문’이란 마지막 때의 거룩하고 진실된 자들의 교회 빌라델비아에 보내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연상시켜 주는 구절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다. 이제 이 문이 하늘에서 열리고, 나팔소리 같은 음성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 앞에 열려 있는 하늘을 보았다.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겔1:1) 하였고,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을 보셨다(막1:10).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셨고 제자들은 실제로 그것을 보았다.(요1:51, 막9:4).
또한 우리는 주님이 승천 하신 후 실제로 하늘의 열린 광경을 본 증인 스테반을 알고 있다. 스테반은 ‘스테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으로 보노라’(행7:55,56) 증거하였다.
A. ‘이 일 후’ (meta tauta)
흥미롭게도 ‘이 일 후’라는 말은 주께서 이미 말하신 바 1장 19절에서 언급되어 있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이후에 있을 일을 기록하라’(KJV) 하셨다. 따라서 ‘ 이 일 후’란 이 땅에서의 교회시대가 끝난 후의 일로서 2장과 3장에서 교회에 관한 일들을 언급 하였으므로 4장 1절을 이에 입각해서 정리한다면
”교회에 관한 이 일들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메타 타우타’가 여기서 또 한 번 나온다)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나는 이 구절이 교회의 휴거를 묘사하고 있으며, 나팔소리 같은 음성은 성도들을 올라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라고 믿는다. 이미 바울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KJV-눈 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2) 하였으며,
다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증거하였다.
B. 나팔소리 같은 음성
이어서 요한은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들었다. 이 음성에 대하여 요한은 1장10절에서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들으니’(1:10)라고 증거한 것과 같은 음성이라 하였다. 이 때도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었었다.
1. 올라오라
우리가 요한이 들은 나팔 소리 같은 것이 어떤 소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기상
나팔이나 취침 나팔 소리와 같이 나팔 소리들이 상징하는 여러 가지 암호를 알고 있다. 이
처럼 요한이 들은 나팔소리 같은 음성은 약속된 그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복음의 메시지
일 것이라 생각한다.
요한은 먼저 ‘이리로 올라오라’는 소리와 함께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는 음성을 들었다. 나는 여기서 ‘올라오라’는 말씀은 교회의 휴거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주께서 말씀하신 이 일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네게 보이겠다 하셨고, 마땅히 될 일이란 이 땅에 임할 대환난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에서 일어날 일들을 하늘에서 보고 있게 될 것이다.
2. 대환난의 경고
주님은 이미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그 교회의 일부가 대환난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여 그가 예수님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것을 책망하셨다.
여기서 자칭 예언자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왕후로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에 450명의 바알신의 예언자를 키웠다. 나는 이 문제를 오늘날 우리 교회의 커다란 모순이 되고 있는 신학교 시스템에서 조명하고 싶다. 택하심과 부르심과 관계없이 성령의 세례가 아닌 세속적인 방법으로 목사들을 양산하는 문제를 주님은 결코 관망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가 회개치 않을 경우 큰 환난에 던질 것이라 기록 하였다. 이 경고의 메시지는 회개를 하든지 대환난을 겪든지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시사되어 있는 것은 회개할 경우 대환난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휴거의 예고
계시록 3장 10절에서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르시기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하셨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주님의 교회가 대환난을 피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주의 경고의 메시지를 외면한 교회들은 대환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두아디라 교회가 그의 뜻을 따라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에 속한 사람들은 반드시 휴거의 때를 놓치고 대환난을 겪게 될 것이다.
C. 마땅히 될 일
주님은 이 일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셨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땅에 임할 예고된 대환난이다. 따라서 요한이 6장 이후에 기록한 내용들은 모두 그가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일들은 물론 교회의 휴거 후에 발생될 일들이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진실된 성도들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결코 대환난은 오지 않는다. 휴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이 세상으로부터 낚아 채어 올리신 이후에 일어날 것이다.
그 일은 이미 주께서 예고하신 바와 같이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성도들이 교회의 휴거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전혀 다른 사건임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II. 하늘의 보좌(In Heaven)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2-3)
이제 우리는 흥미롭게도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의 장면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하늘나라는 가상적인 세계였는데 요한은 자신의 눈으로 본 하늘나라의 광경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여러분들은 요한의 눈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광경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가서 촌뜨기처럼 우왕좌왕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것은 성령충만의 상태를 말한 것으로 하늘나라는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우리가 능히 볼 수도 들어 갈 수도 없는 세계임이 틀림없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임하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현존하는 물질세계와 영적세계가 서로 다른 분자구조로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보아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 밖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서로 구조가 다른 체제 속에서 공존할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볼 수도 들어 갈 수도 없는 특별한 영적 세계 임에는 틀림없다.
A. 보좌에 앉은 이
요한은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하여 하늘에 베풀어진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았다. 여기서 요한은 그분이 누구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다만 요한은 자신의 눈으로 본대로 증거하였을 뿐이다. 나는 요한이 본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삼위일체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은 그분을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다른 형상(이미지)로서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석으로 보이신 것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1. 벽옥과 홍보석
요한이 본 보좌에 앉으신 이의 형상은 지상에서 최고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뽑 내는 보석들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그 보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정 할 수는 없지만 이미 기록된 성경의 메시지를 통하여 각 보석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의미를 체감할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꼭 지켜야 할 원칙 중 하나는 해석의 불변성 중의 하나는 최초의 사용법칙이다. 다시 말하여 성경에서 창조라는 말의 뜻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창조라는 말이 성경상 제일 먼저 나오는 부분 곧 창세기 1장 1절의 해석을 그대로 사용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해석의 불변성 원리이다.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보석들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실용적 아이콘으로 보여 주는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 사람의 형상이 루비나 사파이어 또는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 같았다 한다면 그 사람의 성품의 고귀함과 맑고 정함의 가치를 가히 짐작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벽옥과 홍보석과 같은 보석들이 처음 기록된 곳은 출애굽기 28장 17절이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이름을 새겨 넣은 열두 보석은 제사장의 흉패의 두었으며 벽옥과 홍보석은 열두 보석 중의 처음과 마지막에 해당하는 보석이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계시록 21장 19절에서 하늘로부터 내려 온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열두 기초석을 보았는데 요한은 ‘그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14) 기록 하였다.
계속하여 요한은 그 성곽은 벽옥으로 둘러 쌓여 있고 그 성은 정금이며 맑은 유리 같다고 하였으며(18절). 다시 26절에서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 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기록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을 대적한 천사 계명성에게도 나타났었다. 에스겔은 그를 가리켜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겔28:13) 기록하였다.
이 기록들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계시록 4장과 또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자신을 벽옥과 홍보석과 그리고 녹보석과 같은 보좌에 둘린 무지개로 보이신 것은 이 메시지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 천지의 주제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섭리하시는 속성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라 생각한다.
2. 무지개 언약
요한은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를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기록하였다. 우리는 이와 같은 표현을 에스겔서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에스겔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 있던 중 하늘이 열려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다.
에스겔은 1장 26절에서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사람의 모양과 같은 한 형상을 보았는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이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기록하였다.(겔1:26-28)
나는 이 내용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지금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지금 내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보좌 위에 둘려진 무지개다. 이 무지개는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던 의인 노아에게 언약하신 구원의 징표로서 하나님은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3)하셨다. 이것은 불변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이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하심을 얻은 우리는 하늘보좌에 무지개가 있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
B. 이십사 보좌
요한은 4절에서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기록하였다.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하늘의 최고의 권좌 앞에 둘려 있는 이십 사 보좌와 그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앉아 있는 것이다. 이들은 본래 하늘에 속한 영적 존재들이 아니라 이 땅에서 택하심을 받아 그 보좌의 영광에 이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 언약하신 열두 보좌
장로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끌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세웠던 각 지파의 원로들이며 또 신약에서는 사도들과 교회의 감독들에게 부여된 칭호이다(요이1:1, 딤전4:14, 벧전5:1). 따라서 어떤 신학자들은 여기서 이 십 사 장로란 구약의 교회 이스라엘의 대표와 신약의 교회 대표 사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신구약 이분법적인 해석은 소모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구약의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속에 속한 것으로 교회는 성경의 모든 범위를 포함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확실한 증거는 예수께서 생전에 열두 제자들에게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라”(마25:31)말씀 하셨고 또한 “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 눅22:30) 말씀 하신 바와 같이 이들은 주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 세우신 사도를 비롯한 지도자들이라 생각한다,
또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들에게 ‘이가는 그에게는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약속하셨다. 따라서 오늘 요한이 하늘 보좌에 둘려 있는 이십사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은 이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요한은 계시록 21장에서 볼 수 있는데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 온 예루살렘의 성곽의 열 두 기초석을 언급하면서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다 기록하였다. 그러면 왜 열두 장로라 하지 않고 이십사 장로였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르게 이끈 자들에게 약속하신 열두 보좌의 영광을 확정하기 위해 열둘의 배수를 한 것이라 생각한다(마태복음 1장17절 참조).
2. 최후의 승자와 면류관
흥미로운 것은 이들은 모두 흰 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흰 옷이란 의와 거룩함의 상징이며 승리의 표상이다. 요한은 19장 13절에서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기록하였다.
성경에는 여러 면류관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께서 친히 받으신 가시 면류관이 있었으며(마27:29),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 하였다(딤후4:8). 또한 베드로는 그가 오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벧전5:4) 하였고 요한은 시험과 고난을 이긴 이룬 서머나 교회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 하였다(계2:10).
바울은 이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 지니 하였으며 군사로 다니는 자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였으며 경기하는 자의 경기의 법대로 함과 같이 또한 수고하는 인내를 이루는 농부가 되라 하였다(딤후2:3-6).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된 금 면류관이란 최고의 승자에게 수여하는 왕관이 틀림없다.
계시록에는 면류관을 받은 자들에게 대한 내용이 여러 번 소개되고 있다. 먼저 6장 2절에 흰 말을 타고 활을 가진 자가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이기려고 한다고 소개되었다. 나는 이 자는 결코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12장 1절에는 해를 입고 발 아래 달을 둔 한 여자가 열두 면류관을 썼다고 기록되었다. 이것은 수 천 년의 전쟁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지칭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다시 19장 12절에서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며 충신과 진실이라 칭한 백마를 탄 자를 보게 되는데 그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이것은 보나마나 최후의 승자이며 최고의 승리자 일 것이다.
III. 하늘 보좌의 상황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5-6)
A. 번개와 음성과 뇌성
번개와 음성과 뇌성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나타나는 신적 현상이다. 성경에서 이 일이 제일 먼저 임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국가로 삼으시면서 십계명을 주시고자 친히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에 있었다. 모세는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19:16)고 기록하였다.
번개와 우뢰는 떨어질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수분이 증발하여 구름을 이루고 기압의 차이로 발생된 대기의 이동을 따라 큰 구름이 마찰하여 번개와 우뢰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할 수 없는 것으로 하늘과 땅과 바다의 조화 가운데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땅에서 올라 온 물들이 하늘 공중에 모여 번개와 뇌성으로 다시 땅으로 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길을 내었으며’(욥38:25) 기록하였으며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슥10:1) 기록하여 또 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1. 임재하심의 표적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왜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올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의문의 답 중에 하나는 어떤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징조라 할 것이다. 우리말의 인과응보와 같은 말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만약에 하나님이 임하실 때에 아무 기척이 없다던가 또 세상의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 신호가 왔다고 하면 과연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모세는 번개와 뇌성의 임하심을 말하여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라’(출20:20) 하였으며 다윗은 성령에 충만하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시며 번개로 파하셨다’ (삼하22:14,15) 노래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이 땅에 있는 그의 백성들의 잘못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경계와 징계의 표적과 관계가 깊다고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필연적인 번개와 뇌성 사이에 음성이 놓인 것이다.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은번개와 천둥과 음성이라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것이 요한이 상황적 순서를 나열할 것인지 아니면 동일한 위엄을 서술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성경의 번역본의 양립을 동시에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번개와 우뢰는 동시에 나타난 현상으로 다만 소리가 우리 귀에 임하기까지의 청각의 현상일 뿐이다. 다시 말하여 빛의 속도와 소리의 속도의 차이일 뿐이지 하늘에서는 동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번개와 음성과 뇌성은 필연적이고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다.
2. 계시록의 예증
우리는 앞으로 계시록에서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임한 일들을 여러 번 보게 된다. 계시록 8장 5절에는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기록 되었다. 이 일은 하나님 앞에 올린 성도들의 기도와 합한 향연에 단 위의 불을 담아 땅에 쏟을 때에 나타난 현상으로 이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였다.
또한 계시록 11장 19절에는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기록되었다. 이 일은 예언을 하던 두 증인이 죽음을 당하고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 가 구름을 타고 올라 간 후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일어났던 일이다.
계시록 16장 18절에는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 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 같은 큰 지진이 없었더라’ 기록되었다. 이 일은 진노의 일곱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을 때에 있었던 일로서 왕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을 때 있던 일이다. 따라서 이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들 속에서 흥미로운 것은 번개와 음성과 뇌성 다음에 지진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지진이란 하늘에서 있는 일이 아니라 땅의 틀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대적하던 고라와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서 있던 땅의 입을 열어 삼키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좌로부터 나오는 번개와 음성과 뇌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행하실 모든 일들은 필연적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B. 하나님의 일곱 등불
요한이 두 번째로 본 것은 보좌 앞에 켜 있는 일곱 등불이다. 요한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증거하였다. 요한이 보좌 앞의 일곱 등불을 보고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대한 성경적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생전에 주로부터 이 땅에 임하실 성령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사도들은 성령 세례를 통해서 이미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하였다. 이미 그는 계시록 1장4절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참된 증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바 있다. 따라서 보좌 앞의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세상을 밝히시는 진리의 성령인 것이다.
이미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하시며 사람이 등불을 취하여 평상 아래 두기 위함이 아니라(마5) 하셨으며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 하시며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하셨다. 또한 요한을 가리켜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요5:35)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곱 영이 진리의 등불이 되어 그의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C. 수정 같은 유리 바다
우리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 것은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이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 마당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큰 물두멍을 두었는데 이것을 대야라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에 나가는 사람들이 죄의 씻음과 성결이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바다라는 것은 그 속의 깊이와 크기와 관계없이 티나 흠이 전혀 없는 성결과 온전함을 의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죄로 잉태한 인간들이 과연 이 곳에 이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어떻게 이곳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곳은 결코 죄와 허물과 가증되고 속된 것은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다.
요한은 계시록 15장 2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마지막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타날 때 하늘에서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을 보았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이 유리바다는 마지막 심판에 이르기까지 존재한 것임이 틀림없다.
IV. 하늘의 예배(7-8)
“그 첫째 생물은 사자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같고 그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들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7-8)
A. 생물의 얼굴들(겔1:10, 10:14)
요한은 네 생물에 대하여 첫째가 사자 같고 둘째는 송아지 같고 셋째는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는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고 기록하였다. 이 생물들은 이미 에스겔서에서 소개된바 있다. 우리는 이 생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네 생물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룹천사(겔1:10)이며 스랍(사6:2)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에스겔 선지자가 본 네 생물과 요한이 본 네 생물의 순서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에스겔은 1장에는 앞은 사람의 얼굴, 우편은 사자의 얼굴, 좌편은 소의 얼굴, 그리고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라 하였고 10장에서는 첫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세째 면은 사자의 얼굴이요 네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라 하였다.
1. 네 생물의 우선순위
에스겔 선지자는 10장 13절에서 네 그룹들의 바퀴를 언급하면서 그 바퀴들은 도는 것이라 기록하였다. 따라서 네 그룹의 등장과 관련된 수사는 그 예정된 상황에 따라 역사하는 우선순위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기록된 첫째와 둘째, 셋째, 넷째의 생물들은 이 땅에 펼쳐진 교회 속에 역사하는 순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역대 신학자들은 네 생물들을 복음서의 특징에 대비하여 사자를 마태복음에 송아지를 마가복음에 사람의 얼굴을 누가복음에 그리고 독수리를 요한복음으로 적용하였다. 그러므로 어쩌면 네 생물은 세상에 현신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천사는 부리는 영으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하였다. 이를 미루어 보건 데 네 생물들은 그리스도의 승천으로부터 다시 오심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세우신 그의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능이라 하겠다.
2. 구약의 예증
그룹이 성경에서 처음 소개된 곳은 창세기 3장 24절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내어 쫓으시며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과 만나기 위해 설치된 하나님의 지성소에 만나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을 넣은 언약궤를 두셨는데 그 위에 속죄소를 얹고 그 위에 덮는 그룹을 두어 그 그룹 사이에 좌정하셨다(히9:3-5).
이사야는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라 주께서 천지를 창조 하셨나이다’(사37:16) 고백하였다, 또한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 왕을 지칭하여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를 왕래하였도다’(겔28:14) 하였으며 ‘너 덮는 그룹아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내어 쫓았다’((16) 하였다. 이로서 우리는 이 그룹들은 하나님과 그의 성도 사이에서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천사들임을 알 수 있다.
B. 네 생물의 자세
1. 여섯 날개(사6:2)
요한은 네 생물의 각각 여섯 날개를 보았고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이사야 6장에서도 묘사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 앞의 생물들을 가리켜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웠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웠고 그 둘로는 날며’(사6:2)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에스겔 선지자는 네 생물의 날개는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곧게 행하였다(겔1:12) 기록하였다. 이것으로 우리는 보좌 앞의 네 생물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끊임없이 그 맡은 바 사역을 운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날개란 끊임없는 운행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2절에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기록되었다. 이것은 독수리가 그 새끼를 위해 날개를 너풀거림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고 그의 가시는 길은 알 수 없지만 그는 부리는 영들을 보내어 우리 가운데서 계속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2. 가득한 눈(겔10:12)
요한은 네 생물 앞뒤와 눈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이 묘사는 에스겔서 10장에서와 같다. 에스겔은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눈이란 사물과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의 눈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부리는 천사들의 눈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일과 또 그의 교회에 관한 모든 일들을 살피고 계신 것이다.
C. 예배의 주제
네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를 찬양하여 먼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였다. 이것은 분명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계시록에서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성삼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다. 사실 이 지식은 초대교회로부터 많은 이단자들에게 공격을 당해 왔었다.
물론 요한은 보좌의 계신 양과 어린 양과 하나님의 영이라 삼위를 나열하여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적 역할을 나열한 것이지 삼위를 결코 셋으로 나열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누가 내게 나의 영과 혼과 육을 분리하여 보여달라 하면 나는 그것을 능히 보일 수 없다. 그러나 누가 만약 내 영과 혼과 육이 하는 일을 설명해 달라면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1.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 이와 같은 찬양은 이사야 6장에서 볼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선 스럽들이 ‘서로 창화하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는 찬송을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얼굴과 발을 날개로 가리고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위대한 선지자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을 힘입어 종교개혁을 꾀하였으나 웃시야의 죽음으로 그 계획은 무산되고 오히려 백성의 고발자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사5장 참조).
그때 그는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를 보았고 보좌 앞의 스랍들의 찬양을 들었다. 그들은 삼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하며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한 것을 보았다. 이로서 이사야는 자신의 죄인 됨과 무력함을 깨달았고 죄사함을 받은 후 헌신하여 보내심을 받았다(사6장 참조).
오늘날 교회들이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거룩함의 진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싶다. 만약 그들이 거룩하다 가룩하다 거룩하다 하는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자신들이 거룩한 반열에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의 영과 혼과 몸이 성결치 못하다면 그들의 찬양은 오히려 자신들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2. 전능하신 주 하나님
네 생물들은 계속하여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여’ 라고 찬송하였다. 이것은 보좌의 주인과의 관계성과 그의 능력을 찬양한 것이다. 여기서 주란 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 곧 다시 말하여 태어남으로부터 영생에 이르기까지 호흡과 삶 전체를 주관자이신 분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여기서 전능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엘샤다이로서 탄생과 생육과 번성과 보전의 모든 능력을 의미한다. 창세기 17장 1절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전능이란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을 책망하실 때에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온전하라’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온전치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데 있었다. 따라서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씀의 깊이를 깨우쳐야 할 것이다.
3. 영존하신 하나님
생물들은 계속하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 라 하였다. 이것은 주의 영존하심과 불변하신 신적 지식을 확신할 때만이 드릴 수 있는 찬양이다. 이와 같이 네 생물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하였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에게 성령의 세례로 인치신 것이다(엡4:11,12)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그의 영존하심에 대하여 너무 무감각하다. 그로 하여 많은 성도들이 주님은 승천하여 하늘에만 계시어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제나 이제나 언제라도 우리와 함께 계신 전능자시다. 우리의 믿음의 목표는 영존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D. 합당한 예배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봐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뚯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9-11)
1. 생물들의 경배
생물들은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아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렸다. 그것은 그들이 받은 영광과 존귀함과 감사함이 모두 그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는 것은 찬양 받으실 자와 자신의 존재와 그 관계를 분명히 알 때문이다. 또한 그가 영존하시기에 영광과 존귀와 감사도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2. 장로들의 경배
요한은 10절에서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에 던지며 가로되’ 라 기록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장로들의 찬송이 생물들의 찬송을 돌릴 때라고 기록된 것이다.
이들은 이미 하늘에 예비된 이십사 보좌에 앉은 자들로서 충만한 믿음과 지식에 이른 자들이다.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이들보다 더 앞선 자들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금면류관이 씌워졌고 그들은 이십사 보좌의 주인들이다. 이들이 면류관을 벗어 보좌에 던지고 엎드려 경배하는 일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커다란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데 보좌 위에 앉은 금 면류관을 쓴 이십사 장로들이 네 생물들의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3. 인도함을 받는 예배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그의 영광과 존귀함과 능력 그리고 그 앞에 드려지는 예배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것이다. 만약 우리 앞에 이 질서가 무너진다면 우리의 믿음은 그 주소를 상실하고 우리는 아담의 교만함을 다시 답습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은 영광과 능력과 존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공의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영광과 존귀와 능력 가운데서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이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 보좌에 던지고 모든 만물이 그의 뜻하심 가운데 있음을 찬양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늘 보좌에 둘려 열두 보좌에 앉은 흰 옷을 입고 면류관을 쓴 장로들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과연 이 땅에 죄로 물들었던 인간들로 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주의 사역자들이 주의 보좌에 둘러 앉아 그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가? 또한 그 보좌를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자리 다툼을 하고 있는가? 그것으로 인해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정죄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잘못된 일들은 그들이 아직 네 생물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증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네 생물들을 잘 살펴 볼 때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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