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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2:8-10)십일동안의 시험

이요나 2007. 2. 24. 13:40

(계시록2:8-10)십일동안의 시험

 

(계2:10)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말라 볼지어다마귀가 장차 너의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시험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제 우리는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 두번째 편지를 살펴 볼 차례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일곱교회는 역사 속의 교회사로만 보아서는 않될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과 달라 그 모든 시작과 끝이 동시이며 또 그의 계획과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는 부분적으로 보고 시간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 일곱 교회의 일들은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전체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기록된 내용을 깊은 마음으로 읽고 또 생각하며 영 안에 샛별처럼 떠 오르는 진리의 지혜를 터득하며 거대한 그림틀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살펴 보았다. 이것은 역사 속에 사라진 에베소 교회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세워진 에베소 교회의 시작과 끝 다시말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교회가 성취하여야 할 임무와 책임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한 일에 대한 칭찬은 더욱 지키고 발전해나갈 교회의 임무이며 책망은 반듯이 고치고 단절시켜야 할 교회의 당면한 문제일 것이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씀 곧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씀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부터 잘못된 길로 나간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사역이 이어지는 동안 스스로 깨닫지 못한 순간에 발생된 모순들이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잘못된 길로 나와 버린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역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열심이 때로는 지나치게 반대편으로 가버릴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서머나 교회는 뒤에 나오는 빌라델피아 교회와 함께 일곱교회 중에서 책망을 받지 않은 두 교회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이 두 교회가 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게 되었는지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으며 또 이것은 우리가 필히 터득하고 실천해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I . 서머나 교회의 사자(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 교회 개척 이후 사도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개척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도행전 19장 10절에는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을 듣더라"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머나 교회는 개척 처음부터 사도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이 감독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A. 서머나의 배경

우선 우리는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서머나 교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서머나 교회는 우리 교회사에 중대한 이슈를 전달한 교회 중의 대표이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80여 키로 북방에 위치한 에게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서머나는 아시아의 제일의 도시가 되기위해 에베소와 버가모와 그 우위를 다투던 지역으로 서머나시 뒤에는 황금길이라 불리는 도로로 이어진  파고스 언덕위 가장 높은 곳에 로마 황제숭배를 위해 봉헌된 제우스 신전이 우뚝 서있었으며 그 주변에 아폴로 신전, 아프로디테 신전 등의 웅장한 건물들이 둘러 쌓여 이곳을 서머나의 면류관이라 불렸다.

 

 1. 몰약(myrrh)의 의미

서머나라는 이름은 사람이 죽으면 방부제로 사용하는 몰약(myrrh)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머나는 그 이름에서부터 신비적인 매력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서머나는 뒤로 높은 허므스계곡을  평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바다가  도시 복판까지 들어 와 있어 에게해 바다에서 불어 오는 신선한 바람과 산맥을 타고 흐르는 맑은 공기가 어울어져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이루었다.

 

또한 서머나는 높은 산맥과 바다 사이의 좁은 협곡에 놓여 있어  전쟁이 일어 날 경우 항구로 통하는 입구만 봉쇄하면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천혜의 요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마나에는 정치적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뿌리를 내린 지역이기도 했다.

 

   2  서머나의 역사

서머나는 그리스의 식민지로 개발되었으나 주전 600년전 동쪽의 루디아인의 침략으로 파멸되었다. 그후 서머나는 400년간 작은 도시로 빛을 못보다가  헬라제국의 장군으로 후일 소아시아의 통치자가 된  리스마쿠스 장군에 의해 균형있는 도시로 재건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소아시아를 장악한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황제는  메소포타미아와 바벨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 2000세대를 소아시아의 루디아, 부르기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켜 수만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소아시아 지역에 고루 분포되었다.

 

루디아와 부르기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유대인들은 생활권을 따라 소아시아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루디아인이 장악한 서머나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각지역에 흩어져 유대교 회당을 개설하고 유대교를 중심으로 결속되었다.

 

헬라제국의 멸망 후 서머나 사람들은 로마정부가 자리잡기 전부터 친로마 정책을 펴 후일 로마에게 충성을 맹세한 동맹도시가 되었고 서머나 상권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이 주동이 되어 서머나 도시 개발을 위해 로마정부에 일만 데나리온을 헌납하여 주전 195년에 아시아에서 제일먼저 로마여신을 위한 신전을 세웠으며 그후 로마의 막강한 정책적 지원을 받아 아시아의 면류관이 되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시리아로부터 정치적 박해를 받아 온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것이 정경유착이었다. 더우기 티토 황제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종교적 구심점을 잃은 유대인들은 아시아 지역으로 몰려 들어 유대인들의 생존과 권익을 위해 총회를 구성하고 로마정부와 결탁하여 부를 축척하였다.

 

B. 서머나 교회의 사자

사도요한은 8절에서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 편지는 서머나 교회의 사자 즉 주로부터 서머나 교회를 위해 보내심을 받은 감독에게 보내진 것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처음(the first)이요 나중(the last)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는 말은 주께서 사도요한에 제일 나중에 보이신  자신의 캐릭터이다. 주님은 이 말씀에 앞서 '두려워말라' 하셨다. 여기서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은 그 형상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하드라도 너는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교회가 가장 두려워 할 문제들이 대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환난과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보장이 있다면 두려워 할 것은 결코 없다. 주님은 사도요한에게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 하셨다. 그러므로 더이상 우리는 죽음과 영혼에 관한 문제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 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살아나신'이란 동사는 현재형이 아니라 부정과거형으로 완전한 부활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을 제시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 예수를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안다 하였고 다시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증거하였다.

 

성경에서 '처음(the first)과 나중(the last)이라'는 말이 처음 기록된 것은 이사야서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44:6)기록하였다. 이 말씀은 지으시고 택하신 종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다.

 

또한  22장13절에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the first)과 나중(the last)이요 시작(the Beginning)과 끝(the End)이라"하셨다. 이 말씀은 각 사람들의 일한 값에 대한 최종적인 상과 벌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서머나 교회 사자에게 처음과 나중이라 하신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만약 당신이 이 말씀 속에 포함된 사람이라면 계시록 22장13절까지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1. 요한의 제자 폴리갑(Polycorp)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사자는 이미 우리 교회사를 통하여 인증된 서머나 교회의 감독 요한의 제자 폴리갑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것은 이 편지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시작이요 나중이며 죽었다가 살아 났기 때문이다.

 

  2. 순교자 폴리갑

서머나 교회의 감독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갑(Polycarp)은 주후 155년 2월 23일(토)에 순교당했다. 그 당시 서머나의 원형극장에서 개최된 축제로 연일 사람들이 들끓었고 군중들은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2002년 우리나라 월드컵 때의 열기가 대선과 촛불시위로 이어졌던 일들을 생각하면 스포츠의 열기가 사람들을 어떻게 흥분시키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군중들 속에서 '황제 가이사를 배척하는 폴리갑을 찾아라!'라는 함성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당시 90세가 훨씬 넘은 폴리갑은 형제들에 의해 은신 중이였는데 결국 밀고자에 의해 폴리갑은 원형극장 안으로 끌려 나왔다.

 

서머나 총독은 폴리갑에게 가이사를 주로 시인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택할 것인가 종용했다. 그러나 폴리갑은 '내가 86년간 주를 믿는 동안 주께서 나를 한번도 배반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나의 왕을 저주하겠오!' 외쳤다. 결국 폴리갑은 군중들이 쌓놓은 장작더미의 화형에 처해졌으나 불이 그에게 임하지 못하자 칼로 살해 하였는데 그의 피가 솟아나와 장작더미의 불을 꺼버렸다고 전해진다.

 

II. 주깨서 알고 계심(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9a)

 

주께서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은 칭찬이라 하기에는 매우 안쓰러운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축복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 이 말씀은 어쩜 성도의 축복을 주창하는 일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듣기 거역스런 말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커다란 위로와 용기의 말씀이 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께서 고난과 궁핍을 부요와 비유하신 것이다.  어떤 시인은 빈곤은 부요를 이루는 예술이라고 말하였다. 빈곤 속에서 부요함을 이룬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부요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은 뒤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반대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너희가 부자라 부요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가난하고 벌거벗은 것이다 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속에서 경제의 대국을 일으킨 나라로 각광을 받는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 빈곤한 시대를 살아왔다.

 

참으로 우리 부모들은 열씸히 땀흘리며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달려 왔다, 그러나 오늘날 풍요를 누리는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날 우리나라는 과연 우리 보모들이 빈곤으로 이룬 부요의 예술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의심스럽다. 이제 우리는 서머나교회가 지켜낸  고난과 궁핍 속의 부요를 살펴 보도록 하자.

 

주님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 계신다고 하셨다. 그 하나는 고난과 궁핍이요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의 훼방이다. 내가 어떤 고난을 받고 있을 때 나의 최고 권위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 자체는 얼마나 커다란 위로인가?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자신의 고난과 궁핍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A. 부요와 가난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환난'을 의미하는 '둘립시스'는 무거운 것에 눌려 견딜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처한 외형적 압박으로 파멸 직전에 놓은 상태를 뜻한다. 다시말해서 교회가  박멸될 직전의 상태라고 하겠다.

 

주님은 또한 그들의 '궁핍함'(penia)을 언급하셨다. 이 말은 빈곤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빈곤의 상태는 살아가기에 부족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극빈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 당시 서머나 성도들은 대부분이  하급신분으로 그나마 그리스도인이란 명분으로 직장이나 사업에서  내몰렸다. 더우기 로마정부와 결탁하여 상권을 잡고 있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그들은 일터에서 추방되었고 약탈당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어떤면에서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부유함을 누리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크리스챤들이 정치와 사회제도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나름대로 우월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크리스챤들이 정책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시대가 온다면 이것은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하여 복음이 훼방받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B. 영적 훼방

주께서 두번째로 알고 계시다고 말씀하신 것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이었다. 이것은 영적인 훼방이기도 하고 영적전쟁에 속한 것이기도 한다. 그들의 훼방은 실제적이고 또 교묘한 이론적 합리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올무에 넘어지고 말게 된다.

 

우리는 이미 바울서신을 통하여 복음이 이르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훼방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팍스 로마나 정책을 힘입어 전세계 속에서 부요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신비를 추구하는 헬라문화 속의 로마시민들에게 있어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신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철두철미한 율법적 생활과 함께 보여진 유대인의 종교적 성결의 의미는 상류사회의 부녀들에게 신비의 매력을 갖게 하였다. 오늘날 신부와 수녀들을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도 같다 하겠다. 그로하여 유대인들은 각 지역의 상류층의 부녀들과 결탁하여 교권을 확보하며 유대인의 입지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기독교의 자유교리와 합리적인 구원의 교리는 사람들의 영혼들을 감동시키며  전세계속으로 번지고 있어  유대인들은 긴장하기 시작했고 이에 유대교들은 결속하여 신흥 종교 예수 그리스도교를 이단화 하고 정책적으로 핍박하기에 이르렀다.

 

. 사단과 종교의 결탁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9b)


이 말은 그들은 유대인의 국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교회를 훼방하는 유대교의 종교적인 모임 총회를 말한 것이다, 그당시 로마는 각 지역 주민 10사람 이상에 회당개설을 요청하면 승인을 하였다, 이런 정치적인 제도로 하여 유대인들은 로마제국 전역에는 회당을 세워  총회를 구성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로마제국과 정경유착을 도모하였다.

 

우리가 앞에서 잠간 언급하였지만 로마제국은 날로 거대해지면서 팍스 로마나를 실현 시키기 위한 거대한 구심점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이념도 종교도 거대한 다국적 제국이 된 로마를 하나로 통일 시킬 수는 없었다. 이에 생각해 낸 것이 가이샤 숭배였다.

 

로마제국이 황제숭배를 시행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어어온 로마여신의 정신적 이념을 팍스 로마나를 주창하는 가이샤의 인격 이념에 접목시켰다. 그러나 이 일에는 전세계 가운데서 정경유착을 이룬 유대인 총회가 큰 역활을 하였다.

 

네로황제 시대에  네로의 총애 받는 배우 출신의 후궁이  있었는데 그녀는 유대교에 개종한 창부였다, 유대인들은 그녀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처음에는 황제들의 비협조로 시행되지 않다가 도미티안 황제 때 와서 로마의 모든 공문서에 '가이사는 주이다'라는 서명을 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에 속한 사람들은 일년에 한번 가이사 신전에 나가 자신이 서명한 문서를 갖고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또한 로마제국은 가이사를 주라 칭한 사람들에게 어떤 종교활동도 승인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단의 계획이었다. 사단은 주를 시험하여 내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 기독교도들은 주를 부인할 것이냐 가이사 앞에 제사를 드릴 것이냐 하는 선택적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교회 앞에 서서 황제숭배를 강하게 반대하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경배할 것을 외친 사람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이였다. 폴리갑은  필라델피아 성도 11명과 함께 순교하였다.  

 

IV. 마귀의 시험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의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시험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10)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두려움과 함께 위대한 믿음의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사람앞에 다가오고 있는 고난을 의식하는 것 보다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이었다.

 

주님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하셨다. 이것은 교회에 임박한 고난을 미리 예고한 것이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비롯한 그 시대의 성도들은 눈 앞에 임박한 고난을 목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 앞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면 그 두려움이 어떻하겠는가?

 

얼마전 중국에서는 기독교 지도자 600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항시 그러한 위험 속에서 주를 예배하고 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 처한 교회에게 주님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하신 것이다. 과연 이들에게 어떤 보장이 있기 주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A.주목하라

먼저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주목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그 어떤 제시된 모델을 향해 시선을 집중시키신 것이다. 그들이 먼저 주목할 것은 마귀가 행할 일들이다. 주님은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시험을 받으리라' 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시험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마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성경은 사단과 마귀를 동일시 하고 있다. 주니은 앞에서는 유대교 집단을 가리켜 사단의 회(會)라 하였고,  여기서는 마귀가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줄 것이라 하셨다. 사단은 눈에 보지 않게 역사하는 영적 배경이라할 때 마귀는 어떤 일들을 행하는 실제적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마귀가 역사하는 곳은 성도들의 가운데라 하겠다.

 

따라서 가장 큰 문제는 믿는 자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의 결단이다. 결국 마귀는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앞잡로서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가룟 유다는 당신일 수 도 있고 나 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속에 있으면서 그 배후에는 유대교의 종교적인 집단이 헤롯과 머리를 맞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B. 십일 동안의 시험

여기서 또 우리가 주목할 말은 '몇 사람을 옥에 던저 시험을 받게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사단의 역사는 결코 전체적일 수 없음을 뜻한다. 우리 주님은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신 분이지만 마귀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는 피조물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몇 사람을 옥에 넣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험'(test)인 것이다.

 

이미 우리는 사단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옥에 가두는 것을 보아 왔다. 또한 우리는 옥에 갇현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풀려 나왔는지를 알고 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나왔으며 그의 세 친구는 불 가운데서 지키심을 받았다. 또한 천사들이 헤롯의 옥에 갇힌 베드로를 이끌어 내었으며 주님은 바울과 실라가 갇힌 옥의 터를 움직여 그들을 구원하셨다. 결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옥에 묶어 놓을 수 없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너희가 십일동안 시험을 받으리라'는 말씀이다. 십일동안이란 문자적이든 비유이든 긴 날이 결코 아니다. 주님은 40일 동안을 마귀에게 시험 받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사십일동안 시험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40인 고난과 시험의 완전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일이란 견딜 수 있는 시간이다. 다니엘은 그의 동무 3명과 바벨론 궁에 있어 왕이 주는 산해진미를 거절하고 환관장에게 열흘동안 우리를 시험하여 채식과 물을 먹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열흘이란 수의 완전수로서 충분히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험의 기간인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너를 밀까부르듯 청구하였으나 나는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시험하였노니 돌이킨 후에 너의 형제들을 굳게 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 마음에 역사하는 마귀의 시험이다. 이것은 주를 배반할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결단하는 믿음의 전쟁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이라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마귀와의 전쟁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 십일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마음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하루가 천년과도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를 향한  믿음이 있다면, 주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심을 알고 있다면 십일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닐 것이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단 십일을 견디지 못하여 마귀의 밥이 된 일이 없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C. 충성(faith full)과 면류관

주님은 십일 간의  마귀의 시험에서 이겨낼 성도들을 향하여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하셨다. 이것은 마귀를 이겨낼 수 있는 무기이다. 여기서 충성(킹제임스-신실)이란 두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하나는 복종을 요구하는 군대 용어이고 하나는 성실한 믿음(faith full)을 요구하는 '신실함'이다. 다시 말하여 죽기까지 신실한 믿음을 지키라는 뜻이다.

 

주님은 충성의 댓가를 주시겠다 약속하셨다, 그 충성의 댓가는 생명의 면류관이다. 성경에는 의의 면류관 (딤후4:8), 기쁨의 면류관(살전2:19), 영광의 면류관(벧전5:4)이 소개되고 있다. 야고보도 시험을 이긴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약1:12)을 주실 것이라 기록하였다.  이 모든 면류관은 그리스도인들이 최종적으로 받을 영예의 상이다.

 

성경이 말하는 면류관은 세상의 왕관이 아니다. 이것은 운동경기에서 최고의 승자에게 수여하는 월계관이며 신부에게 주는 화관이며 충성스런 일군에게 주는 상급의 관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준비된 면류관은 다른 사람이 받고 말 것이다, 면류관은 최종 승리자에게 수여 되는것이기 때문이다.

 

V. 생명의 면류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

 

주님은 항상 귀 있는 자들을 찾으신다. 마가복음 4장에서 주님은 천국복음을 선포하시며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하셨다. 또 주님은 계시록 13장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하셨다.이 세상에 귀없는 자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들 속에는  듣지 못하는 귀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듣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들의 마음이 세상에 팔려 성령을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말씀이 성령이 하시는 말씀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내 생각을 따라 전달된 말씀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메시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적이 아니고 교회에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항상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개인적인 음성을 들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는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개인적이될 때 마귀가 속삭이는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도 이기는 자를 찾으셨다. 여기서 이기는 자라는 것은 투쟁과 투쟁 즉 이길 때까지 투쟁을 하는 성도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투쟁의 시간은 시험의 기간 십일동안이기 때문에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것이다.

 

 A.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

주님은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하셨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두번째 사망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말씀이다. 주님은 이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둘째 사망이란 말은 유일하게 계시록에만 사용된 말이다. 계시록 20장 5절에는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부활이라 기록하였고 다시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기록되었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백보좌 심판 앞에 설 때를 말한다.  그때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 즉 사망과 음부 속에 갇힌 영혼들을 모두 보좌 앞에 나와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저져 버리게 된다. 이제 더이상 사망과 음부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사단을 천년 동안 옥에 가두고 이 세상을 통치 하신다. 이 때 교회는 왕과 제사장이 되어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 천년이 지나면 사단이 잠간 풀려 세상을 속이고 사람들을 모아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몰아내려 대적한다. 그러나 이 때 주께서 사람들을 미혹하던 마귀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있는 유황불 못에 넣어 버린다.

 

  B.천년왕국의 왕과 제사장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때  자신이 마귀에게 미혹당하지 않을까 염려한다. 그러나 이미 예수를 믿는 당신에게는 마귀가 당신을 유혹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당신의 이름은 이미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고 당신의 영혼은 이미 천사장의 나팔과 함께 하늘로 옮겨진 부활의 영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영원한 생명에 들어 간 당신을 미혹하지 못한다.

 

이때 미혹당한 사람들은 천년동안 살면서 사단의 세계를 체험하지 못한 영혼들일 것이다. 그들에게도 시험의 기회가 주어져 예수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마귀의 유혹을 따를 것인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이 때의 성도들은 크게 두 무리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첫째 부활안에 들어 온 성도 즉 교회와 육체로 대환난을 통과한 이스라엘 성도들이다. 그들은 주께서 통치하시는 천년동안 수많은 자식을 낳게 될 것이며 그때 태어난 사람들은 악이 없는 세상 가운데서 선을 따르게 될 것이다. 사단은 잠시 풀려나 그 사람들을 시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