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계시록 강해

(계시록3:4) ‘Wake Up’

이요나 2007. 2. 24. 13:36

(계시록3:4) ‘Wake Up’

 

(계3:4)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서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우리가 2장과 3장에 나오는 입곱교회를 살펴 볼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일곱의 숫자에 대한 숫자적 인식을 갖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세상에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즉 오직 하나의 교회로서 성령과 믿음과 세례가 하나이신 완전한 하나님의 교회를 언급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곱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낸 편지는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약속하신 주의 날이 이르기까지 이 땅에 펼쳐질 믿음의 터널 속에 역사하는 영들의 훼방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구원받은 모든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기 위해 복음의 사명을 맡은 세우신 종(사자)들을 일깨우신 말씀이라 하겠다.

 

우리는 앞에서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를 살펴 보았다. 이 세 교회는 이 땅에 뿌리는 내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단적인 면들을 펼쳐 놓은 것이며 각 교회의 사역들은 그 뒤에 언급된 두아디라 교회로 집대성한 느낌이다. 

 

두아디아 교회는 시대적으로 좋은 시대를 만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에서 많은 발전을 하였고 주님은 그들의 사역을 칭찬하셨다. 다만 그들이 사역적 열정을 성취하기 위해 사회적 제도와 타협함으로 사단의 깊은 역사가 일어 났고 그로 하여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회개하라는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 권세를 받은 교회로서 새벽 별인 메시아 언약을 받은 교회이다. 따라서 두아디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복음을 이끌고 갈 하나님의 교회의 모델이라 하겠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사데 교회, 빌라델피아 교회, 라오게디아 교회는 앞에서 언급된 두아디라 교회를 펼쳐 놓은 교회와 같은 느낌이 든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교회가 잉태하여 두아디라 교회를 창출하였다면 두아디라 교회 속에는 사데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와 라오게디아 교회가 숨쉬고 있다고 하겠다.

 

 

I. 사데의 배경

  사데는 허무스강 계곡의 평야 한 복판에 세워진 고대 루디아 왕국의 위엄과 찬란함을 자랑하던 대도시 중의 하나였다. 이 평야는 북쪽에서 뻗어나온 몰루스 산맥에 펼쳐진 고도 450미터에 위치하여 사데는 그 누구도 침공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도시이기도 했다. 
 

 A. 경제적인 부요

 사데가 큰 도시로 발달된 데에는 그 지역을 통과하는 강에서 사금이 채출되어 쿠르수스 왕 때에 이르러서 세계 최초의 주화가 만들어졌다. 사데는 후일 페르샤의 고레스 왕에 의해 함락되었었고 그후 헬라를 일으킨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를 받다가 후일 안티오쿠스에 의해 다시 함락되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사데는 역사상 단 두번의 함락을 당하였다. 사데는 지형적으로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둘러 쌓여 있어 사데 사람들은 전쟁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였고 강에서 채취한 사금을 부를 누리고 살았다.

 

 B. 난공불락의 도시

사데의 두 번의 함락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페르샤의 고레스 왕은 쿠루수스가 지배하던 사데를 침공하기 위해 할리스 강을 건너 왔지만 계곡으로 둘러 쌓인 사데로 들어갈 길을 찾지 못하고 포위하고 있었다.  

 

계곡을 포위한지 14일이 되도록 침입로를 찾지 못한 고레스 왕은 침입로를 찾는 사람에게 커다란 포상을 내리기로 공포하였다. 어느 날 계곡을 주시고 있던 병사가 절벽 위의 사데의 병사가 졸고 있다가 철모가 떨어져 계곡으로 굴러 내렸는데 깨어난 병사가 철모를 찾기 위해 칼날 같은 바위 계곡 사이에  숨은 길을 타고 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  

 

결국 사데의 침입로는 한 병사의 실수로 노출되어 페르샤 군인들이 밤을 타 올라 가게 되었는데 막상 성위로 올라가 보니 병사들은 난공불락인 지형적 조건만 믿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모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데는 맥없이 적에게 함락되었다. 이러한 일은 후일 헬라제국 이후에도 거듭된 바 있다.

 

이러한 사데의 함락은 우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이 자기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라는 자부심에 차 무방비 상태로 살아 가다가 아주 사소한 내적인 문제로 거룩함을 상실 당하고 사단에게 패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적은 항상 외부에 우는 사자처럼 서성거리고 있지만 위대한 성이 무너지는 것은 자신의 소홀함에서 비롯된다,  

 

 

II. 사데 교회의 특성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절)

 

 A. 일곱 영과 일곱 별

사데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캐릭터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예수님이시다. 여기서 일곱 영은 삼위이신 성령으로서 이미 1장4절에서 소개된바 있다. 또한 일곱 별이란 1장 20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데 교회는 성령과 그의 택하심과 부르심 가운데 기름부으신 교회 사역자들을 통해서 통치하시는 오늘날 우리와 아주 관계가 깊은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한마디의 충고도 없으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성령의 역사와 그의 기름 부으신 종들로 구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B. 명목상의 이름

주님은 먼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셨다. 이것은 명목상의 교회라는 말씀이다. 성경에는 살았으나 죽었다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고 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일낙을 좋아하는 과부들을 향하여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6) 하였다.

 

이러한 경계의 말씀은 성경이 추구하는 목표와 상반된 것이다. 주님은 돌아 온 탕자를 가리켜 '죽었다가 살아났다'(눅15:24) 하였으며 바울은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하였다.

 

주께서 사데교회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 데에는 사대교회가 처한 상황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당시 교회는 콘스탄틴 대제의 국교화로 교황의 제도권 속에 치리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생명력은 그 말씀과 성령에 있지 않고 종교의식과 정치적 목적에 있었다.

 

교회는 바벨론 종교가 행하던 종교의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농신제와 부활절 같은 축제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다산을 기원하는 바벨론 종교의 종교행사인 농신제는 그 기원이 창세기 10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니므롯을 처 세미라미스는 달신을 섬기며 하늘의 여황이라 불렸다. 그는 외아들은 타무스를 영원한 신의 아들로 만들기 위해 타무스의 출생일을 농신제로 정하고 거대한 축제를 시행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되고 말았다. 또한 새봄과 새로운 생명을 기원하기 위한 이방여신 에스타(Astarte) 기념하는 축제로서 오늘날의 부활절 이스타의 기원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내용들은 성경의 말씀과 이스라멜 역사 속에서 찾아 없었던 것으로 바벨론 종교가 교회 가운데 들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우리 교회의 현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전세계 가운데 가장 교회의 활동이 활발한 곳이라 소문이 났다. 그러나 만약 우리나라 교회의 활동이 정작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뜻하신 바가 아니라면 이것은 정말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III. 권고와 책망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하라 네 하나님 앞에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2절)

 

주님의 책망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한 사데교회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전도를 목적을 방편으로 바벨론의 종교의식을 그대로 교회에 영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복음의 수단은 오직 성령의 계시로만 전달되어야 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

  A. 행위의 온전함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라 하겠다. 아브라함은 열방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말씀의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여 결국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다. 그후 아브라함은 13년 동안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창17:1)하셨다.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은 엘사다이로서 젖 무덤 즉 어린아이를 키우는 데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기록된 '온전하라'는 말씀은 성결과 정결을 의미하는 도덕적 용어로서 바울은 말세에 나타난 혼인과 음식에 관한 율법적 종교활동을 경계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5) 기록하였다.

 

 B.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

주님은 3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하셨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그 당시 교회의 실정을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교회는 1500년경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시대를 맞은 콘스탄틴 1세가 집권 속에 있었다. 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카톨릭으로에서 나와 개신교를 창설하였다. 비로서 교회는 교황의 제도권 속에서 나와 참신하고 신선한 교회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그당시 교황의 제도권 속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던 교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킨다는 것은 생명을 내어 놓는 투쟁이기도 하다. 루터의 종교개혁 제창에 힘을 얻은 성도들은 목숨을 내걸고 주께서 주신 말씀을 지켰다. 그러므로 주님은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개혁을 주도한 개신교회가 이러한 바벨론 종교를 그대로 답습한 있었다. 이러한 시발은 종교개혁의 주발자인 루터가 당시 행하던 유아세례를 교회에 받아 들여 성경에도 기록되지 않은 구원의 문제를 제시한 것이다. 이로서 부모들은 아기들이 유아세례를 받음으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구원을 받을 있다는 교리를 믿게 되었고 이에 부과되어 다른 교리들이 새롭게 제시되게 되어 이러한 교리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 그대로 남아 교단적 배경을 이루게 것이다.

 

 이후 개신교는 요한 칼빈, 크녹, 쯔빙글리, 허스와 같은 유명한 신학자들이 탄생하여 새로운 신학적 학문의 틀을 제시하였고 개신교들이 각자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카톨릭 교회의 종교적 행위들을 다시 답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오늘날 장로교회가 요한 칼빈의 교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감리교회가 웨슬레의 교리를 그대로 답습한다면 교회들은 결국 바벨론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게 것이다. 영적전쟁에서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데교회의 각성을 위한 네 가지 방법을 권고하셨다. 먼저 그들의 영적 각성을 요구하여 '깨어라' 하셨으며 두 번째로 그들에게 전달하신 말씀들을 '생각하라 '하셨고 세 번째로 회개를 촉구하셨으며 네 번째로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1.   깨어나라

여기서 깨어나라는 말씀은 영적각성을 의미한 것으로 신약의 큰 주제 중의 하나이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있을 일들을 경계하시며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막13:33)하셨으며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21:36) 하셨다.

 

바울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15:34) 하였고 다시 자지말고 오직 깨어 근신하라(살전5:6)하였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하였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하여 우리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나니 우리의 구원이 처음 빋을 때보다 가까웠다 경계하였으며 주님은 계시록 16장에서 다시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하셨다.

 

    * 예배와 성경의 가르침

주님은 사데교회의 영적 각성과 관련하여 아직 그들에게 남은 바 죽게된 것을 굳게 하라 하셨다. 여기서 언급된 남은 바 죽게 된 것이 과연 무엇인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봉사와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속한 것일 것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는 예배라는 의식 가운데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교회들이 가르치는 시간은 예배의식 중 4분의 1에 해당한다. 그 나머지는 여러 가지 종교적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바울은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 세례를 주신 것은 사도로 예언자로 복음 전도자로 목사와 교사로 세우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과 봉사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3,14)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의 실정은 어떠한가 과연 교회 가운데 선포되고 있는 말씀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또한 그나마 얼마나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양심과 성령의 소멸

또한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일말의 양심일 것이다. 그것은 아직 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의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화인 맞은 양심을 책망하였다. 믿지 않는 자들도 이 양심으로 책망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주님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성령을 주셨고 우리는 그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둔하여 거룩함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성령은 더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2. 생각하라

사데교회를 향한 주님의 두번째 경고는 '생각하라'이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현재형으로서 매일매일 상기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어떻게 받았으며'는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며 '어떻게 들었으며'라는 말씀은 성령을 통해 우리를 깨우치신 영적 각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범죄를 행했을 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양심이 없다면 자칫 그 범죄에 익숙해져서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회개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주의 말씀을 다시 생각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기쁨으로 회복 될 것이다.

 

  3.  회개하라

주님의 세 번째 경고는 ‘회개하라’이다. 이 말씀은 부정 과거형으로 명백한 범죄에 대한 경고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커다란 자랑이 있다면 새 사람이 되었다는 현실적 은혜이다. 그런데 다시 죄에 얽혀 범죄를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회개의 기회란 참으로 위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로서 성경에 기록된 범죄한 수많은 사역자들이 온전한 구원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모세와 다윗도 베드로과 바울도 모두 용서함을 받은 죄인들이다.

 

  4. 지키라

네번째로 주님은 '지키라' 하셨다. 이것은 현재형이므로 계속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지키라는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주의 명령을 지킬 때에 그 행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그러므로 구원인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말미암는다 하였다.

 

IV. 축복과 약속

"그러나 사데에 있어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와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러나’ 라는 접속사는 항상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다행이 사데 교회에는 이 접속사가 두려운 경고 뒤에 있는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우리가 감사할 것은 하나님은 부패한 세상 속에서도 의로운 자들을 남겨 두신다는 것이다.

 

아합왕 시대에 음녀 이세벨로 하여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죽은 바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고발하는 선지자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칠천명의 의인을 남겨 두셨다 하셨다. 우리가 최악의 상태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살리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사데에 있는 교회 전체가 다 더러워졌다 해도 주께서 남겨 둔 몇 명으로 하여 그 모든 교회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마른 뼈 같은 이스라엘 속에서 유다의 막대기와 에브라임의 막대기를 취하여 하나가 되셨다(겔37장).

 

   A. 합당한 자

우리는 창세기에서 의인 단 열명이 없어서 멸망 당한 소돔성을 목도하였다. 당대의 최고의 도시가 의인 열 사람이 없어 멸망을 당한 것이다. 여기서 합당한 자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한 자를 의미한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눅9:62) 하셨으며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이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이니라'(눅20:35,36)하셨다.

 

바울은 너희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이 행하라(엡4:1) 하였으며 제자 데모데에게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1) 권면하였습니다.

 

B. 흰 옷을 입은 자

따라서 합당한 자란 주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말한다. 주님은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할 것이라 하셨다. 특별하게 합당한 자가 흰옷과 관련된 것은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성결을 의미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의의 표이며 임재하신 성령의 능력이기도 하다.

 

흰 옷은 주의 신부 된 성도의 성결의 예표로서 주님은 혼인잔치에 초청된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끌어내어 흑암으로 던지셨다. 또한 우리는 계시록 19장에서 흰 옷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주님은 그들과 함께 다니시겠다 약속하셨다.

 

   C. 생명책 약속

합당한 자에게 주신 주님의 두 번째 약속은 생명책에 그 이름을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라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육신의 생명보다 영혼을 귀히 여기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오늘 하루를 즐겁고자 주의 성결하심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당신의 이름이 주의 성령의 지키심과 주의 능력이 교회를 지키시는 사자들 속에 있을지라도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생명책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