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시편서 강해

(시편39:5)인생무상

이요나 2007. 2. 26. 10:39

(시편39:5)인생무상

 

(시39:5)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시편 39편은 서두에 여두둔으로 한 노래라고 주석이 되어 있습니다. 여두둔은 역대상 9장 6절에 나오는 다윗 장막에서 찬양을 맡았던 제사장 중의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노래를 여두둔의 음률에 따라 작곡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시편62편과 77편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편들의 흐름이 모두 같은 것으로 보아 여두둔의 찬양은 인간의 연약함을 회상하며 여호와의 글휼하심을 이끌어 내는 찬송인가 봅니다.

 

다윗은 1절에서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은 내 자신을 다스리는 가장 큰 열쇠가 혀에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말의 실수가 없는 자는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하였고 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3:6) 하였습니다.

 

나는 인간사의 가장 큰 실수는 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기도하며 절제하겠다 생각을 하고 말의 실수를 하지 않으려 하지만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참지 못하고 그와 대항하여 저주를 하고 맙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인생의 허망함과 연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별 수 없는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혀를 재어하여 침묵할 때의 심정을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과 같은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원인은 자기의 분노와 고통을 가슴에 담고 있을 때 생긴다고 합니다.

 

차라리 상대와 맞서서 속 시원하게 쏟아내면 가슴이라도 후련할텐데 입을 꼭 다물고 하고 싶은 말을 참아 보십시요. 가슴에서는 불이나고 마음이 억울하여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자기 자식이나 가족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불의에 맞서서 함께 저주할 수도 책망할 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말에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속이 어떠하겠습니까?

 

다윗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을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외쳤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한 두 번 쯤은 이러한 경우를 당해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목사의 경우는 더 심합니다. 아직 성숙치 못한 성도들의 생활방법을 보며 그들을 책망할 수도 또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을 때 가슴에서 화가 폭발하고 맙니다. 그래서 목사들 중에는 심화병 환자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 모든 말을 묶어 두어 심화병을 당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모든 억울함을 오직 하나님께만 털어 놓아 주의 긍휼하심에 맡기라는 말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의 억울함으로 주께 고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들에게 저주를 당하고 질책과 미움을 당할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그보다 못할 것이 없는 데 나는 의롭다는 그 이유 하나로 핍박을 당하고 그들과 대항도 하지 못한체 가슴을 쳐야 하니 정말 그 답답함과 억울함을 참기찬 심히 어렵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존재의 연약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은 6절에서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서를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인생의 후반기에 서서 삶의 허망함을 깨달을 때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간사를 생각할 때 얼마나 미약하고 허무한 존재입니까? 언제 어떤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가운데 한낱 허무하게 사라질 호흡을 위해 먹고 마시고 또 그 마음의 풍요로움을 갖기 위해 재물을 쌓고 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 누가 있어 자신이 쌓은 재물을 지킬 수 있으며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은 모두 물거품과 같이 흐뜨러지고 맙니다.

 

다윗은 8절에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고백하며 다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한 연고니이다 하였습니다. 이런 말은 자신의 연약함과 우리의 힘과 능력되신 주를 알 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나는 최근 내 인생의 끝 날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혹시 다 늦게 암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할까?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 한번 피어 보지도 못한 체 이렇게 허망하게 마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과연 하나님의 의인으로 살아 얻은 것은 무엇일까? 나의 종말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허망함과 고통이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으로 오는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자신에 대하여 후하게 변명합니다.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인색하고 참지 못하면서 자신에 대하여는 늘 넉넉하고 매끄러운 마음으로 관대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마음을 자긍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감출 수 없습니다. 주 앞에는 그 어느 하나도 감출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듯이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하였습니다.

 

또한 계시록에는 인생의 종말에 대하여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 모든 것이 두루마리에 모두 기록되었다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누구의 죄를 논하며 누구의 인생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같이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오직 주께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어 인생의 연약함에서 자신을 지켜 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끝으로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하였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웰빙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질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한 생활을 할까 하며 좋은 것을 먹으며 운동을 하며 또 주변 환경을 깨끗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의 화복의 출발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생은 모두 허망이 죽어 흙으로 돌아갈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권세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 나서 죄악 속에서 흙으로 돌아 가고 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지킬 힘이 여호와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주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의 도우심과 지키심을 바랄 때 주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의 은혜로 싸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건강도 회복될 것입니다. 주여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나의 죄에서 벗어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