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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편91:3) 사냥군의 올무와 극한 염병

이요나 2007. 2. 26. 10:19

(시편91:3) 사냥군의 올무와 극한 염병

 

(시91:2,3)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우리는 앞장 90편에서 모세의 노래를 살펴 보았습니다. 모세의 노래 속에는 인생의 무상함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 날수들을 계수하는 지혜를 얻어 감추어진 천년의 지혜가 들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모세의 노래 속에서 계시록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이 말씀을 대한 우리는 천년의 지혜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보장되어 하나님의 거처에 거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시편90편은 계시록 1장의 비밀을 미리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인생의 날 수를 계수하는 지혜를 얻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우리가 살펴 볼 시편91편은 90편과 함께 꼭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천년왕국을 잇는 다리와도 같아서 이 말씀을 얻지 못함으로 모두 쳔년의 생명에 들어감을 훼방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로 천년의 지혜를 얻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사냥군과 그의 무기들을 살펴 보고 그리스도의 피난처로 들어 가는 법을 배우게 되겠습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온통 바다이야기에 중독되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창조이야기에 빠졌으면 좋겠습니만 창조 이야기가 교도소 감방의 갈급한 영혼들을 일깨우고 있는 동안 이 나라 정권 수뇌부에서는 아무도 생각지도 못한 바다이야기를 지어 내어 온 나라를 중독에 빠트렸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발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다 아는 이야긴데 서로 눈 가리고 야옹하며 오리발 내밀기 여념이 없습니다. 이러한 북새통에서도 국군 통수권 문제로 시국대회가 열리고 있고 또 9월정기 국회에서는 사학법 개정 문제로 시끌법석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 앞에 국가 백년대게를 이어갈 창조이야기는 그 머리조차 들지 못한채 트랜스젠더들의 인권을 빌미로 성별변경법안이 국회 문턱에 슬그머니 올라가 있습니다. 이제 이 나라에는 남녀의 성별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시대로 돌입하여 동성애는 더 이상 비인류적인 성행위가 아닌 국가가 공인한 합법적인 성생활로 둔갑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더욱 놀라울 것은 지난번 판결을 내린 법원을 대표하는 최고의 장이 한국의 대표하는 O교회의 장로이며 남자를 여자로 만들고 여자를 남자로 제조하는 부산의 D의대 학장 K교수는 부산이 자랑하는 모교회 집사라 합니다. 참으로 자랑스런 성도를 두셨으니 주님은 그 교회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I. 올무와 염병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3)

 

A. 새 잡는 기술자

시편기자는 1절에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앞에서 살펴 본 90편 1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존자란 지극히 높으신 분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의 주 창조자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보다 더 높은 분인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창조자이고 하늘과 땅 그리고 그에 속한 모든 것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경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라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여기서 은밀한 곳은 은신처를 말합니다.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요새이기도 하구요, 흥미롭게도 시편기자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하였습니다. 결국은 같은 말씀인데 특별한 뉴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능자의 그늘이란 전능하신 자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를 설명하여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하였습니다.

 

시편기자는 3절에서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질 것임이로다 하였습니다. 우리말에 열명이 한 사람의 도둑을 막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작은 구멍이 봇물을 모두 쏟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도적을 맞고 그것을 다시 찾는 것 보다는 처음부터 도적을 맞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어떤 사람은 문단속을 이중삼중으로 하고 또 문지기를 겹겹이 세웠는데도 도적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문을 다 열어 놓고 희희락락 자기 할 일을 다 보고 다녔는데도 집안의 금은보화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 보화를 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 사냥군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에도 밀엽군들이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산허리 도처에 올무를 놓고 있습니다. 얼마전 새끼를 밴 개가 밀엽꾼들이 놓은 덫에 채여서 반신불구 상태로 이리저리 피해다니다 어느 농가에서 새끼를 풀었던 일이 테레비에 나왔습니다.

 

그들이 놓은 덫은 교묘하고 짐승이 다니는 길목을 잘 알아서 한번 걸리면 천하장사도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사냥군들은 그 덫을 놓을 때 짐승의 좋아하는 먹이를 미끼로 삼습니다. 낚시꾼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사냥군은 짐승이 좋아하는 미끼를 잘 압니다. 짐승들은 후각이 발달 되어서 먼 거리에도 먹이의 냄새를 맞고 앞을 다투어 달려 옵니다.

 

최근 바다이야기도 똑 같은 수법입니다. 이들은 모두 사냥군들입니다. 상품권이라는 덫에 당첨신호를 알리는 냄새를 풍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결국 그 후각을 마비시켜 그 영혼을 중독시켜 버립니다.

 

나는 다행이 술과 마약 하지 못하는 체질 때문에 알코올 중독은 되지 않았지만 유난히 도박에 약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도박을 즐기시던 아버지 때문에 도박에 대한 경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성장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중독이 되는 것은 경계에 대한 무방비에서 옵니다. 만약 그 상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의 실체를 알면 처음부터 도박에 중독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새가 만약 사냥군이 덫을 놓은 것을 알았다면 결코 덫에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근 동성애자들의 성전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어려서 동성애에 물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성애에 중독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일반 성중독자도 마찬가지이지만 동성애 중독은 그 도덕성과 윤리적 가책을 받아 그 심적 피해와 영향을 무엇으로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성중독은 담배나 술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마약과 도박도 그 중독의 영향은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이러한 중독에 빠지면 스스로 헤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영혼의 구원자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음부에 갇힐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질 것임이로다 한 것입니다. 이 상태는 이미 사냥군에게서 사로잡힌 상태를 말합니다. 건질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도 소망은 있습니다.

 

4절에서 시편기자는 저가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하였습니다. 그 깃이란 은혜를 말합니다. 높은 사람이 베픈  은총 같은 것입니다.

 

에스더가 자기 민족을 살리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왕 앞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왕이 깃을 내밀지 않으면 그녀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에스더는 왕의 은총을 받아 백성들의 목을 챈 덫을 풀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된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냥군의 덫을 푸는 것이 사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냥군들이 사술을 행하여도 그 사술을 막는 것은 진실함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사술을 많이 사용합니다. 오늘날 성도를 미혹하는 이단들도 모두 이러한 숫법을 이용합니다. 긍정적 고백으로 소망을 이룬다고도 하고 조상의 귀신을 위로해야 한다고 말하며, 또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저주를 끊으라고도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전도폭발이라는 묘한 신약을 사용하여 교묘하게 자기의 수단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것은 마치 다단계 상술과 같아서 한번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원리 속에는 교묘한 사냥군의 미끼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것이 아니면 결국 미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밥에 중독되는 것 보았습니까? 공기나 물 그리고 학문연구와 성경공부와 같은 것은 절대로 중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양식은 중독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생명과 관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 것은 다 중독됩니다. 그러므로 진실함이 아닌 것은 모두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는 사냥군의 덫인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의 율법에 매인 종교중독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또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며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삼가 조심하라(막4:23) 하셨습니다. 만약 누가 확실한 이념적 지식을 갖지 못했을 때 주체사상을 주입시킨다면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생명을 말살하는 역할에 압장설 것입니다.

 

또 주님은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삼가 주의하라(눅8:18) 하셨습니다. 같은 원리라도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다시 말하여 주의 재림에 대하여 그날은 아들도 모르고 천사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께서 아신다 하신 말씀을 주께서 이 말씀을 하셨음으로 우리가 주의 재림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전도에만 힘을 쓰라 한다면 이것은 커다란 오해가 발생합니다. 전도는 주의 재림의 때를 맞게 하기 위해 해야 하는 지상명령이지 우리가 이 땅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명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하여 시편기자는 너는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로다(6,7) 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밤이면 다닐 수 없는 세상이 오고 말았습니다. 도처에서 테러와 폭행과 저주가 염병처럼 도사리고 있습니다. 또한 밝은 대낮에도 사기꾼들이 거리마다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너는 목도하리로다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하였습니다. 만약 악인의 심판이 없으면 의인이 무엇으로 위로를 삼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행위대로 판단하시며 그 행위의 값을 배로 되돌려 주시는 것입니다.

 

II. 의뢰하는 하나님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9,10)

 

A.     피난처

피난처란 은신처 도피처가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레위 지파지역에 도피성을 만들어 부지에 범죄한 사람들로 생명을 부지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악이 만연한 세상 가운데 사냥군과 극한 염병에서 우리를 지키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 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란 나에게 무엇이 되신 하나님 곧 나의 구속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이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8) 하였고 다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의 가족이 구원을 얻으리라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영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여 인간사의 모든 것은 그와 관계가 없다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모형제와 처자와 전토를 버리면 금세에 배로받고 영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없다 하였습니다. 또 이사야는 주께서 손이 짧아서 구원치 못함이 아니라 너희가 범죄함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시편기자는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11,12)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용하던 말씀입니다. 주님을 높은 산으로 이끌고 올라가서 뛰어내리라 하면서 이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로 하는 사람들의 수법입니다. 이들은 모두 영혼의 사냥군들입니다.

 

먼저 주께서 주의 사자를 보내신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요. 이것은 세례요한이 증거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를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며 아버지께 보혜사 성령을 요청하셨습니다. 성령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성취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에 택하고 부름받은 주의 종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부어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그의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믿음의 모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그들이 주의 말씀을 따라 그의 백성들을 올무와 염병에서 지켜 낼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네가 사자의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누르리로다(13) 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주님은 사도들에게 명하사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5-18)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주께서는 각 사람에게 성령을 주어 그로 그리스도의 사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가 이 말씀을 바르게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삼가 조심하라 하셨는데도 많은 교회에서 세례에 관하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침례를 말하며 예수께서도 받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침례를 받았으며 주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침례와 함께 나타난 기사와 이적들이 수없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침례를 도외시 하고 입으로 성령세례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침례는 택하신 그의 종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 권세 속으로 들어 온 자들은 모두 성령의 능력을 받아 뱀을 집으며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III. 구원의 의지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이라(14)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 이러한 은혜가 임하는 것일까요? 먼저 성경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이라(14)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를 사랑한다나의 이름을 안다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자는 그의 이름을 아는 것이며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동행한다는 의미도 되며 함께 산다는 뜻도 됩니다. 부부의 관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두번째로 성경은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하였습니다. 간구란 간청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방법이긴 하지만 오직 그에게만 소망을 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구란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를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 주님은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날은 손으로 세는 것처럼 초라하고 연약하지만 그리스도의 응답 가운데 임하신 우리의 날 수는 장수함으로 보답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함이 영원토록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 당신은 영화로운 주인이십니다. 지존하신 곳에 앉으시어 오직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행하소서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리이다. 내 영혼이 독수리와 같이 솟아 오를 것이니이다. 아멘

 

출처 : 세미한 음성
글쓴이 : 요나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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