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계시록 강해

(계시록2:5) 교회의 Problem

이요나 2007. 2. 24. 13:42

(계시록2:5) 교회의 Problem

 

(계2: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시록 1장을 3주에 걸쳐 강해를 하였습니다만 너무 조급한 것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설명하려 했던 나의 욕심도 있었고 말 주변이 부족하여 충분히 설명을 하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요한 계시록의 두번째 단락 즉 주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신 바 '이제 있는 일'에 대하여 살펴 볼 차례입니다. 이 부분을 읽는 우리는 먼저 이 편지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일곱교회는 교회사의 연속적 기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지나간 시대에 있었던 참고 사항 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기 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누누이 증거하듯이 이 편지를 쓰신 분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이시며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시작과 끝이 되신 분이며,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며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주께서 계시록을 셋으로 분류하시며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부분을 가리켜 '이제 있는 일' 이라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 볼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쓴 편지는 이 편지를 읽는 각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로 받아드려야 할 것입니다. 

 

  *편지의 특징

일곱교회로 보내는 편지는 칭찬과 책망과 약속과 권고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편지의 서식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일곱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없었으며 서머나와 빌라델피아 교회는 책망이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각 교회의 활동의 다양성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서식의 특징을 살펴 볼 때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교회는 먼저 약속이 주어지고 권고를 하셨으며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게디아 교회는 권고 다음에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편지의 서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느냐 하겠지만 어느 것이 먼저냐에 따라 전달되는 뉴앙스가  달라지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일곱 아들이 있어 그들에게 각각 어떤 중요한 일을 맡기려 할 때 먼저 아들 중에서 가장 맏이를 불러 세워 그가 잘한 일에 대한 칭찬과 노고를 치하하여 다른 아들들에게도 본이 되게 할 것입니다.  또한 그가 잘못한 일을 엄히 책망하여 다른 아들에게도 경계를 삼을 것이며 그가 앞으로 꼭 해야할 일을 권고하고 그 일을 마쳤을 때에 돌아갈 보상을 약속하게 될 것입니다.

 

  * 시대적 상황

오늘은 입곱교회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함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에베소 교회란 이미 우리가 사도행전과 바울의 에베소서에서 공부한 바 있는 바울이 개척한 에베소 교회를 말합니다.

 

그 당시 바울이 개척한 에베소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핍박 이후 전세계 교회의 구심점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에는 교회가 개척된지 1세기가 가까왔고 또 에베소 교회가 개척된지 40여년이 지난 때라 주의 사도들이나  초기 동역자들은 거의 순교를 당하고 교회는 차세대 지도 체제로 들어 갔습니다.

 

그당시 교회는 전세계에 설치된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확장되어 각 지역 유지들과 유합된 유대인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했으며 또한 날이 갈수록 부폐해진 로마정부는 혼란해지는 민심을 잡기 위해 황제를 신격화 하여 황제를 숭배를 제도화 하였습니다. 따라서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교회는 자연히 잔혹한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서신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로마정부의 외적인 핍박은 오히려 교회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결속 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유대사상과 헬라철학을 받아드린 거짓교사와 거짓 예언자들이 잘못된 지식이 교회 안에까지 유포되면서 교회는 교리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배경

소아시아의 가장 발달된 항구도시인 에베소는 로마와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발달된 유럽의 문명과  신비속의 아시아 문명이 교차되는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제국은  동방정복에 나섰던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구축한 군사 도로를 확충하여 유프라테스에서 골로새와 라오디게아를 잇는 도로와  갈라디아에서 사데로 이어지는 도로, 그리고  남쪽 카이스터 유역에서 올라 오는 도로를 에베소를 중심으로 구축하였습니다.

 

이러한 위치적 요건으로하여  에베소는 로마제국의 팍스 로마나를 실현 시키기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춘 도시로서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의 혜택을 누린 아시아 최대의 도시로 발달되었습니다. 로마정부는 로마군대를 강제로 주둔시키지 않았으며 본 고장 출신의 관리(행19:35; 서기장)를 두어 지방 자치제를 운영하였으며 순회 재판소를 통하여 공정한 재판을 실시하였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에베소는 오늘날 올림픽을 방불할만한  아르테미스(다이아나 여신의 그리스 명칭) 체전을 매년 5월에 개최하여 로마인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체전은  25.000명이 들어 가는 '데아트론'이란 대형 야외극장에서 치루어졌는데 이곳을 관리하는 관원(행19:31)을 아시아의 지도자란 칭호를 주었습니다.

 

소아시아의 항구도시인 에베소가 이처럼 로마인의 시선을 집중 시키게 된 데는 천혜적인 지리적 여건도 있었지만 고대로부터 발달된 종교적 특성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에베소에는 세계 7대불가사이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The Temple of Diana)이 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에베소의 가장 큰 자랑으로서 왕들이 헌납한 127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봉헌되었으며 36개는 금과 보석으로 세공되었다고 합니다.  신전 휘장 안에는 수많은 젖가슴과 삼지창과 몽둥이를 든 다이아나 신상이 불쾌하게 서 있는데 이 신상의 유래는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아데미 신전에는 수천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성전 청소와 예배를 주관하며 신전을 유지비를 벌기위해 밤이면 거리로 나와서 창녀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 이 신전은 어떤 죄인이라도 성전 안으로 들어 오면 체포할 수 없어서 이곳은 범죄자들의 안식처 역활을 하였으며 또 에베소 문자와 신상을 판매하는 매장이 성하여 은장색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과 정치적 배경으로 사람들은 비도덕적이고 향락적이었으며 납잡하고 잔인하여 범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인 이로한 에베소에 바울이 3년에나 머물면서 복음의 요충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기록하였는가 봅니다.

 

*에베소 교회의 유래

우리가 앞에서 에베소 지역의 특수성을 살펴 보았듯이 에베소는 로마와  아시아를 잇는 정략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9절에는 아덴과 고린도 일대를 돌아 에베소로 건너온 바울의 2차전도 여행에 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새롭게 만난 동역자 아굴라와 브리스가를  에베소에 남겨 두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에베소에 머물르던 중 애굽에서 태어난 성경학자 아볼로를 만나 그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수하여 아덴과 고린도 지역에 파송하였습니다.(행18:19-28).  그후 바울은 다시 에베소에 와서 3개월간 머물며 믿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두해동안 머물르면서 대적하는 유대인들 속에서 따로 두란노 서원을 세워 제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행19장 참조).  그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다시 에베소에 돌아와 3년을 머물며 그 지역 일대의 교회를 돌보았습니다(행20장 참조).

 

사도행전 20장 17절에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전하는 사도바울의 고별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은 주후 57년 경의 일로서 그후 3년 후 바울은 처음 로마의 감옥에 갇혀 에베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출옥 후 바울은 에베소에 돌아 와 초대감독으로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 두었습니다(딤전1:3). 전승에 의하면 주후 66년 경 유대전쟁이 있은 직후 사도 요한이 예수의 모친과 함께 에베소에 있었다고 합니다.

 

I. 수신자와 발신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1절)

 

이제 우리는 이미 1장에서 언급된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가지의 형상 중 가장 대표적인 켈릭터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켈릭터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에게 증거한 것 즉 요한이 우리에게 증거한 '본 것'에 해당합니다.

 

1장20절에서 주님은 요한에게 '네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입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본 것은  일곱 교회 사역자들의 비밀과 일곱 교회에 관한 내용입니다.

 

  A. 에베소 교회 사자

요한은 1절에서 이 편지의 수신자가 '에베소 교회의 사자'라고 밝혔습니다. 영어 성경은 천사라고 기록되었습니다만 '사자'란  메신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에베소 교회에 세움을 받은 교회 지도자를 말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곱교회 속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과 같이 교파로 불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성경은 왜 교회를 오늘날처럼 교파별로 분류하지 않고 지역별로 분류하였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에는 좀 나은 편입니다만 10년전 갈보리채플 서울교회를 개척할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갈보리채플은 어느 교단에 속한 것이냐 물어 왔습니다. 우리는 교파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들은 혹시 이단이 아닌가 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유일신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 교파를 묻는 것이라면 네가 믿는 종교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냐 부처를 믿는 불교냐 마호멧교냐 하는 식이 되어야지 장로교냐 순복음이냐 하면 않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에베소 교회 사자 서머나 교회 사자, 버가모 교회 사자라고 지역적인 분류를 한 것은 교회가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각 지역별로 개척되어 지리적 환경과 정치, 경제, 풍습에 따라 각 교회가 처한 상황이 다르고 그에 대한 대응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아들들이 각기 결혼하여 여러 곳에 산다고 할 때 누구의 아들 어떤 아들 이렇게 칭하지 않고 서울 사는 아들, 일본에 사는 아들 이렇게 부르게 됩니다, 모두가 한 아들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각 지역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태풍이 불면 바닷가에 있는 아들들을 걱정하게 되고 감음이 오면 농촌에 사는 아들들을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또 중국에 사는 아들들에게는 예배생활을 위해 기도할 것이며 소돔과 같은 타락한 도시에 사는 아들에게는 세상에 빠지지 않기를 노심초사하게 될 것입니다.

 

   B. 성전을 밝히는 금촛대

'일곱 별을 붙잡고'에서 '붙잡다'라는 말로 사용된 '크라테인'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잡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배와 통치' 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붙잡다'라는 말은 부분을 잡아 취한 소유격이 아니라  그에 속한 목적격을 전체를 수용한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장중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하셨습니다.

 

여기서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라는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일곱 금촛대는 하나님의 성전을 밝히는 등을 켜두는 도구입니다. 제사장은 임무는 성전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잠20:27)기록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등불을 끄는 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은유되었습니다(렘25;10).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있니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하시며 세례 요한을 가리켜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요5:35)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 하시며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는 것은 집안의 사람들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마5:14,15, 막4:21).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눈은 몸의 등불이라'(마6:22)하여 제자들이 바라보는 실체를 경계하셨으며 이러한  빛과 등불과 등경에 관한 모티브는 신약 전체에서 이어지며 계시록 21장 23절에서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에서 완성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가리켜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라 하신 것은 전세계 복음화의 교두보적인 위치에 있는 에베소 교회의 사역자들의 사역적 행위의 막중한 임무를 언급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II. 에베소 교회의 칭찬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2절)

 

먼저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훈계할 때 먼저 그 잘한 일들을 칭찬하는 것은 의기 소침한 자녀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주님의 칭찬은 먼저 너희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계시다 하셨습니다.

 

  1. 행위

여기서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라 기록된 첫번째 접속사 '행위와'는 무엇과 무엇을 나열한 일반 접속사가 아니라 그 앞에 있는 것을 설명하는 헬라어 보설적 접속사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그러므로 나는 네 수고와 네 인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 말에 행위라 할 때는 좋지 않은 행동으로 인식이 됩니다.또한 행위(deed)는 액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것 이미 확실하게 들어 난 어떤 일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들의 확정된 '행위'(deed)는 무엇일까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의 행위 즉 그 사역자들이 행하여 나타난 사역들에 대하여 구구하게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미 성경이 교회와 그 사역자들이 행하여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밝혔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님은 열두 사도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이 너희를 내 제자로 알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 즉 교회가 사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장 명령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은 또 제자들에게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교회가 행하여야 할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교회가 맡은 중대한 사역 중에 하나는 성도들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사도와 선지자와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를 교회에 세우신 것입니다. 여기서 봉사의 일이란 그 직분에 합당한 일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사도들이  일반적인 교회 봉사에 빠져 자신들이 맡은 직무에서 벗어난 것을 발견하고 성령이 충만한 일곱집사를 세워 성도를 섬기는 일들을 하게 하고 자기들은 기도와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자들의 가장 중요한 행위는 기도와 가르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하였고 네게 주신 은사를 따라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여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라(딤전4:13-16) 하였습니다. 또 바울은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명하였습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디모데에게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었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 이것은 모두  모두 말씀 사역과 관련된 일들입니다. 과연 교회를 위해 세움을 받은 자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모든 말씀을 가르쳤다 하였으며 주님께서도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니다'(요17:8) 하셨습니다.

 

또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하였습니다. 이미 주님은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진다 하셨습니다(요17:17, 딤전4:5). 또한 베드로는 주의 날을 바라보는 모든 종들을 향하여 '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3:12)하였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행함도 덧없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수고와 인내

여기서 '수고'(코포스)는 지치도록 일함을 뜻합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위해 애쓰는 드루보사와 버시의 수고를 격려하였으며(롬16:12) 자신은 누구보다고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고전15:10) 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저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한다'(갈4:11)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수고란 기진맥진할 때까지의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인내'라고 쓰인 '휘포모네'라는 단어는 복음의 전용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운명적 체념이 아니라 고난과 환난에 굽히지 않고 최고의 영광을 향하여 달려가는 용기있는 대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수고와 인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자세라고 하겠습니다.

 

  3. 악한 자의 경계

주님은 두번째 칭찬은 에베소 교회의 사역자들이 '악한 자를 용납지 아니한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악한 자에 대한 경계는 성경 전반에 흐르는 철학이라 하겠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이 악해진 원인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데서 출발하였습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마12:35) 하셨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에 대해 의심하는 서기관을 악한 생각을 보시며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막9:4)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라(마6:13)고 가르치셨으며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되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악한 자라함은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해와 단비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악이란 주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마음이 교만하여 불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악한 자를 묶인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들이 서로의 체면에 얽혀 용서라는 미명아래 성경이 금한 일들을 외면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음행하는 자를 용납한 고린도교회를 책망하며 내가 영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자녀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보고도 못본체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4. 거짓을 드러냄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세번째 칭찬으로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 낸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험하여'라는 말에 주의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편지에서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 하였습니다.

 

거짓을 들어 낸다는 것은 진리에 속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자신이 진리 속에 거하지 않으면 스스로 어둠에 처한 자로서 어둠이 어두움을 밝혀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몇년전 교계에서는 서로 이단 정죄하는 붐이 일고 있었습니다. 유명 목사들의 설교를 일일히 발취하여 그 잘못된 것을 끄집어 내어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교단 속에 있는 사람들의 악한 행동들, 음행과 탐욕과 재물에 얽힌 것들은 모른체 하며 아직 옳바른 지식에 이르지 못한 잘못된 가르침을 모두 정죄한다면 일반적으로 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성도들도 모두 마귀의 자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미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 가르친 것입니다.

 

성경은 이단에 대한 분명한 경계를 기록하여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말하는 교리적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구속을 하신 것 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것과 다시 오실 것을 부인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도 잘못된 교리에 치우쳐 있으면서 상대의 교리를 비방하고 정죄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악에 속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책망하여 그들의 발을 씻겨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경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들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페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 죄를 짓느니라'(딛3"10,11)하였습니다.

 

  5.거짓 사도를 들어냄

자칭 사도라 칭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근본 질서를 무시한 것이 됩니다.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택하심과 보내심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주님은 사도를 세우실 때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어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어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셨습니다.(막3:13-15). 따라서 사도라 하는 칭함은 오직 사도들과 주의 교회를 통해서만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의 직무를 맡을 수 있는 자격에 대하여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 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서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를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1:21-22)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위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믿후1:11)증거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 이후 이 문제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이미 교회에서는 바울과 함께 동역하는 바나바를 사도로 불렀으며 사도들과 함께 복음에 동참한 사람들 속에서 사도의 직분을 이어받았습니다.(딤전1;10).

 

그러나 문제는 이방세계를 돌아 다니며 자칭 사도라 칭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이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미 주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거짓교사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을 경계하시며 열매로 그 나무를 알지라 하셨습니다(마7:15-20).   

 

 고린도후서 11장과 12장에는 그 당시 난무하고 있던 거짓 사도에 대한 일들이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흩어진 교회를 돌면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사도로 행세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고후11:13)하였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려운 중에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말하여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11:12)말하며 '내가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2) 증거하였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부자 청년의 비유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 들어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 가는 것 보다 힘들다 하신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으로 복음 사역자들로 재물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6. 게으르지 않음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칭찬 중에서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리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히10:32)기록하였으며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성경의 증인들을 열거 하였습니다(히11장 참조).

 

또 성경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히12:11,12)하였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난에 참여하신 것은 부르신 우리의 본이 되셨음을 증거하며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하였습니다. 

 

III. 에베소 교회 사역자들의 책망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4,5절)

 

이제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사역자들의 잘못된 일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책망이란 징계와 판단이 아니라 그들이 상실한 것들 잘못한 일들을 일깨우기 위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처음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것은 택하심과 부르심일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하였으며 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셨습니다.

 

  A.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

또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하셨음으로 이것은 그들에게 주신 계명과 관계가 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계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리라' (요13:34,35)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가장 근본된 것은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사역자들은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수고하며 인내로 주의 말씀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악한 일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또 각 지역에서 행하는 거짓 사도들의 거짓 된 것을 가려 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 속에서 주께서 명령하신 본연의 일들이 식어져 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5장까지는 새계명에 대한 말씀이 상세히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주께서 제자들에게 사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의 모티브는 세속식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에베소 교회의 책망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회 사자들은 정말로 주예수 그리스도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따라 수고와 인내 속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거짓 사도들을 가려내는 동안 주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신 주된 모티브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장자권을 가진 교회와 같이 교회 위에 위상을 높혔지만 그들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뜻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B. 생각하고 회개하라

주님은 먼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발견하는 시발점이 됩니다. 그들은 다시 말씀을 상고하며 서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두번째 그들이 해야할 일은 회개였습니다. 회개란 주의 뜻 가운데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나는 이 글을 보면서 우리 갈보리채플의 돌아 보았습니다. 참으로 갈보리채플처럼 주의 부르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에 충실한 봉사를 하는 교회도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 나는 정통성 우열에 휘말려 있는 갈보리채플 사역자들을 볼 때 이들 또한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모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반대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회는 항상 반대편의 입장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C. 니골라당

주님은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6)하셨습니다. 니골라당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로 시작된 이단입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성령이 충만한 일곱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은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의 진리를 얻어 자유자가 되었으므로 행함에 있어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교리를 펴낸 이단집단이었습니다. 주님은 니골라당에 대하여 버가모 교회에서 다시한번 언급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니골라당은 구약시대의 발람 선지자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도 매우 심각합니다. 최근 한국교회에는 이러한 자유사상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끊어내지 못한 사람들이 믿음으로의 구원을 내세워 육체의 방종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도 이것을 미워한다 하셨습니다. 주께서 니골라당의 행위를 가리켜 '이것'이라 칭한 것으로 주께서 이들의  교리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IV. 생명나무 과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7)

 

이 말씀은 개인적이고 전체적인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귀있는 자'라는 말씀은 개인적이고 '교회들'이란 전체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곱 별 즉 일곱 사자는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을 행한 개인적인 말씀이며 일곱촛대는 세상을 밝히는 교회전체를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하셨습니다. 오늘날 잘못된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마치 자신이 성령인 것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메시지로 보아야 합니다.  이미 주님은 성경을 통하여 위에서 언급된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A. 이기는 자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하셨으며 다시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기는 그에게'라는 말은 6장2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기고 또 이기려'한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하여 이길 때까지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로 부단한 노력의 필요성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하셨습니다. 생명나무는 창조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범죄한 인간이 상실한 동산입니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어 하나님께 범죄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신 것은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셨습니다. 죄인된 인간에게 영생을 금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다시 요한 계시록 22장에서 나타납니다. 이 생명나무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과 함께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볕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라'(계22:6) 하셨습니다. 나는 이 속에 우리 모두의 이름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