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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편강해 (시편73:26) 가까이 있는 자의 복

이요나 2007. 2. 26. 10:25

(시편73:26) 가까이 있는 자의 복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볼 말씀은 시편 73편부터 75편까지입니다. 시편 제 3권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다윗시대의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던 아삽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아삽의 이름으로 기록된 시가 모두 아삽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아삽 가문의 제사장들이 기록한 것이 포함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74편은 다윗의 시대가 아니라 바벨론 포로기에 쓰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아삽이란 이름은 그 후대의 가문의 성과 같은 명칭으로 쓰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시편 73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기자들이 어떤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야 하는 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삽은 제사장 중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올릴 찬양을 위한 작사와 작곡을 하고 지휘를 하여 아름다운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중요한 직책에 있는 오늘날 성가 대장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가대장의 믿음의 토대는 하나님의 신뢰가 그 첫 번째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랜 인생살이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기쁘고 평안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는구나 생각하며 감사하게 됩니다만 환난과 고통을 당할 때에는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일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린 것은 아닐까? 과연 내가 믿는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신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한 믿음을 위하여 우리의 인생 속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고통을 만나게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려운 짐을 우리의 허리에 두셨다 고백하였습니다.            

 

I. 이해할 수 없는 일

우리는 인생 속에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잘 사는 것입니다. 아삽은 본문 서두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기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악인의 형통함 때문입니다. 여기서 형통함이란 모든 일이 잘되어 평안한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같은 생각을 하는 부분입니다. 많은 정치인들과 재벌들은 고사하고 우리 주변에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들을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아삽은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다 기록 하였습니다. 우리 말에 사촌이 잘되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약한 말입니다. 사촌이면 형제인데 형제가 잘 사는 것을 보면 신경질이 나고 질투를 느끼다니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보건 데 그들은 죽을 때까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희희낙낙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강건하고 또 고난도 없으며 재앙을 만나지도 않습니다. 또 재난을 만나도 그들은 그 재난을 쉽게 모면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교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안하무인으로 무자비한 방법을 동원하여 재물을 모읍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돈 버는 일에 눈이 밝아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얻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있는 돈을 털어 장사를 하던지 어디에 투자를 하면 하는 것마다 망하는데 그들은 하는 것마다 모두 성공을 하여 재물을 얻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재벌들이 수난을 받고 있습니다.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수천억을 사회에 환원하겠다 하기도 하고 갑자기 선한 사람들이 된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눈 깜박할 사이에 수백억 수천억을 만듭니다. 도대체 나는 억이란 돈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 조차 이해가 않되는 데 말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 정도가 되면 스스로 겸손하여 선한 일도 할만한데 이제는 기고만장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며 세상을 자기의 말로 움직이려 합니다. 자신들의 혀에서 쏟아내는 말들이 마치 하나님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복종하고 세상에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는 이 사람이 곧 하나님 아니냐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아삽은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도다(12)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마음이 청결하고 내 하는 일이 정직하여도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B. 의인의 생활의 무익함

아삽은 내 마음이 깨끗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 하였습니다. 평상시 잘하다가도 악인들이 형통한 것을 보면 내 모든 의로운 행실에 의심을 갖게 됩니다. 자식들은 늘 세상에 나가 친구들과 비교하며 부족한 현실에 대하여 불평을 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정결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믿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모든 일에서 의로운 일을 하는 우리의 마음이 기쁠지라도 현실은 정말 비참해 질 때가 많습니다. 남들은 그러한 나를 가리켜 조롱하며 어리석은 자라 비웃습니다.

 

또 어디 그뿐입니까? 악인들은 하는 일마다 형통한데 우리는 종일 하는 일마다 재난을 맞습니다. 무슨 저주가 임한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그 재난을 피하려 어떻게 피할 길을 찾아보면 오히려 일이 더 엉켜버려 더 깊은 늪에 빠지고 맙니다. 아삽은 나는 종을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하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며 뒤로 국 쏟고 손 데고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야 할까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악을 쓰며 살아야 할까요? 그럴수는 없습니다. 이미 나는 악인의 길에서 돌아선 의인이라서 내가 만약 그들과 같은 말을 한다면 우리는 주께 배신자가 되고 맙니다.

 

아삽은 내가 그들처럼 말하였더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을 행하였으리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의 배신은 다가 올 주의 아들들의 세대들에게 범죄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후대들에게 의인의 행실을 증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평안하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머리를 싸매고 생각할수록 마음이 혼란하고 번민이 쌓이게 됩니다. 아삽은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다(16) 하였습니다.

 

나는 가끔 내 어려운 형편을 풀어보려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여 세상으로 나아가 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도리어 거미줄처럼 내 발을 묶어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때는 이미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습니다. 어두운 터널을 스스로 통과하여야만 합니다. 아마 많은 크리스챤들이 모두 이러한 일들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II. 성소에서의 깨달음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 곧 성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소란 성전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어 그곳은 일년에 한번씩 대제사장이 죄를 사하는 피를 가지고 들어 가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의 몸으로 제물을 드려 우리의 죄를 구속하고 지성소의 휘장을 열어 노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성전의 성막이 둘로 갈라졌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아무 꺼리낌 없이 성소로 들어 오는 것입니다.

 

아삽은 17절에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운명이 하나님께 속한 비밀임을 말한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정죄를 이미 받았다 기록하였습니다.

 

A.     악인의 종말에 대하여

계속하여 아삽은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셨다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멸망을 말한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인간의 영혼이 영원한 것인 줄 알았다면 그 영혼으로 흑암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였을 것입니다.

 

아삽은 사람이 꿈을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20) 하였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비유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생을 꿈에다 비교하였으니 말입니다. 우리 말에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꿈이 한낮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주께서 잠시 잠드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교만함과 악행을 못 보신 것처럼 하시지만 주께서 깨시면 그들의 형상을 멸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형상을 멸시하신다는 것은 그들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의 멸시함을 받아 영영한 지옥에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우리에게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계시록에서 천사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5) 기록하였습니다. 일장춘몽하자고 내 영혼을 지옥에 던지겠습니까?

 

B.     육체의 연약함에 대하여(20-22)

21절에서 아삽은 내 마음이 산란하여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성소에서 악인의 멸망을 본 후에야 얼핏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악인의 풍요로움을 질투하고 갈망질팡하던 자신을 발견하고 그때서야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죄를 지으면서 마음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재미에 도끼 썩는 줄 모르다가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이 찔려 주께 죄악을 쏟아 놓게 되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소라는 의미입니다. 성소는 주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다시 말하여 교회입니다만 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손수 쓰신 돌비와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싻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주의 오시는 그날까지 친히 가르침을 받고 지켜야할 성경의 모든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 곧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것으로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것과 같은 만나 항아리나 아론의 싻난 지팡이에 관한 말씀을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성소라는 곳에 들어가 있다면 세상을 탐하는 당신의 산란스런 양심을 깨우치고 당신이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아직도 성전 뜰에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됩니다. 이미 지성의 휘장이 열려 친히 들어가 언약궤의 비밀을 모두 볼 수 있는데 아직도 당신은 누가 당신의 죄를 씻어주어야 할 것처럼 성전 뜰에 서 있는 것인 아닌지요.

 

 그래서 아삽은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한 것입니다. 한치 앞을 못보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택하신 자들을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의 성소로 인도하여 교훈하시고 주의 날에 우리에게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주와 함께 왕노릇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아삽은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가 없나이다 하였습니다. 비록 우리의 육체가 연약하고 마음이 쇠할지라도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나의 반석이며 영원한 기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시삽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은 그의 말씀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당신을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지키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부디 아름다운 영혼을 지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세미한 음성
글쓴이 : 요나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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