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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편62-64편강해) 인생은 투쟁이다

이요나 2007. 2. 26. 10:26
 

(시편62-64편 강해) 인생은 투쟁이다

 

                                                   이요나 목사  서울 갈보리채플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시편들은 시편61편과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군대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을 하던 중에 그 나아갈 길을 얻지 못한 채 허공을 방황하는 영혼의 고통을 하나님께 토한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 가는 모든 인생은 그가 부자이던 가난하던 왕이던 노예이든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 속에서 자기의 인생과 한판 씨름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자기 인생을 보람되게 살기 위한 삶의 전쟁이지만 결국은 그 끝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한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우리는 젊어서 나름대로 자기의 인생을 설계하고 그 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생각과 힘의 능력으로 힘껏 달려 나아갑니다. 처음 우리가 길을 갈 때 우리의 계획은 철없는 아이의 꿈과 같아서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하지 못한 체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생각과 힘을 쏟아 붓게 됩니다.

 

대게 이때의 기분은 이제 곧 천하를 얻을 듯한 기대에 부풀게 되어 누가 바른 충고를 해 주어도 그의 말이 귀에 들어 않아 멀리하게 되고 오히려 나의 입맛을 부축이며 함께 육신의 쾌락을 도모하는 어린 친구들의 달콤한 거짓말이 선생이 되기 일 수 입니다.

 

그러나 잘못 채워진 단추는 그 끝이 도달해서야 그 시작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결국 그때서야 우리는 자기가 쏟아 부은 오랜 시간과 노력들이 모두 허사인 것을 알게 되고 그 때에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얼마나 잘못된 것까지 들어와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과 번민의 세월을 살게 되는데 대게 이 때는 돈도 사람도 모두 잃고 늙고 낡아빠진 빈털터리 인생이 되어 자기 이성과의 씨름을 하게 됩니다. 이때는 그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밤이라서 그 어둠의 깊음이 스스로 다 지나기까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데 사실 이때 그가 영혼의 빛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은 소생하고 영원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다시 창조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자신을 불태우던 욕망들은 산산이 부서져 자신의 생각과 이상이 허망 중에 고통 받을 때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이때는 인생의 가장 연약하고 불행한 때이지만 그 영혼에 있어 가장 값지고 존귀한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올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틀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시기에 인생의 허무함을 서술한 것이 솔로몬의 전도서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시편은 이와 같이 인생의 끝 막다른 길목에 다달았을 때 나아갈 향방을 얻지 못한 심령이 깊은 어둠을 방황하며 구원을 찾아 울부짖는 탄식입니다. 아직 자기의 인생과 전쟁을 치루지 않는 젊은이들은 이때 겪어야 할 영혼의 고통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 전쟁은 모든 인생들이 겪어야 할 영혼의 통로인 것입니다.  이 고통의 세월 속에서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깨달은 사람은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62:5) 영혼의 투쟁

다윗은 1절에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열방을 호령하는 위엄과 부귀영화와 권세를 한 손에 쥐고 있는 다윗 왕이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은 것입니다.

 

그는 지금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광야로 도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전쟁으로 하면 그를 따르는 장수와 부하들도 있고 아직 그는 명실공히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아들 압살롬의 반역의 도당들과 맞설 정도의 힘과 권세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머리를 숙이고 도망을 하면서 하나님께 그 영혼의 구원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이 전쟁이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2절에서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산성은 방패를 말하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바위이며 방패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인생 속에 얽힌 문제들로 인하여 감당할 수 없는 고뇌와 번민에 쌓여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울부짖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자신이 피할 방법을 얻지 못하여 술사를 찾던가 인간을 초월한 신적 존재로부터의 도움을 구하게 되는데 이로 하여 생긴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과 그 능력을 아는 사람들은 정말 복받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피할 곳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영혼에게 그 시간은 견딜 수 없는 지옥입니다.

 

다윗이 광야로 도망을 하면서 구원의 반석을 외치는 것은 성경적인 인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가나안 땅에 도달하기까지 무리바 광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광야 생활에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이였고 물을 얻지 못하여 갈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아우성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내려 치라 하셨고 모세가 지팡이를 내려치자 물이 솟아 올랐고 갈급한 백성들은 반석에서 솟아 오른 물을 마셨습니다.

 

바울은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1-4)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방황하는 영혼의 고통 속에서 자기를 구원하실 권능자를 발견하고 그의 영혼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3절에서 인생을 증거하여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불안전하고 온전치 못한 인간을 언급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지혜와 생각을 과신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자기 꾀에 넘어져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이 처음부터 스스로 살아 갈 수 없는 부족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담은 부족함이 없고 완전한 생령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위대한 피조물의 왕이였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늘과 땅의 기름진 것이 다 그를 위한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자기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여 자기의 자리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비하려 하여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모든 권세에게 쫓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 같아서 늘 부족하고 불안전하여 넘어지는 담과 같고 흔들리는 울타리 같아서 그 안에 있는 집을 지키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고통 중에서 인생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영혼의 고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고백하며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8) 증거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내 인생의 복을 위하여 사람과 재물에 의지합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제왕들과 지혜자들이 그 존귀와 영광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모두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에 경하리로다 말하고 다시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착심치 말지어다(10)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 권세자들의 다툼이 어디서 나고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능히 지키지 못할 부귀와 영화를 위해 포악에 의지하고 탈취를 일삼고 있습니다만 그 모든 것은 그 주인의 자리로 다시 돌아 가고 결국 그들의 영혼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다윗은 11절에서 하나님이 한 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하였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고 내가 두 번 들은 것이 이것이니 곧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는 것이라 번역하였습니다. 결국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신 것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이 그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통 중에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의 권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지혜와 또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문제는 인생을 창조한 그의 장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이 두루마리책에 모두 기록되었다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썩지 않을 육체의 소망을 바라보며 내가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 소원이나 아직은 내가 육체에 거한 것이 너희를 위해 유익하다 하였습니다. 만약 아직도 당신의 영혼이 안식하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다면 속히 당신의 육체의 소망을 위한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을 들으십시요.

 

(시편63:2)갈급하는 육체

(시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왜 교회를 향하는가 질문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로 가끔은 왜 내가 교회에 가고 있는가 그 원인과 목적을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누가 주일날 그 영혼의 갈급함을 따라 교회를 향하고 있는 것이면 그의 영혼은 정말 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가 주일에 어떤 봉사로 인하여 교회에 간다던가 또 교인으로서 교회를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교회를 간다면 그 영혼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 환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62편에서 인생의 굴레 속에 방황하는 영혼의 고통을 바라보며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하여 거듭하신 말씀을 들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63편을 통하여 의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 영혼의 갈급함이 어떤 상태인가를 발견하게 되며 그 갈급한 영혼을 만족 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하여 공부하게 됩니다.

 

다윗은 1절에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여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십 여 년 전에 갈급한 심령으로 찾아 왔었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오늘 나를 찾아 온 그 형제는 십 여년 전에 만났던 그 모습 그 문제 그대로를 가지고 또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의 형제는 여전히 갈급하여 있었고 이제는 그 갈급함의 도가 넘쳐 고갈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영혼의 갈급함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갈된 인생의 문제를 원망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또 그냥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 형제에게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함은 그 들은 바 말씀이 자신에게 유익되지 못하고 그로 하여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못함 때문이라 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4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만 이 형제가 내가 전한 말씀의 진실을 깨달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어쩌면 그의 심령은 오히려 강팍하여 분노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강팍하지 말라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형제를 보내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형제는 그 문제를 갖고 기도한지 20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두 부부가 20년을 살면서 부르짖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귀머거리이시던지 아니면 그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던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를 믿는 자들의 삶을 악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다윗의 고백을 살펴보십시다. 그는 먼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이신 전능자이시며 권세자이신 성호입니다. 그 분이 나의 주인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가 기도하는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록 의롭지 못한 인생 중에 있더라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하나님으로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한 모든 기도는 그가 들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일까요?

 

다윗은 계속하여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물을 얻지 못하여 마르고 곤핍한 땅에 비유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은 영혼과 혼과 육체의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한 부분이 부족하면 그 부족한 부분을 찾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 육체 안에 물이 부족하면 육체 안에 있는 신경은 물의 필요성을 뇌에 전달하게 되고 그것은 곧 우리 생각에게 전달되어 물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곧 물을 얻지 못하면 처음에는 적절히 다른 대체법을 강구하기도 하지만 더 심해지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갈급하고 곤핍하게 되어 모든 일을 중단하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사막 한 복판에 있고 어떤 방법으로도 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면 당신의 육체는 물을 얻지 못하여 고사직전에 이를 것이고 그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당신의 이성도 마비가 될 것입니다.

 

다윗은 2절에서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권능과 영광은 우리 영혼이 소망하는 그리스도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 가는 권능과 영광을 말한 것이며 성소는 그 권능과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어떤 부귀와 영광을 얻게 하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얻는 것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면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세상의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면 그것이 무슨 소망이되겠느냐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모든 선지자들이 소망하던 하늘에 있는 도성으로 장차 우리에게 임할 그리스도의 세계인 것입니다. 다윗은 성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의 권능과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혼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서는 세상 속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지만 내 영혼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찾아 갈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갈급한 영혼들을 위하여 그 영혼을 만족시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믿음생활을 위해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목사의 설교와 다른 것입니다. 목사는 당신의 아름다운 교회생활을 위한 설교를 하기 위해 세운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기업을 물려받을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당신의 영혼에게 그의 생명의 말씀을 전달해줄 의무와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오랜 고통의 세월을 지낸 후에야 예수를 믿어 방황하는 영혼의 구속을 받았습니다. 그 때의 그 감격은 이 지구를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였습니다. 나는 새 생명을 얻은 기쁨으로 하여 성전을 사모하였고 성전을 향하는 그 기쁨은 내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아마 내 인생에 고통의 세월이 없었다면 내 영혼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예수를 믿고도 오랜 세월 동안 불법한 자에게 가로막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벌써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살후2:7)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있으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체 갈급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여인은 오늘날 육신적 크리스챤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그들의 조상과 같이 야곱의 우물을 마시며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질문에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22) 하시며 다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하셨습니다.

 

다윗은 5절에서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당신의 육체를 위해 맛있고 영양 있는 것을 채우듯이 그리스도와 함께할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갈급하는 영혼의 만족함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그 만족함을 얻을 때까지 당신의 영혼은 물을 찾는 육체처럼 주를 갈망하며 앙모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 날이 속히 이루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 때에 당신의 영혼은 평안한 침상에 누워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당신의 영혼에 빛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시편64:2) 승리의 비결

(시64:2)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와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 시편은 다윗이 반역한 아들 압살롬을 교사하는 악한 무리들의 술책에서 자신을 지켜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다윗은 거대한 왕국을 이루자 여러 가지 이해관계에 얽혀 많은 정적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권세자들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나 또 교회에 이르기까지 같은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기의 유익과 권력을 위해 시기와 모함과 저주가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아히도벨(삼하15:12)이라는  모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술수와 지략이 출중하고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지혜가 있어 다윗으로 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하였습니다. 그는 사실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의 할아버지(삼하11:3)였습니다.  다윗이 의로운 장군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이고 그 아내를 자기의 처로 삼은 것으로 하여 그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모든 것을 꿰 뚫어 보는 자신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반란군의 모사로 돌아서자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어떤 대책을 세워도 그가 모두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하여 다윗은 그 얽힌 문제로부터 해결할 방도를 얻지 못하고 근심에 쌓여 하나님께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결국 성을 빠져 나오면서 책략가 후새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후새를 데리고 나와 아히도벨의 지략에 맞설 대책을 강구할 터인데 그는 자기를 따르던 후새를 궁에 남겨두어 아히도벨의 지략을 무너뜨리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이 궁에 두고 간 후궁들을 백성들이 보는 데서 취하여 압살롬이 모름지기 왕권을 장악하였음을 과시하게 하고 압살롬에게 다윗이 군사를 모아 대비하기 전에 군사를 동원하여 다윗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후새가 일어나 다윗은 전쟁의 경험이 많고 전술에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직 그를 따르는 명장들이 있어 섯불리 나서면 역습을 당할 것이라 말하여 아히도벨의 지략이 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압살롬이 후새의 지략을 따르므로 결국은 압살롬은 전략에서 실패하고 울분을 참지 못한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자결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전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전술보다 더 강한 전술을 모색하고 상대를 무너뜨리려 권모술수를 다 쓰지만 하나님은 악을 무너뜨리기 위해 의로운 사람들이 요동치며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대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술수가 서로 좌충우돌하여 무너지게 만드십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인간의 모든 지혜와 지략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알고 있었으며 또 하나님의 지혜는 악인을 스스로 멸하게 하시고 의인을 일으키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아들 요셉을 통하여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 형제들의 모함을 받아 애굽에 팔려 13년 간이나 종살이를 하며 옥고를 치루었지만 결국 요셉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혜를 이용하여 독한 말로 사람들을 저주하고 무너뜨리려 합니다만 하나님은 항상 정직한 자를 도와 악한 혀가 그를 넘어뜨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정치는 혀의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권자들이 하는 말들을 보면 참으로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합니다. 노무현 정권의 큰 실책은 자신의 말에 있었습니다. 지방선거 실패 후 그들은 그 실책을 서로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의 지략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혀의 말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쏟아지는 말들을 보면 심히 두렵습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운 사람들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들은 마치 전쟁을 달려가는 말과도 같이 자기들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혀를 연마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쏟아 내는 말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진리가 아니고 자기들의 높은 성을 쌓고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한 욕망의 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혀의 말로 스스로 넘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 때 의인들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할 것입니다.

출처 : 세미한 음성
글쓴이 : 요나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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