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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편72:7) 통치자와 후계자

이요나 2007. 2. 26. 10:25

(시편72:7) 통치자와 후계자

(시72:7)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이 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시입니다. 솔로몬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이 간음으로 얻은 우리아의 처 밧세바가 낳은 아들입니다. 다윗은 많은 처를 두었지만 그 여인들은 진정한 마음의 사랑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정략적인 결혼으로 얻은 아내들입니다.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 받기까지에는 그보다 먼저 낳은 아들들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겪어야 했고 그후 아도니야가 제사장 아비아달과 요압장관의 지지를 업고 왕권에 도전하여 반역을 일으켰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왕위는 선지자 나단의 지혜로 솔로몬에게 돌아 왔습니다. 

 

왕권을 물려받은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께 수와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막강한 권세와 영화는 아버지 다윗의 믿음과 언약을 따라 성취된 것입니다. 아마 이 시는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하기 직전에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먼저 솔로몬은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사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적 묵시로  말하자면 여기서 언급된 왕은 메시야를 뜻하는 것이나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아버지 다윗의 판단력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과 지혜와 능력을 받은 왕 중의 왕으로서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솔로몬이 선왕의 판단력을 요구한 것은 다윗은 이스라엘의 백년대개를 이룩할 기름부음을 받은 통치자로서 이스라엘 국가이념과 통치에 속한 토대를 구축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통치자의 정치철학과 이념과 사상은 곧 국가관이며 국가의 기상과 정신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통치자의 판단력은 국가의 중흥과 국력의 원동력이며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능력이라 하겠습니다.

 

통치자의 온전한 판단력을 위해서는 남다른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한 지혜란 지식과 총명을 겸비해야 합니다. 총명은 어떤 사물을 파악하는 능력으로서 명철한 분별력을 발휘합니다. 따라서 총명이 없는 지혜는 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면 통치자로서 세상을 통치하는 온전한 지혜는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요? 물론 지식과 경륜을 터득한 문무백관들의 기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혜와 지식과 경륜을 가춘 참모들을 기용한다는 것 그 자체가 통치자의 지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제일먼저 자신의 권세가 어디로부터 출발한 것인지를 깨달아  권세의 주권자에게 지혜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 기록하였습니다(롬13:1). 물론 이는 하늘에 속한 비밀한 경륜으로 정사를 탈취하기 위한 끊임없는 영적전쟁이 있습니다만 궁국적으로 모든 권세의 근원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늘과 이 땅에 속한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통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천지만물의 주권자의 지혜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법의 공정성 불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과거사 청산과 같은 역사 되돌리 속에서 오늘의 친구가 원수가 되어야 하고 조상의 허물이 자자손손 족쇄를 채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바탕인 용서와 화해를 봉쇠해는 정책입니다.

 

또한 근자의 위정자들이 분배란 명분으로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좌파식 정책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정책들은 국가 최고 통치자의 사상과 이념에서 출발하게 되는데 그 원인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그로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얻지 못하는데서 기인합니다.

 

무신론자들에게 있어 창조의 지혜란 죽은 부처에게 절하듯 하는 무지에 관한 것이겠지만 어쨋든 통치의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면 빛들의 아들들을 훼방하는 악한 영들로부터 기인된 것이냐로 나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하였고 우리에게 '마귀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명하였습니다(엡6:11).

 

계속하여 솔로몬은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천대만대에 이끌어갈 후계자 구도를 요총한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왕이 있어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주의 판단력을 얻어 은혜의 선정을 베풀었다 하드라도 이것이 자손만대에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왕들을 살펴 보면 간혹 선정을 펴 백성들의 칭송을 받은 왕이 있더라도 그 다음 대에 와서 폭정이 일어 났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가 이룩한 굳건한 왕국이 천세만세에 이어지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하나님께 ‘주의 의’를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자신이 왕이라도 죄속에 속한 인간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의'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서 곧 거룩함과 공평과 공의와 정직한 의인의 품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세상이 죄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몇 대에 걸쳐 하나님을 믿는 대통령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치정에 부끄럼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를 따르는 위정자들과  아들들의 부정부패는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습니다. 이를 볼 때 오늘 솔로몬의 기도는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이르러서 전대미문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는 성전환 수술을 한 동성애자가 제소한 원심을 깨고 사회적이나 의학적으로 여성의 조건을 갖추었다면 소수의 인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에게 여자로서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한다는 대법관의 판결을 접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앞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성을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남성나 여성로 임의로 바꿀 수 있다는 판결이기도합니다. 이것은 대법관의 판결이 창조자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뒤없어 버리는 기록문서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는 암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남성성 여성성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창조로 사용된 히브리어는 '바라'로서 무에서 유를 창출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생물학적 암수에 관한 구별은 2장 23절의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리 칭하리라'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내가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짓다'라는 히브리어는 '야차르'로서 '만들다'(아사)라는 '아사'라는 말과 원천적으로 구분됩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만들다'(바라)는 '창조'(바라)에서 다시 용도에 따라 만든 것으로 창조가 없으면 무엇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짓다'(야차르)는 근본적으로는 창조에 속한 것이지만 재탄생적(거듭남) 의미가 부여됩니다.

 

다시 말하면 달과 별과 나무들은 천지창조(바라)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이 만드신(아사) 것이지만 생물은 창조(바라)에 속한 것이며 사람(남성&여성)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창조(바라)입니다. 그러므로 생리적인 구분을 칭한 남자와 여자 역시 하나님의 창조사역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따라서  설혹 누가 의학적이든 인위적으로 암수의 구별을 변경하였다 하드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 곧 남성, 여성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의 권위에 속한 것으로  피조물의 영역에서 침범할 수 없는 창조의 권위입니다. 따라서 누가 이것을 범한다하면 그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어느 숫닭이 암닭의 모습을 사모하여 알을 낳고 싶고 병아리를 품고자 하여 생물학자에게 부탁하여 의학의 기술을 동원하여 숫탉의 벼슬과 깃털을 자르고 암닭의 벼슬과 깃털을 이식하고 또 숫닭의 성기를 잘라 암닭의 성기를 이식하였다한다고 숫탉이 알을 생산하며 숫닭의 기상 높은 울음소리가 변하겠습니까? 외모가 바꾸었다고 그것을 숫닭이라고 시장에 내다 팔면 사기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무모한 일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회주의에서도 인정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선교대국이라 일컬으며 교회가 자판기처럼 늘어선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합법화 되고 있는 것이지 나는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심히 두렵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그들의 모습과 생활 방법은 여성화 되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생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윤리적이든 모두 정상적인 남자들입니다. 설혹그들이 자신들의 욕정을 달성하기 위해 남성의 성기를 포기하고 여성호르몬을 투입하고 턱을 깎아내고 모근제거와 유방확대 수술 했다 해도 그들은 바꿀 수 없는 원초적인 남성성이며 또 생물학적으로도 남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들을 국가에서 여성의 호적을 바꾸어 준다면 이들은 합법적으로 남성과 결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감히 이 일을 처리한 대법관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성전환 수술을 한 연예인 하리수를 며느리로 받아 드릴 수 있는가? 또한 당신의 아들이 동성애적 성향이 있어 성전환 수술을 하고 여자가 되고자 한다면 당신은 아들의 호적을 여자로 바꾸고 가문의 족보를 정정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의 무리가 주장을 하드라도 다수의 침묵적 합의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법이란 마땅히 소수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 기준인 법률은 창조자의 섭리와 묵시를 토대로 인류의 도덕과 윤리를 포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러한 판결을 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합당하신 판단이 그와 그가 내린 경건치 못한 일들에 임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 모두가 최고 통치자가 의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70편 2절에서 솔로몬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여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통치를 이어받은 후계자의 의로움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 의는 주께로 온 것으로 바로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표상입니다.

 

계속하여 솔로몬은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들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3)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은 최고 통치자가 주의 의로 다스릴 때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큰 산과 작은 산들이란 각부 장관에서 지방 단체장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백성들의 평온하고 강건한 삶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7) 하였습니다. 통치자의 의는 그 미치는 영향이 지대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은혜가 벤 풀에 내리는 비와 같고 땅을 적시는 소낙비와 같습니다(6). 과연 우리는 이러한 나라를 상실하고 말 것입니까? 

 

의로운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나라로부터 공경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역대 선왕들의 선정이 미치는 동안 그 광영이 세상에 널리 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나라와의 수출이 증대되고 국력이 신장되어 세상에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16). 이와 같이 우리나라는 전세계 속에서 주목을 받는 나라로 발돋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국가 통치자의 판단력을 주실 것과 자자손손 국가의 영광을 이끌어낼 후계자가 의인이 되기를 기도하야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세미한 음성
글쓴이 : 요나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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