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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편120편-124편)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1)

이요나 2007. 2. 26. 10:12

(시편120편-124편)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1)

 

 (시편120:5) 의인의 고통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5)

 

시편 120편부터 34편까지는 모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주석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는 백성들을 준비 시키기 위해 쓰여진 시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절, 오순절, 나팔절과 같은 3대 명절이 있었습니다. 이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기를 힘씁니다. 이것은 유대민족의 자존심이기도 합니다.

 

이 때가 되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7일 동안 축제를 갖습니다. 이 축제들은 자자손손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정기를 고취시키며 이어 내려온 오직 택한 백성들만이 누리는 기쁨의 명절이었습니다. 이날들에 갖는 이들의 기쁨은 그 어느 민족도 느낄 수 없는 신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시편120편은 성전을 향하는 성민들의 홀가분한 마음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통의 세월을 벗어버리고 천국을 향해 길을 떠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과 같다 하겠습니다.

 

다윗은 1절에서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성소를 향하는 성도의 제일성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찾지 않을 것이며 그의 응답도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환난은 주를 찾는 첫번째 원인이기도 하고 주와 성도를 잇는 끊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2절에서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미친 환난의 직접적인 요소들을 말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난을 말할 때 도발적인 자연적 환경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쓰나미와 태풍과 가믐과 같은 환경적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역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적 고통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감수하여야 할 하늘로부터 오는 천혜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난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 서로 사랑을 나타내고 자비와 인내와 협동의 미덕을 발휘하여 재난을 극복하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 가운데 나타나는 하늘로부터 재난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세상은 민족과 이념과 종교를 떠나 일치 하나가 되어 재난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재난이 멈추면 각 나라들은 서로 자기들의 유익을 따라 상대를 대적하고 일어 나게 됩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여 분열시키는 것은 거짓된 입술입니다.  세치도 안되는 혀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하였으며 다시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3:6) 하였습니다.

 

다윗은 궤사한 혀의 대가를 말하여 장사의 날카로운 살과 로뎀나무 숯불이리로다(4) 하였습니다.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은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로뎀나무 숯불의 화력은 지극히 강하여 급히 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궤사한 혀의 속성을 말하기도 하며 또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받을 형벌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5절에서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하였습니다. 메섹은 야벳의 아들로서 두발과 함께 오늘날 러시아 민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에스겔서 38장에서 메섹과 두발이 모두 마곡의 땅의 왕 곡에게 종속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종족으로 거론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게달의 장막이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에 속한 족속(사21:17)으로 오늘날 아라비아 민족의 근원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여 이슬람 교도들을 의미 합니다. 이들은 염소의 머리털로 천막을 만들어 생활하였기 때문에 게달의 자손(아1:5)이라 불렀습니다. 고대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들을 어두움의 자식들로 여겨왔습니다.

 

오늘 다윗이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한 고백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사실 오늘날 이스라엘의 고통이 이 두 세력들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이교도들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교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와 함께 오래 거하였도다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들은 어쩔 수 없이 이방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 하나님은 그들을 고토로 불러 모아 시온의 영광을 회복하실 계십니다. 그로므로 시편 120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첫 노래로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 또한 메섹에 유하며 개달의 장막에 거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121:3) 신뢰의 노래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3)

 

이 시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노래 속에서 세상의 환난을 피하여 특별히 성전으로 올라는 성도들의 강한 의지와 신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로하여 이 시편은 성도들이 애창하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1절에서 내가 산을 들어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산이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근원인 시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임하신 곳입니다.

 

 다윗은 2절에서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답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의 근원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됨을 자랑하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8:19,20)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일어서고 흩어짐은 모두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3절에서 여호와의 우리의 관계를 언급하여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며 계속하여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용기를 더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하심 중에서도 우리는 늘 넘어지고 실족을 하고 있습니다. 이떻게 보면 이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성도는 그의 예정 가운데 거한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그의 인내와 자비하심이 우리를 죄 중에서 완전하게 속량하실 것입니다.

 

계속하여 다윗은 그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들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5,6) 하였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거듭하여 우리에게 여호와의 입장을 강변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여 우리가 당하는 환난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환난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늘 대적에게 속임을 당하고 비난을 당하며 세상의 미혹에 빠져들어 내 영혼의 위험까지 임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이 버림을 당하지 않는 것은 내 영혼을 지키시는 분이 우리의 지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 하였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7,8)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환난을 대처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너를 밀까부르듯 청구하였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노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단이 우리를 청구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의 영혼을 지키시기 위해 사단의 시험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당신의 배려와 염려 그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는 환난 중에서도 나를 지키시는 분이심을 내가 아오며 내 인생이 주 앞에 있음을 감사합니다.

 

(시편122:4) 예루살렘의 평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4)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을 행하여 올라가는 성도들의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성도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1절에서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출발의 기쁨을 언급한 것입니다. 아마 이 기쁨은 성도들만이 누리는 기쁨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의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일로 마음이 무거워졌을 때 누가 우리를 교회로 이끌 때 그 마음이 열리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 사람씩 짝지어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도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하나가 넘어질 때 그 동무가 일으켜 줄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가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하여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우리의 결정된 마음의 실행을 언급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듣고 교회를 향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이 교회 안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그것은 실로 현실 가운데 나타난 성도들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요한은 주 예수를 증거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다 하였습니다. 말씀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현실 가운데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교회에 발을 들이지 않음은 매우 잘못된 믿음입니다.

 

다윗은 3절에서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하였도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조밀한 성읍이란 성도들의 친밀한 관계를 언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건물의 구조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친밀한 교제를 뜻한 것입니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와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하였으며 다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근본적은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도들의 온전한 교제입니다.

 

계속하여 다윗은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택하신 백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와 마음을 합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택하심의 복입니다.

 

이제 다윗은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선포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루살렘은 평안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예루살렘은 전쟁의 전흔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그의 나라의 임하심을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평안이라함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 곧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엡1:23) 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우리 교회의 평안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시작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 고난이 있음으로 교회는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였고 고난 가운데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형통함을 얻었습니다.

 

성경은 교회의 평안을 기원하는 그의 성도들을 향하여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내가 네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평안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환난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회가 평안하면 모든 성도가 평강을 누릴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교회로부터 발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결국 성도의 평안은 교회의 평안이기도 합니다. 이 평강의 복은 우리의 발이 기쁨으로 교회 안에 설 때 비롯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123:1) 여호와의 종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

 

시편123편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종들의 고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평강을 위해 세움을 받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조소와 멸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역대 선지자들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읽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세우심을 받았음에도 그들의 인생은 오직 버림을 받아 죽기까지 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고백 속에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 놓인 애절한 기도소리를 듣게 됩니다. 다윗은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열방을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위엄과 명예와 영광을 한 몸에 지닌 지상 최고의 왕 중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의 넉넉함에 기이함을 느낍니다. 사단의 세력이 이처럼 강력한 시대에서 어떻게 그들이 그처럼 풍족한 세상을 누릴 수 있는지 이해가 않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나는 오늘 다윗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눌림을 당하는 이 고통 속에서 나를 지켜 주소서 나는 오직 눈을 들어 주를 향할 뿐이나이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시편124:2) 나의 편되신 여호와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진 아니하셨더면(2)

오늘 우리는 다윗의 시편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이 짧은 시 속에 유구한 이스라엘의 고뇌와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로서 우리는 다윗은 그 심령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미리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다면하고 이스라엘의 현재사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주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아마 부모로부터 평안한 시대의 믿음을 터득한 사람들은 다윗의 고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만 나는 가끔 주께서 나를 구원하지 아니하셨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내 모습은 오늘날 내가 안타까워하며 그들의 구원을 간구하는 옛 친구들과 같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내가 받는 이 은혜는 고통 중에서 나를 복되게 하신 긍휼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않았다면 먼저 저희의 노가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국가로부터 수없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산을 메울 정도로 많았으며 그들의 기세는 바다를 메우기 충분하였습니다. 그때 마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의 눈을 밝혀 하나님의 군대가 함께 하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때 물이 엄몰하여 시내가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하였습니다. 지금 다윗은 영혼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멸망 중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지 않은 은혜를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멸망을 당하여 나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왕이 죽임을 당하고 국가의 이름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혼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우리를 저희 이에 주어 씹히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서에서 사자의 입에서도 지키신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이렇게 지키실 것입니다.

 

계속하여 다윗은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우리의 몸이라 하지 않고 우리의 혼이 사냥군의 올무에 잡혔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 지식들을 사로잡는 거짓 목자들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있을진저(사5:18) 하였으며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사5:12)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사단의 회를 경계하여 그들이 자기의 종들을 광명한 사자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말하며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설혹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 중에 처하였다 하드라도 악한 영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이것이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끝으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천지의 틀을 세우실 때부터 계획되셨음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택하심을 찬양하여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1:3-5) 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성경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하였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에서야 나의 영혼이 주 앞에 있음은 나의 굳은 의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께서 나의 생각과 믿음을 지키심을 알았사오니 주여 나로 하여 감사가 넘치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세미한 음성
글쓴이 : 요나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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