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3:20) ‘You must Open the Door’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의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일곱교회 중 맨 마지막에 해당하는 글이다. 우리가 일곱교회를 연대별로나 교회사적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오늘날 주의 오심이 임박한 시점에 있는 우리에게 가장 밀접하고 중요한 편지임에는 틀림없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3장의 사데교회나 빌라델피아 교회 그리고 오늘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두 개신교에 속한 것으로 볼 때 오늘날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은 이 셋 중에 어디 곳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서로 중복될 사항도 없지는 않지만 두아디라 교회의 특성적 큰 틀에서 볼 때 교회가 책망을 받고 온전히 회개를 이루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빌라델피아 교회냐 사데교회냐로 가름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위치에 서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현실 속의 거울에 들러난 우리의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3:14)
A. 라오디게아 배경
1. 지역적 위치와 배경
라오디게아는 주전250년전 수리아의 안디오쿠스 왕이 건설하고 그의 처 라오디게에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빌라델피아서서 72키로 지점이며 에베소에서 수리아로 지나는 길목으로 라오디게아는 지역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오늘날 소아시아의 터키에 소속된 골로새는 원래 브루기아(Phrygia)인의 도시였으나 로마시대에 와서 동방정복의 일환으로 아시아에 편입되었다.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160km 떨어진 루카스 Lycus) 계곡을 따라 형성된 루카스 강 유역의 도시 라오디게아(Laodicaea)와 히에라볼리(Hierapolis)와 함께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골로새에서 불과 19km의 거리에 라오디게아가 있었으며 그로부터 10km반경 내에 히에라볼리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 세도시는 모두 에베소를 중심으로 팔을 벌리고 있는듯한 위치에 마주 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요한 계시록에 언급된 교회가 모두 이 지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세도시는 초대 이방교회의 발상지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에베소를 이어가는 소아시아의 진입로라고 할 수 있으며 해상과 육로를 통하여 이동할 수 밖에 없는 그 당시로서는 동서를 잇는 중요한 분깃점이다.
따라서 라오디게아는 로마정부는 동방정복 수단의 정략적 도시로서 개발하였고 질좋은 검은 양모의 생산지로 의류산업이 발달되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유통의 거점이 되어 금융업이 발달 되었다. 또한 이곳은 신전을 중심으로 의학이 발달되었는데 특히 이곳에서 만들어진 안과용 연고는 효능이 좋았다.
또한 수리아의 유대인 이주정책에 의해 수많은 유대인이 라오디게아로 이주하여 지역의 특수성을 따른 경제활동으로 엄청난 부를 이루고 있어 매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성전세가 금 20파운드에 이르러 금지령까지 내린바 있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는 유대인들의 천국이었다.
2. 교회의 상황
성경에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음 거론된 것은 골로새서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창조의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골1:15,18). 따라서 그당시 이 지역의 이단적 활동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골로새서 4장 13절에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도 읽게하고 라오디게아로서 우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고 기록하였다.
골로새와 라오디아 그리고 히에볼리는 그지역을 관통하는 루카스 강의 계곡을 중심으로 이어진 지역이다. 이 세 지역의 교회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을 지내며 제자들을 양성할 때 복음의 제자된 에바브라에 의해 개척되었다.
바울은 골로새서 4장 17절에서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는 엄한 명령을 하였다. 후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의 젊은 제자 아킵보가 감독으로 있었다. 흥미롭게도 아킵보에 대한 기사는 빌레몬서에서 소개되고 있다.
바울은 빌레몬의 노예였다 재물을 훔쳐 달아났던 오네시모를 위해 빌레몬에게 편지하면서 서두에 "우리의 사랑을 받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빌1:1,2)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로서 넉넉한 환경속에서 자라나 디모데와 같이 그 당시 차세대 주자이자 신세대 목회자였음을 알 수 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캐릭터
1. 아멘
이사야 65장 16절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를 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혀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니라"기록도었다. 그런데 '진리의 하나님'이라는 원어는 '아멘의 하나님'이다.
성경에서 아멘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신앙고백이나 확증할 때 사용되는 용어로서 따라서 아멘이 붙어진 말씀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가 보증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요1:51, 3:3,5)라는 말로 시작된 표현이 많다. 이것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를 번역한 것이다.
2. 충성되고 참된 증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두번째 캐릭터는 우리 성경의 '충성되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신실(faithful)을 의미하며 '참된 증인'이란 말은 '진실'(true)'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진실이란 단어는 참됨의 실제적 나타나심(Reality)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란 주께서 실제로 보고 들어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증인이심을 알 수 있다.
오늘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에게 자신을 가리켜 ' 아멘이시요 신실하고 참된 증인'의 모습이라 하신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주의 말씀과 증언들을 종교적 역사로 묻으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과 진리의 말씀을 떠나 종교의식과 현실주의화 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이다.
3. 창조의 근본
주님의 세번째 캐릭터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다. 이것은 예수께서 창조자이심을 언급하신 것이다. 요한은 이미 그의 서신에서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은 없느니라"(요1:3) 증거하였고 바울은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골1:15,18)기록하였다.
오늘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특별히 이러한 모습으로 보이신 것으로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근본이신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요소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어느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을 부인하고 있으며 바다 위를 걸어신 주님을 환상적 현상으로 말하기도 하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사도서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사역하던 초대교회 당시부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실제적 사역을 부인하던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뿌리가 아직도 남아 있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훼방하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II.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5-16)
A. 선택하라
우리가 한 세상 살면서 선택할 일들은 너무나 많다. 어쩌면 사람은 선택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과도 같다. 어떤 선택의 중요한 기로에 섯을 때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돌아서지 못할 일을 저지르게 될 수 있다.
믿음 생활 속에서도 늘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택적 시험이 따르게 된다. 주님은 복음의 비밀을 말씀하시며 너희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 또 어떻게 들을 것인가 스스로 삼가하라 하셨다. 또한 여러 가지 일로 바쁜 마르다에게 무엇이 중요한 가를 선택하라 하시며 마리아는 좋은 것을 선택하였다 하셨다.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그들의 상태를 책망하셨다. 이것은 어떤 행동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 분명하지 못한 그들의 영적 상태를 언급하신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상태를 미지근하다고 하셨다.
여기서 차다는 것은 빙점의 상태를 의미하며 인근 골로새 지역의 찬물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어쩌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언급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더웁다라는 표현은 히에라볼리 지역의 온천을 비유한 것으로 라오디게아 지역은 찬물도 더운물도 아닌 미지근한 물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오늘 주의 말씀은 성경적 균형을 언급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불의를 책망하시며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프신다. 그런데 교회들이 만약 어떤 불의를 보고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 불의에 대한 불투명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것은 교회의 직무유기다.
B. 내치리라
성경에는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할 자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기록하였다. 음행하는 자 탐색하는 자, 거짓말하는자, 남색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부모에게 패역 한자 등등..그러나 많은 교회에서 이러한 일에 대하여 무관하며 또 묵인하고 있다. .
주님은 계속 이러한 상태라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하셨다. 아직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의 입에 있음은 감사할 일이다. 그의 입 안에 있다는 것은 주께서 계속 그들을 위해서 권고하고 책망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한 자녀의 이름이 늘 부모의 입에 있어 책망을 끊이지 않는다. 이것은 자녀로 바른 길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이다.
III. 상반된 관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을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
사람은 누구나 편협한 면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기호와 자신이 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또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옳지 못할 때 나는 커다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다.
A.현실주의적 상태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은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현실주의적 경제적인 요소를 말한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대형교회는 부족함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두 가지로 나누어 책망하셨다.
먼저 주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을 알지 못한다' 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 성경을 보며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부족함이 없는데 무엇을 기도하고 또 일낙에 빠져 성경이 눈에 들어 오지 않을 것은 뻔한 사실이다.
B. 영적빈곤의 상태
계속하여 주님은 부요함에 빠진 그들의 영적상태를 지적하여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하셨다. 자기의 상태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부자 청년의 비유를 들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힘들다 하셨다.
설혹 그가 많은 구제를 하고 율법을 지키는 의인일지라도 그는 그의 재물로 하여 인생의 모든 것을 행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극한 질병이나 귀신이 들어 왔다면 그 문제는 자신의 재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을 볼 수 없다면 이것은 정말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모두 지상주의에 빠져 물질의 축복을 외치고 또 그러한 믿음 생활을 추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눈먼 소경이요 자기의 벌거벗은 상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IV. 권고의 메시지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8)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하셨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불로 연단한 금과 흰 옷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A.정금같은 믿음
그들은 돈이 많아 무엇이든지 돈으로 살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커다란 구제도 할 수 있었고 학교도 세우고 또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요구하시는 정금 같은 믿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불로 연단한 금이란 100%의 순금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온전한 믿음이 고난의 연단과 인내로 성취됨을 언급하신 것이다. 바울은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3) 권고하였다.
나는 최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것은 10년간 지탱해온 서울 갈보리 채플의 문을 닫아야 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이기도 했다. 작년에 이미 서울을 떠났을 때에 나는 요나의 폭풍을 경험하며 다시 돌아 와야 했다.
그러나 꼭 일년 만에 나는 더이상 피할 곳을 얻지 못하고 갈보리채플이 지고 있는 채무를 정리하기 위해 한남동 채플을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번에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으시고 주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랴. 오직 나를 권면하시는 주의 뜻을 따라 달려 나갈 것이다.
B. 거룩한 성도
두 번째로 주님은 흰 옷을 사서 입으라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공의를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변화산상에서 제자들 앞에서 흰 옷으로 변한 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주께서 승천하실 때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다.
계시록 19장 14절에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기록되었다. 이것은 최후의 승리자 교회의 모습이다. 천사는 8절에서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 기록하였으며 13절에서 피 뿌린 옷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이라 소개하였다.
여기서 흰 옷이란 주의 거룩하심을 의미한 것으로성경은 오직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 하였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 주옵서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하셨다. 당신이 의로워질수 있는 것은 그의 거룩한 말씀 가운데 있는 것뿐이다.
C. 그리스도를 보는 눈
세 번째로 주님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 하셨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유명한 안약 연고의 생산지인 것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외적인 것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을 보는 눈을 말한 것이다.
나는 최근 앞을 못보는 김 다비다 선교사를 통하여 우리 교회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심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내가 김다비다 전도사를 만나기 직전에 사실은 유명한 법조인이며 목사인 어느 분이 자신이 나를 돕고자 하여도 도울 수 없었던 일을 체험하게 되었다.
주께서 바디메오에게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을 때 그는 내가 주를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셨다. 그리고 그는 바로 주를 보게 되었고 그 길에서 주님을 쫓았다. 부자 청년은 주를 영생에 이르는 길을 알기 위해 주 앞에 나아와 진리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재물로 하여 뒤로 돌아갔고 바디메오는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자손 메시아를 보고 그의 제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V. 회개에 이르는 길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19)
A. 책망과 징계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그 방법은 책망과 징계였다. 잠언 기자는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잠3:12)하였으며 다시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기록하였다.
또 성경은 욥의 고난을 말하여 '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적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 여기지 말지니라'(욥5:17) 기록하였으며 바울은 '우리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를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 하였다
주님은 징계 받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네가 열심을 내라 하셨다. 사실 책망과 징계를 받는 중에 열심을 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책망하고 징계하는 것은 우리로 열심을 내어 주의 뜻 가운데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이를 말하여 성경은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6-8) 기록 하였다.
VI. 문을 열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
이 말씀은 주의 오심과 세상의 종말이 심히 가까왔음을 알리시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이 땅에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도록 베푸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것은 닫혀버린 영적인 상태는 그 무엇으로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는 능으로도 않되고 힘으로도 않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느다 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문밖에서 서서 우리가 문을 열도록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A. 문밖에 계심
주님은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다. 따라서 만약 어느 성도라는 누가 후일 주의 초청에 임하지 못하고 대환난을 통과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 책임은 결국 그에게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이고 주님은 이 말씀이 기록된 이후 그에게 계속 노크를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주의 음성을 들은 것은 내 인생이 두번 있었다. 먼저는 주를 알지 못하여 세상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였다. 어느 여인이 내게 전해 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는 나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문이였다.
B.부르시는 주의 음성
두번째 주의 음성은 구원을 받은 이후에 주의 도를 가르침 받지 못하여 주의 뜻을 깨닫지 못한채 거룩한 의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소경이 되어 세상에 취해 있을 때에 갈보리채플의 성경공부는 내 눈을 뜨게 하였고 그 말씀은 나를 거룩한 의의 길로 인도하였다.
만약 내가 그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도 계속 자신의 욕정과 세상의 유혹에 빠져 그를 거부하였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목사가 되었을까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만 하다.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당신은 어떠한가?
지금 주께서 당신의 문 앞에 와서 문을 열라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혹시 어쩌면 지금 당신은 나도 예배 중이기 때문에 바쁘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문밖애 계신데 당신은 누구를 향하여 예배를 들이고 있는가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C. 식탁의 교제
여기서 더불어 먹는 다는 말은 잠간 가서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질퍽하니 앉아서 서로의 기쁨을 나누며 음식을 먹는 저녁식탁을 말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침이나 점심은 간단하게 먹는다 그러나 저녁은 온 가족이 둘러 앉아 하루의 일들을 감사하며 식탁의 즐거움을 나누게 된다.
지금까지 당신의 삭탁에 주님이 없었다면 당신에게 있어 밤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식탁이 주와 함께 나누었다면 당신의 영혼은 이제 평안한 잠을 자게 될 것이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기 때문이다.
VII. 약속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21-22)
이제 주님은 주의 책망을 듣고 문을 열어 주와 식탁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셨다. 주님은 내가 내 보좌에 함께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하셨다.
이 말씀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주께서 자신의 보좌에 앉히시겠다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쉬운 일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고난 중에 끝까지 말없이 참고 견디는 인내를 요구하신 것이다.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증거하였다.
만약 우리가 주의 은혜를 입어 구원의 문에 이르렀다 하여 세상의 부요함에 빠져 주의 약속하신 보좌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영화가 있을 것인가? 인생은 일장춘몽이여 꽃잎처럼 덧없이 저버리는 것을 세상의 영화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것인가?
미국의 수많은 갈보리채플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아직 피어보지 못한 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안타까워하나 나는 오늘 이 말씀이 있기에 더욱 인내하기를 힘쓰고자 한다. 주님은 솔로몬이 입은 영광이 들꽃보다 못하다 하셨다. 내가 하루살이 같은 인생에 연연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할 보좌를 빼앗길 수는 없다. 나는 그리스도의 이기심 같이 나도 이길 것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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