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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40:1) 의인과 두루마리 책

이요나 2007. 2. 26. 10:39

(시편40:1) 의인과 두루마리 책

 

(시40: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오늘은 시편 40편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이 시편 역시 메시야 시편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 다윗은 인생의 오랜 방황 속에서 이 진리를 터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을 깨닫을 때가 되면 사실 그때가 믿음의 철이 들 때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하려 하니 부모가 계시지 않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의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자신을 돌아 보게 되고 또 세상의 섭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1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고난이 얼마나 깊었으며 또 주 여호와를 향한 구원의 요청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 외에 그 해결책을 의뢰할 곳이 없는 극한 고통에 처해 본 일이 있으신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지옥 같은 고통의 순간 속에 나의 아픈 마음과 구원의 호소를 외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젊은 시절 하나님을 모르고 또 외면한 체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 왔습니다. 아마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강구하고 돈이면 돈, 사람이면 사람, 물리적인 것이면 물리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하기 위해 안간 힘을 썼습니다.

 

이와 같인 사람들은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면 자신의 지혜와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문제는 점점 커져서 도저히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무능력함을 괴로워하며 굴복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어떤 인생의 문제들이 생기면 그것을 먼저 신에게 고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오히려 신에게 무엇을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고 이성적 본능이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지혜와 힘을 해결하려다가 결국 문제만 눈덩이처럼 커져서 자신의 한계 밖이 될 때 그때서야 그 이성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게 굴복하고 그 일의 결말을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 묻거리를 하기도 하고 또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주머니를 털어 비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때 차라리 전능하시고 은혜를 주시기 원하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정말 복받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주 예수를 믿으면서부터 항상 내 모든 문제를 의논하고 그 해결책을 구할 분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요즘도 아침이나 저녁이나 내 영혼은 주 여호와를 향하여 나의 고통과 억울함과 애통함을 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그 문제가 금방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주께서 내 기도를 듣고 계시고 또 분명히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2절에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의 다윗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습니다. 나뿐 아니라 깊은 웅덩이와 수렁 속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모두 이와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어떨 때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체험케 하시는가 하고 의문을 갖습니다. 차라리 우리 같으면 어짜피 구원하실 것이라면 처음부터 그 수렁에 들어가지 않게 하시면 좋았을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그 고통을 경험한 것과 그냥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깊은 웅덩이와 수렁을 체험하지 않고 사전에 경고를 받아 수렁을 모면할 수 있었다면 당신은 고도의 영적 수련자이던가 아니면 당신은 지금보다 더 큰 수렁과 웅덩이를 체험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간 일들에 대하여 망각하고 또 고통의 시간들에 대하여 일부러 잊으려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도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본성을 갖고 있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가막힐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은 그 때의 일은 쉽게 잊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망각하고 또 다시 고통을 겪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은 점점 굳건한 반석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께 새노래로 찬송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노래란 지금까지 없었던 노래 곧 우리가 주께 드리는 노래는 매일매일 입으로 외워서 부르는 유행가가 아니라 새로운 체험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노래인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3절).

다윗은 4절에서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였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꾀를 의지하고 또 모든 수단을 통하여 인생을 극복하려 합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산 것처럼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 가운데서 수많은 인생의 고통을 이길 때마다 우리의 입에서는 여호와의 크고 크신 위대한 기사와 이적들을 기억하게 됩니다. 다윗은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배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다 하였습니다.

 

우리 찬송가 중에 네가 받은 은혜를 손꼽아 보아라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나는 가끔 나의 기도가 너무 오래 동안 응답되지 않아 서운해질 때에 이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란 정말 손으로 꼽을 수 없을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헌신(6-8)

우리가 주의 은혜에 대해 이처럼 감사할 수 밖에 없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값을 내게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값을 치루었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다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께 입은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애써 봉사를 하려하고 또 교회에 충성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하신 것은 나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의 뜻을 따라 나의 죄를 자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루마리 책이란 말할 것도 없이 성경책을 의미합니다. 성경책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그의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통하여 친히 쓰신 하나님의 일기장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랜 역사 속에서 그의 자녀된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숨소리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나의 출생과 삶과 믿음과 배신과 은혜의 부르심에 관한 그 모든 종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 나의 인생이 살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부르심에 대해 나의 응답이 필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때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부르심에 내가 왔나이다 하고 응답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부름이며 곧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심과 또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의 오심과 죽으심으로 내가 죄의 허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나의 부르심이기도 하며 또 하나님 앞에 선 나의 인생이기도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성인 중 한 사람으로 기억하며모든 종교는 다 의롭고 선한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의로움이 무엇이며 선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선함과 의로움은 예수를 믿어야만 그 본성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인정하면서도 그를 믿지 않는 것은 예수를 신적 존재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이 죄인으로 비굴한 위치에 서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오직 주를 통하여 그 죄에서 자유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을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뜻이란 주의 계획과 예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음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에는 새로운 주의 법이 새겨집니다. 그래서 나의 심령이 기뻐하며 주의 뜻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다윗은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외쳤습니다. 지금 다윗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교회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다윗의 입을 통하여 주의 영이 그의 날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의 터인 것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의가 퇴색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 하며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의 의를 외치며 그 입에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성실치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길

다윗은 11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하였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의 제자들을 여호와께 의뢰하며 주의 진리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다 하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진다 증거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외면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진리의 길이 좁고 협착하여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조롱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본 되신 주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시며 침뱉음을 당하시고 채칙을 맞으시고 끝내 죽임을 당하셨는데 그의 의를 따르는 우리가 어찌 자기의 영광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다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인생이며 또한 세상 가운데의 의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서 구원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는 오직 하늘에 계신 분에게 있으므로 우리는 하늘에 높이 들리신 분을 향하여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외쳤습니다.

 

 

끝으로 다윗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 가운데서 그의 기록된 말씀을 따라 성별된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세상은 자기의 의를 말하지만 우리는 오직 우리의 죄를 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따라 대회 중에서 기쁜 소식의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로므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주께 있는 것입니다. 주여 부디 나를 긍휼이 여겨 주옵소서. 내가 영영 주의 뜻을 따르오리다. 아멘 아멘.