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계시록 강해

(계시록2:13) 사단의 위(位)

이요나 2007. 2. 24. 13:39

(계시록2:13) 사단의 위(位)

 

(계2:13)"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앞에서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살펴 보았다. 우리가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를 살펴 볼 때 이 내용들은 그 당시 교회들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에게 전하시는 메시지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또한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의 메시지를 보면서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의 우선 순위가 무엇이며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점점 확실해 지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세번째로 소개되는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귀를 기우려 보기로 하자.

 

 

I. 버가모 교회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 선 검 가진 이가 가라사대(2:12)

 

버가모는 서머나 교회에서 북으로 104키로 지점에 있는 지역으로 우리 성경은 버가모(Peramos)라고 번역되었지만 다른 성경에서는 버가뭄(Pergamum)이라 소개하고 있다. 버가모와 버가뭄의 차이는 버가모가 여성형인 것에 비하여 버가뭄은 중성형이라는 차이일 뿐이지만  그 어원이 중성형 또는 여성형이라는 데 특별한 매력을 갖게한다.

 

원래 버가모는 아탈리드 왕국의 수도였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으로 헬라의 속국이 되어 아시아 정벌의 중심이 되었다. 그후 로마가 들어 서면서 아탈리드 왕국은 황제에 의하여 왕국을 로마정부에 스스로 헌납되어 B.C.133년에 공식적으로 로마정부에 의해 아시아의 수도가 되었다. 

 

* 좌우에 날 선 검

버가모 교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캐릭터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다. 이것은 1장에서 사도요한에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5번째의 형상으로 요한은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16)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검'에 관한 성경적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검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제일먼저 소개된 곳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두루도는 '화염검'이다. 아담이 범죄후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게 되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 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기록하였다.

 

또 주님께서는 바울은 열두제자를 내어 보내시며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하셨다. 이 말씀은 복음전도로 하여 믿는 사람들 속에 발생할 교리적 갈등은 언급하신 것이다.

 

   바울은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한 전신갑주를 말씀하시면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6:17) 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성령의 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된 점이다. 따라서 성령의 검은 곧 성령에 의해 조명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복음의 메시지와 화합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강팍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가 알 것은 주의 날에 주께서 진리와 능력의 말씀으로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성경은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2:8) 하였으며,  

 

다시 그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계19:15) 라고 기록하였다. 이로서 우리는 오늘 버가모 교회 앞에 서신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캐릭터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지 어렴푸시 이해할 수 있다.

 

II. 주께서 아시는 것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

 

  A. 사는 곳(상황)

주님은 먼저 버가모 교회가 처한 상황을 알고 계시다고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나그네 곧    '파로이케인'(paroikein)이라 하였다. 그것은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산다'라는 던어  카토이케인(katoikein)은 일시 거주자가 아닌 영구한 주거지를 의미한다.

 

나는 지난해 중국을 두번 방문한 일이 있다. 은밀하게 인도를 받아 중국인 지하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는 주거적인 환경을 부여받았다. 북한의 성도들이나 또 이슬람권의 성도들 역시 모두 벗어버릴 수 없는 멍에를 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1. 순교자

그들에 관하여 주께서 언급하신 두번째  내용은 '충성된 증인 안디바'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안디바가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에게 붙여진 '충성된 증인'이라는 호칭을 통하여 그가 복음을 위해 어떻게 하였는지 짐작할수 있다.

 

'충성된 증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 중에 하나이다. 사도요한은 1장에서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1:5) 증거하였다.

 

여기서 증인이란 헬라어 '마르투스'로서 순교자를 뜻한다. 또한 충성되다라는 말은 신실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충성된 증인이란 하나님의 뜻과 그의 가르치심을 따라 신실한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당한 복음의 종에게 주어지는 위대한 칭호이다.

 

주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서 나의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셨다. 이것은 부르신 사도들이 모두 복음을 위해 순교자의 반열에 올라야 할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2. 믿음

주께서 세번째로 언급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에 관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사용된 ' 믿음'의 시제는 행위가 완전히 끝난 상태 즉 과거형이다. 따라서  여기에 기록된 '나를 믿는 믿음'이란  완전히 결정된 믿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버가모 교인들은 안디바의 순교 속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고 자신들이 크리스챤임을 지켰다. 이것은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참히 처형되는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1억의 크리스챤들은 오늘도 이 믿음을 지키고 있다.

 

주님은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 내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하셨다. 이것은 성도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믿음에서 떨어질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주께서 우리의 믿음을 대하시는 방법은 매우 특이하다고 하겠다.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처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시면 될 것인데 주님은 우리의 믿음으로 그 상황을 이겨내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브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 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하셨다. 이처럼 사단은 늘 우리를 밀까부르듯이 청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서머나 교회에서 살펴 보았듯이 사단의 시험은 겨우 10일 동안일 뿐이다.

 

이것은 능히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기간이다. 요한은 적그리스도의 사슬에서 자신을 지키는 성도들을 향하여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증거하였다.

 

 B. 사단의 위(位)

주님은 버가모를 가리켜 사단의 위(位)가 있는 곳이라 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사단의 위에 해당되는  헬라어 '트로노스'(throne) 일반적인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권세를 행하는 지위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는   마리아에게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눅1:32)라고 증거하였다. 또한 주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 하셨다. 이와 같이 '사단의 위'란 이 땅에서 복음을 대적하는 실제적인 사단의 행사를 말한다.

 

  1. 정치적 조건-수도

 버가모가 사단의 위(位)라 불리는 데는 몇가지 특수한 조건이 있다. 그 중에 먼저 정치적인 조건을들 수 있다. 우리가 구약의 역사서나 예언서 다니엘서에서 살펴 보았듯이 사단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치 세력과 하나가 되어 교회를 핍박하였다.

 

왕국의 수도로 출발한 버가모는 아시아의 수도로서  400년간 특권을 누려왔다. 수도란 그 모든 치리적 행정과 법이 집행되는 곳이다. 더우기 수백년간 수도로서의 그 명성을 누려온 버가모는 로마의 아시아 정복의 토대가 되는 곳이라 하겠다.

 

  2.  문화적 조건

사단의 위라고 불리는 두번째 조건은 버가모가 문화와 학술적인 중심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당시 버가모에는  20만권의 책을 보유한 도서관이 있었다. 이처럼 방대한 도서관이 있다는 것은 아시아 지역의 문화와 학술적인 부분을 총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더우기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신약성경이 기록된 양피지가 버가모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전세계 모든 국가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에서 나는 파피루스로 만든 용지로 저서를 만들었다.

 

버가모 왕 유메네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세기적인 도서관장을 빼내려고 유혹하자 이집트왕 프톨레미가 비잔틴의 서사 아리스토파네스를 옥에 넣고 파피루스 수출을 동결시켰다. 이로서 버가모에서는 아시아 지역에서 흔하게 얻을 수 있는 양피를 제조하여 양피지를 발명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버가모는 인쇄업과 관련한 산업이 더욱 활발하게 개발되어 학술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더욱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3.    종교적인 조건

버가모가 사단의 위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종교적인 요건도 가추고 있었다. 그곳은 아시아를 총괄하는 가이사 숭배의 중심지로 제우스 신전과 아데네 신전이 있었다. 특히 '네오코로스'(신전 청소 그룹)이 있어 이들을 통해서 아시아 지역의 가이사 숭배를 위한 모든 제도와 행정적 조치가 시행되었다. 

 

또하나 버가모에서 빼낼 수 없는 일은 버가모의 신이라 불리우는 '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다. 이곳은 기독교가 사단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뱀을 섬기는 신전으로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드는 곳이였다.

 

이곳에는 독성이 약한 뱀들이 살고 있었고 밤이면 뱀들을 풀어 놓아 이 뱀들이 환자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면 무슨 병이든지 나았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아스클레피오스'는 버가모의 구주라 불리었다. 오늘날 적십자 마크나 공군 간호장교 배지의 뱀의 표시가 버가모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유래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도원 마다 질병치료와 관련된 루머를 갖고 있다. 최근에는 기도원 간판이 동네 가운데까지 들어와 치유목회가 성황하고 있다. 병자를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복음사역과 지대한 관계가 있지만 날이 갈수록 복음의 본질이 퇴색되고 치유를 빙자한 사역들이 왕성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III. 책망할 일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14)

 

앞에서 주님은 버가모 교회의 믿음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실제적인 사단의 지배권 속에 있으면서도 바가모 교회는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켰다.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복음적 사명의 믿음이 이나라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다른 방편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주님은 그들의 두어 가지를 책망하셨다. 어떻게 보면 믿음의 온전한 잣대이신 주님으로부터 두어 가지만 책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쟁에서 오십보 백보는 마찬가지다. 한발을 물러선 것은 이미 패배를 의미한 것이다.

 

A.     발람의 교훈(민25:1,2; 31:16)

주님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구약시대에 있었던 발람의 교훈을 이끌어 내셨다. 발람은 구약시대의 이방인 예언자로서 하나님을 아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민수기 24장에 보면 발람이 지은 노래가 기록되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스라엘로 하여 범죄케 하였지만 그는 메시야를  바라보며 "한 별이 야곱에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라"(민24:17)하였다.

 

발람은 탐식가라는 의미로서 유브라데 유역에 살고 있던 이방인 점술가였다.  그는 주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저지하신 것을 알고도 재물과 부귀에 눈이 멀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모압왕 발락의 청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는 산 위에 바알브올의 제단을 설치하여 무녀들로 춤을 추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행음에 빠지게 하였다.

 

오늘 주께서 버가머 교회의 믿음을 언급하시며 발람의 교훈을 예증하신 것은 교회가 믿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세상과 타협을 한 일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순교와 고난을 면하고 주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콘스탄틴 대제와 타협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일을 언급한 것이다.

 

   B. 니골라당의 교훈

콘스탄틴 대제는 그의 어머니가 개종하여 복음을 받아드리므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그로부터 교회는 모름지기 종정유착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로서 자연스럽게 발생된 것이 교회의 직제인데 결국 교회는 형제라는 커다란 틀에서 사제와 평신도라는 제도를 갖게 되었다.

 

주님은 15절에서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하셨다.  니골라당은 에베소 교회에서도 지적되었던 일이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지적된 사항은 교회로 하여금 영과 육을 분리하려는 영지주의적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교회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발람과 같이 정치와 결탁하여 부귀 영화를 누리며 이방종교의 축제를 교회 안에 자연스럽게 끌어 들였으며 더 나이가 교회 안에 직제를 두어 성도들 사이에 계급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비단 버가모 교회에 국한 된 것으로 보아서는 않된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 안에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과 같은 축제를 극대화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는 날이 갈수록 형제자매의 교통이 없어지고 직제적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각 교단교파로 분열된 원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성령 한 세례로 출발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처럼 수많은 교파로 나누어진 그 근원 중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는 교권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C.회개의 기회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주께서는 우리에게 늘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주의 재림이 이처럼 늦은 것도 구원하실 사람들을 모두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한 것이다.

 

베드로사도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나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증거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 편지는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성도들에게 쓴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하셨다. 여기서 입의 검이란 말할 것도 없이 진리의 말씀이다. 주님은 대적하는 무리에게 항상 진리의 말씀으로 책망하셨다. 사도바울은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2:8)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도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지어낸 잘못된 교훈들을 가지고 주의 백성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지금도 얼마나 잘못된 교리들이 우리 중에 만연되고 있는지 회개가 절실한때이다. 다행이 한 쪽에서 홀연히 일어 나고 있는 말씀운동은 참으로 신선한 바람이 아닐 수 없다.

 

IV. 축복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7)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도 특별한 약속을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상기해야 할 것은 축복의 말씀은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와 지대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주님은 이기는 자들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과거에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던 만나를 다시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했던 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허락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요한복음 6장에는 만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기록되어 있다.

 

 A.     감추었던 만나(출28:15-21, 요6:26-58)

주님은 오병이어를 체험하고 무수히 따르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히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 물었고 이에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답하셨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오는 만나의 체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주님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떡은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하시며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하셨다. 따라서 만나란 주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주님은 그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영육간에 모든 것을 충족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린 만나라 하신 말씀을 듣고 떠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열두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나를 떠나려느냐 물으셨다. 이 때 베드로가 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 가오리까'(요6:68) 답하였다. 과연 오늘날 주의 말씀을 향하여 교회로 달려 오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오늘날 교회를 오는 사람들은 모두 먹고 사는 문제에 축복을 받기 위해 오고 있지 않은가?  

 

 B.    흰 돌에 새긴 새 이름

  계속하여 주님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주시겠다 하셨다. 여기서 흰 돌이란 찬성과 반대를 결정할 때 사용하는 선택의 돌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 생활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에 그 해답이 있다고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흰 돌에 기록된 새 이름은 그것을 받는 자들 밖에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결국 영생의 말씀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허락된 것이므로 오직 그들만이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새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야곱은 이스라엘로 시몬은 베드로로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로 사울은 바울로 그 외에 바나바, 마가 모두가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흰돌을 받는다는 것은  주께서 그의 선택을 받아 드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당시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교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검은 돌을 선택하였다는 뜻이 된다. 이로서 교회에는 왕권과 유착하여 교회안에 교권직제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결국 교회는 왕권 속에 타고 흐르는 이방종교와 결혼을 한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이 말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당신의 영화로운 삶을 위한 교권인가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말씀인가?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너희는 공중에 나는 새보다 귀하다 하셨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새 이름이 새겨진 흰돌을 받기 위하여 검은 돌을 놓아야 할 때이다. 당신에게 이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