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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2:20)내 종들을 가르치는 자칭 선지자

이요나 2007. 2. 24. 13:37

(계시록2:20)내 종들을 가르치는 자칭 선지자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오늘은 네번째로 소개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하신 주의 말씀으로 두아디라 교회는 곱교회 중 가장 긴 편지를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주목할 일이 있다. 일곱교회의 편지가 2장과 3장으로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이 편지들은 주께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 사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이다. 따라서 분량이나 내용으로 볼 때 구태어 두장으로 나누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2장과 3장으로 나눈 것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단정해서는 않된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원래 성경은 책별로 두루마리 형식으로 쓰여졌다. 이 두루마리 성경이 장별로 나누어진 것은 70인 공회의 정경 채택과 함께 내용과 문맥을 따라 장별로 편집된 것이다. 따라서 이 일은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복음의 백성들을 위해 편집하신 것이 틀림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책별로 나누어진 장별을 따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살펴야 할 것이다.

 

2장과 3장의 문장의 특성을 살펴 볼 때 흥미롭게도 2장의 세 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교회는 권고 다음에 약속이 주어졌으나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피아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먼저 약속이 주어진 후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는 권고가 주어졌다.

 

또한 문맥의 흐름을 볼 때 앞의 세 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교회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을 성취하기 위한 그리스도 교회로서의 일체성을 엿 볼 수 있다. 따라서 에베소 교회와 서마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는 이방 속에 탄생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각각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여 에베소 교회는 교회의 시작과 사역적 본질에 대해 관찰한 것이라하면 서머나 교회는 교회의 최종적 목표와 교회가 겪어야 할 연단에 관한 측면이며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지배 가운데 종경유착을 꾀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열거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두아디라 교회는 앞에서 책망한 그리스도의 권고를 받아 잘 이겨낸 아름다운 교회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두아디라 교회는 오늘의 우리 교회의 모습이라고도 하겠다. 주께서 만국을 다스릴 철장권세와 새벽 별을 주시겠다는 약속 속에서 우리는 완성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I. 눈이 불꽃같고 빛난 주석(18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은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2:18)

 

A.     두아디라의 배경

  두아디라는  버가모 동쪽 72km 내륙의 아시아를 연결하는 로마의 통신과 교통의 중심 도시로서  서북으로는 아시아의 수도 버가모와 사데를 연결하고, 동남쪽으로는 빌라델피아와 라오디게아를, 서쪽으로는 서머나와 비잔틴을 잇는 길목에 있다.

 

또한 두아디라는  양모산업의 발달로 염료와 피혁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도시로서 각 기업마다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각 조합에 가입하여 각기 맡은 생업에 종사하였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소개된 루디아는 바로     두아디라 성 출신의 자주장사이다. 자주장사란 자주색 염료를 취급하는 상인으로 그 당시 자주색 옷은 왕실과 귀족들만이 입는 고급 옷감으로 이들의 상권이 얼마나 커다란 세력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어떤 신학자들은 빌립보 교회의 주모격인 루디아가 후일 두아디라에 돌아 와 두아디라 교회에서 이세벨과 같은 역활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러하였다면 바울이 데마를 언급하였듯이 루디아에 대하여도 언급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아디라 지역의 특성상 이 지역 사람들은 생업과 관련하여 모두 각자의 조합에 가입하여야 했고 또 그 조합의 주체가 이방신을 섬김으로 하여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행하는 축제에 참가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고 또 그들의 축제에 어울렸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서 이미 콘스탄틴 대제가 교회를 국교로 삼아 교회가 모름지기 종교에 반열에 들어 섰음을 알고 있다. 그로하여 전도라는 명목으로 세상의 제도가 교회안에 들어 왔고 또 성도를 구별하는 직제가 만들므로 주로부터 책망을 받았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사역자들이 사랑과 믿음과 섬김에 관련된 활동을 위하여 적당이 세상의 교리를 용납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B.     불꽃 같은 눈

오늘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 앞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캐릭터는 "불꽃 같은 눈과 주석 같은 발" 이시다. 이 형상은 사도요한이 1장15절에서 친히 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또한 계시록 19장 12절에는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라고 소개 되고 있다.

 

계시록 19장은 주의 재림과 함께 나타날 음녀의 심판과 진리의 말씀 앞에 충성을 다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받을 축복에 대하여 기록되었다. 따라서 오늘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주의 형상은 19장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주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것'(살후1:7)이라 증거하였으며 히브리서 기자도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히1:4) 증거하였다.

 

  C.     빛난 주석 같은 발

또한 빛난 주석 같은 발이란 주의 심판과 관계가 있다. 다니엘서 10장 6절에는 그 눈이 횃불같고 그 팔과 발이 빛난 놋과 같은 주의 형상이  소개되고 있다. 다니엘은 10장 서두에서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하여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증거하고 있다.

 

또 에스겔 선지자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가리켜 풀무 가운데 있는 놋의 찌끼와 같다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두아디라에 나타나신 주께서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무엇을 언급하고 계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II. 두아디라 교회의 사역(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우리 성경에 '사업'(Deed)이라 기록된 단어는 2장 5절의 '행위'와 같은 성격으로 단독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뒤에 후속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와 관련된 다양한 일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 성경이 '사업'이란 의미로 번역한 것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해 둘 필요는 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사역들을 볼 때 날이 갈수록 사역적인 범위에서 사업적인 범위로 확장되어 가는 느낌이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을 위한 활동이라도 과연 이것이 주님의 뜻인가 할정도로 그 범위가 사업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 사자에게  '네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하셨다.이것은 리더의 사역적 열정과도 관계가 깊다. 그래서 성경은 부름받은 자들의 성결과 담대함을 요구하고 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의 사역적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사랑을 논하건데 이것은 교회의 가르침의 중심 사상이며 믿음 또한 교회의 가르침의 중심 사상이다.  흥미롭게도 사랑과 믿음이란 대주제 다음에 섬김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섬김은 사역자들의 봉사(Service)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은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로 삼으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기록하였다. 여기서 봉사의 일이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위한 가르침에 대한 봉사를 의미한다.

 

또한 베드로는 초대교회 속에서 사도들이 구제의 봉사에 빠져 본연의 맡은 사명에 충실하지  못함을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이 일들을 위하여 성령이 충만한 일곱집사를 택하여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 하리라'(행6:2-4)하였다. 따라서 두아디라 교회는 섬김에서도 충실했던 것 같다.

 

또한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인내에 대하여 칭찬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인내란 어떤 일에 대한 내적인 참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용기와 인내 그리고 그로 인하여 부디쳐 오는 고통에 대한 투쟁을 포함한 것이다. 이와 같이 두아디라 교회는  그 모든 것에서 부족함이 없는 자질을 갖추었다 하겠다.

 

III. 두아디라 교회의 잘못(20-23)

"그러나 내가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는 도다"

 

A.     여자 이세벨(왕상16:31)

 여기서 언급된 이세벨은 열왕기 16장 31절에 기록된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서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왕비가 된 이방 여자이다. 그녀는 시집을 오면서 자기 왕국의 바알 신을 갖고 들어와 바알 종교의 확산을 위하여 450명의 선지자들을 키웠으며 또 아세라 상을 위해 400명의 제사장을 두었다. 우리는 열왕기상 18장과 19장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이들과 벌인 사투를 잘 알고 있다.

 

이세벨은 자기의 일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죽이려 하였으며 또 아합왕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술수를 써 율법으로 조상의 땅을 팔 수 없는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후일 엘리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된 예후의 지지자들에 의해 창밖으로 던져져 개들의 밥이 되고 말았다. 예후는 이세벨을 가리켜 저주받은 계집이라 하였다(열왕18,19, 21장 참조).

 

B.     자칭 선지자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가 자칭 예언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것을 책망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성경적 해석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이 해석을 위해서는 주께서 구약의 음녀 이세벨을 인용하신 성경적 비유에 대한 충분한 고찰과 사고가 필요하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에 대한 분분한 해석을 내어 놓았지만 우리가 제일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자칭 선지자'라고 하신 성경적 의미이다.  성경이 말하는 선지자란 기록하신 성경의 말씀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복음의 일군들을 통틀어 하신 말씀이다.

 

구약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택하시고 기름 부으신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탄생 이후 예언자라는 호칭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장래를 언급할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사도행전에는 빌립집사의 딸 넷이 예언자로 활동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행21:9,10).

 

교회가 탄생된 이후 성령 세례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나타난 가장 큰 신적 현상은 방언과 예언이다. 이를 통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 중에 예언을 더 중요시 하였다. 그 이유는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4:22).

 

사도행전 13장에는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에서의 선지자란 교회를 위해서 특별히 성령으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을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 언급하신 두아디라 교회의 거짓 선지자란 그가 누구인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분명 주께서 세우신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좀더 깊이 고찰해야 할 것은 성경의 기록된 말씀은 모두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말씀을 가르치고 또 그 말씀으로 권고와 책망과 권고를 하는 모든 사역 범위는 예언적 사역 가운데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예언에 관한 은사를 행함에 있어서 성경적 질서를 언급하며 예언을 말하여 책망, 판단, 계시, 가르침, 권면이라 열거하였다(고전12:24-31). 따라서 주의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권면하고 책망하고 또 계시하는 일들이 모두 예언에 속한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고 성령으로 인쳐 이들에게 주의 말씀을 맡기신 것이다. 그로하여 성경은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한 것이다(계19:10). 따라서 오늘 주께서 언급한 '자칭 선지자(예언자)'란 그들이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도 주의 부르심과 기름부음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로 복음과 관계없는 자들이라 하겠다.

 

예수님은 이미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로 미혹케 하리라"(마24:24)하셨으며 베드로 사도는 민간에 거짓 선지자가 일어났다 하였고(벧후2:1) 사도요한도 그의 서신에서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왔다(요일4:1) 증거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에 역사하느냐에 있다.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2:9-10)하였으며

 

다시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1-12) 증거하였다.

 

이미 주님은 양의 옷을 입고 성도를 노략하는 거짓 선지자를 경계하시며(마7:1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하셨으며

 

계속하여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라리"(마7:22,23)하셨다.

 

  1. 가르침

주님은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비유와 함께 그녀의 영향에 대하여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들을 먹게 하였다' 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짓 선지자 이세벨이 그리스도의 종들을 가르치고 꾀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은 그가 종교적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내 종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주께 사명 가진 자들에게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그 당시 있던 신학교를 언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시대에도 분명 예언자 학교가 있었고 또 이세벨도 선지자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참조 열상19장, 열하2장).

 

주님은 24절에서 그녀의 교훈 즉 교리에 대하여 언급하시며 '사단의 깊은 것'이라 주석을 다셨다. 따라서 이세벨의 교훈은 아주 깊고  교묘하고 은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긴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구별할 수 없이 매년 쏟아져 나오는 목사들이다. 더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주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근거를 그들의 출신과 관련하고 또 교회부흥의 능력에 둔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는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신학교들이 들어와 간단히 출석만 하여도 학위를 주는 곳이 생겼다. 만약 신학교만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는 것이라면 목사를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증거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이것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를 양성하는 씨스템이 아닐 수 없다.

 

  2. 행음

주께서 두번째로 지적하신 것은  행음이다. 성경에서 행음은 부도적한 성적 관계를 말한다. 행음의 범위는 매우 넓지만 도덕적이든 윤리적이든 정당하지 않은 성적 관계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행음은  이스라엘의 영적 행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행음에 관하여는 호세야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실제로 호세아 선지자는 주의 명령을 따라 음행한 아내 고멜을 다시 맞아드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호세아서는 선지자 개인의 삶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행음하는 여인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과 권면으로 하나님의 아내된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이혼 당하는 음녀에 대한 비유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호9:1) 책망하였다. 계시록 17장에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여자가 소개되고 있다. 이 여자의 음행의 포도주로 하여 만국이 무너졌다고 소개하고 있다(계18:3).

 

또한 계시록 21장과 22장에는 행음자들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행음자와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은 둘째 사망에 모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행음이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의 뜻이 아닌 세상의 방법들을 교회에 이끌어 들린 것을 의미한다.

 

최근 교회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정말 가관이 아니다. 전도라는 미명아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수원지역의 어느 기도원에서는 수많은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교회 부흥을 위한 집회를 무료로 개최하고 제비를 뽑아 경품을 나누어 준다고 한다.

 

또 최근 인터넷 싸이트에는 마치 세상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축제마당처럼 목사들을 모아 놓고 성령집회를 하는 곳이 판을 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우리나라 유명교단 소속 목사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우상의 제물

주께서 세번째로 지적하신 것은 우상의 제물이다. 이 비유 또한 우리는 성경적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그 당시 두아디라 지역 주민들은 여러 조합의 구성원이 되어 조합에서 행하는 여러가지 우상숭배의 축제에 참가하여 그 제물을 먹어야 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를 믿지 않는 자들도 축제로 지내듯이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어 주의 칭송을 받은 두아디라 교회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우상숭배는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하는 우상에 대한 성경적 정의가 필요하다.

 

주님은 복음사역자들의  물질관에 대하여 단호한 경계를 하시며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마6:24)하셨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가 공중에 나는 새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셨다. 이것은 문론 사역자들의 생활적 어려움이 있을 것을 언급하신 것이지만 그 삶의 주권이 하늘에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가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주님은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며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셨다.

 

바울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딤전6:17) 하였으며 재물은 우상숭배(골3:5)라 하였다.그러므로 주를 믿는 누가 먹고 사는 것에 억매여 더러운 재물에 얽힌다면 그는 결국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다.

 

  C.     회개의 기회

주님은 21절에서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말씀하셨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베드로는 주께서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3:9)증거하였다.

 

나는 최근 인터넷을 통하여 모이는 젊은이들의 모임에 대하여 많은 고심을 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우리 모임을 자신들의 육체적 충족의 도구로 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온전한 회개에 이르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계속 음행에 빠져 다른 사람에게 그 영향을 미친다면 나는 단호히 그들을 주의 심판에 넘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의 목적은 우리를 정죄하거나 또는 멸망시킴과 심판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사랑은 공평하고 시작과 끝이 동일하여 모두가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D. 주의 심판 3가지

주님은 22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질 것이다 경고 하셨다. 여기서 '침상'이란 또한 '병상'을 의미한다.

 

나는 이 일이 이미 우리 눈앞에 와 있음을 목도한다. 이 일들은 주의 오심 전에 있을 일로서 그들에게 미혹된 주의 성도들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병들어 있는가? 후계자 문제로 세습과 분열이 분분하고 재물축재로 하여 얼마나 많은 교회가 분열되고 다투고 있는가?

 

주님의 두번째 심판은 큰 환난이다. 이것은 행음자와 결탁하여 간음하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이다. 어찌 더러운 것에 손을 대고 손이 더러워지지 않겠는가? 최근 우리는 도청사건에 연루된 정계 지도자와 재계 지도자들의 환난을 목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커다란 환난이 불어 올 것이다

 

주님의 세번째 심판은 사망이다. 이것은 영적인 구원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주를 믿는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망과 음부의 열쇠는 여전히 주께서 쥐고 계시다. 다시 말하여 그 주권이 주 예수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들을 죽인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더욱 두려운 말씀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의 자녀들이란 과연 누구를 의미한 것일까? 나는 일본이나 미국의 한인교회들을 돌아 보며 각 교단에 소속된 교회들이 상당히 퇴보적 위치에 있음에 놀랐다.

 

미국의 경우 문화와 정치 경제 그리고 복음에 있어서도 한국보다 상당히 진보된 위치에 있는데 비하여 한국교회는 유난히 19세기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마 미국을 방문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느낌일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한국적 교단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문화와 사회구조와 반비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둔화된 모습이 감지되는 것이다. 나는 과연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며 이들이 믿음의 백성인가 느낄 때가 있다.

 

계속하여 주님은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니라 내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심판이 교회 전체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하셨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말한 사람의 '뜻'이란 내장의 하나인 '신장'을 언급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이 신장에서 나온다 했으며 사람의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하였다.

 

좀 비약적인 말이긴 해도 행음에 빠진 자들을 병상에 던진다하신 말씀과 관련하여 신장의 질병을 생각하게 된다.  최근 현대인 중에 가장 고질병은 신장과 관련된 질병으로 당뇨를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뇨를 과로에서 온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한국교회의 목사님들 너무 불필요한 일에 과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IV. 권고와 권면(24-29)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않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24)

 

    A.     권면의 대상

이 말씀은 특별한 대상자들에 하신 말씀이다. 먼저 두아디라에 남아 있는 자들이다. 나는 두아디라의 시대에 남아 있는 성도들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들이라 생각한다.그들에게 주님의 별이신 새벽별이 허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때 정말 주의 오심이 가까이에서 느껴지고 있다. 이미 성경에 예언된 일들이 하나씩 우리 앞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된 두아디라 교회에 관한 일들이다. 주님은 지금 우리가 속한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주님은 여기서 다시 이세벨의 교훈 즉 교리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신학교에서 불교 교리를 생각해서는 않될 것이다. 다만 잘못된 교리 즉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B. 사단의 깊은 것

여기서 언급된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서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증거하였다. 따라서 '사단의 깊은 것'이란  사단의 영이 직접 관장하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바울사도는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이 교훈을 가르치는 집단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어디서 나의 프로필을 요구할 때마다 망설이게 된다. 이 땅의 모든 목사들이 다 나온 변변한 신학교 졸업장 하나 없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어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면 오늘의 형편보다는 나았을 것이고 또한 동료들 속에서 덜 외로웠을 것이다.

 

이런면에서 미국의 갈보리채플 사람들은 동등함을 느낄 것이다. 미국 갈보리채플을 일으킨 가라성 같은 목사들의 이력서를 보아도 한결같이 화려함을 찾아 볼 수 없다. 나는 때때로 이들 중에서 위로를 받는다.

 

어떤 분들을 만나면 그들은 먼저 신학적인 문제를 거론한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이 배운 신학적 지식에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교리 속에서 자신의 지식을 쌓아 왔기 때문에 결국 다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서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폐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3-5) 하였다.

 

   C. 굳게 잡으라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을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하셨다. 나는 갈보리채플 목사된 것에 감사를 드리고 있다. 내가 할 일이란 말씀을 살피고 내 앞에 이끌어 온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 뿐이기 때문이다.

 

갈보리채플은 새벽예배도 금요철야도 또 매주 돌아야 하는 심방도 없다. 사역자들은 일주일동안 말씀을 공부하며 기도하며 자신에게 맡긴 양들에게 주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한 주간에 두번의 설교를 위해 한주간 밤낮 성경과 씨름을 해야한다.

 

주님은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끼지 굳게 잡으라'하셨다. 나는이 말씀을 보며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 뿐이다.

 

물론 다른 목사들도 그렇겠지만 나는 성경을 보는 시간처럼 기쁜 일이 없다. 메시지를 준비하면 한절한절 읽을 때마다 깨달아 오는 그 기쁨이 없다면 나는 십년의 세월을 지탱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어느날 어떤 목사님이 내게 후일 주께서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 물으시면 무어라고 답하겠느냐 물었다.  나는 그에게 나는 제주가 없어서 다른 일은 하지 못하였고 오직 주의 뜻을 알고자 성경만 파다가 왔다 답할 것이다 답하였다. 그러나 내가 굳세게 잡고 있을 것은 오직 한권의 성경책일 뿐이다.

 

V. 약속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26,17)

 

이제 주님은 이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신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기는 자와 내 일을 지키는 자'라는 조건이 붙는다. 여기서 이기는 자란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며 주의 일이란 주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맡기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

 

  A. 철장권세

흥미롭게도 주님은 이들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과연 이것은 주의 재림 이전의 일인가 이후의 일인가? 이 일은 분명 주의 재림 이전에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이후는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 같이 하리라 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시편 2편 8절의 인용으로 이 말씀은 메시아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열방을 유업을 주시며 하신 말씀이다.

 

나는 전세계속으로 서서히 움직이는 말씀운동을 느끼고 있다. 유독 우리나라에만 느린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어느 산속에서부터 서서히 일고 있는 성경통독 운동은 장래를 기약해 볼만하다.

 

우리나라는 메시야의 철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부서지지 않을 그릇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법들은 이제 곧 주께서 진리의 입김으로 멸하실 것이다. 그날에 주께서 나의 고통을 신원해 주실 것이다.

 

  B. 새벽 별 언약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새벽별을 주리라"약속하셨다. 새벽별은 밤이 지난 후 아침에 뜨는 별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임할 약속은 어둠이 깊은 후에 이루어 질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다. 또 주님은 이 땅에 펼쳐질 음행하는 세대와  믿음 없는 세대를 책망하셨다(막7,8장 참조)

 

성경에는 여러곳에서 별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성경은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온다(민24:17) 하였으며 동방박사들은 메시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음을 기록하였다. 또한 사단으로 불리는 루시퍼는 계명성 즉 빛을 가져 오는 자로 불려지고 있다.

 

다니엘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 예언하였으며 베드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대하여 '날이 새어 너희 안에 샛별이 떠 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1:19)하였다.

 

주님은 새벽별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를 말하여 "나 예수는 교회들에게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광명한 새벽별이라"(계22;16)하셨다.

 

새벽별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아직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메시야 언약인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만국을 통치할 권세만 받는다면 그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결단코 새벽까지 살아 있어 주의 새벽별을 보리라.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